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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Jul 25. 2024

진드기 수난시대

 이천십육년 삼월의 이야기

내가 살고 있는 영월은 전체 면적 중 80%가 산림으로 이루어진 흔히 문만 열면 산이 보이는 지역이다(실제로 '문산'이 마을 이름인 곳도 있다). 우리 집도 조금만 걸으면 봉래산에 오를 수 있고 사무실 옆에 작은 산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벼운 산책도 즐길 수 있다.  


365일 편하게 산책과 등산을 즐길 수 있으니 영월은 전 지역이 숲이며 공원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힐링 열풍이 분 이후로는 더더욱 영월의 산책로와 등산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산에서 관광객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집 근처, 또 차를 타고 십 분 거리에 있는 산책로로는 대여섯 군데가 넘는다. 영월 주민들의 일등 산책로인 장릉 옆 물무리골산책로를 비롯해 누리의 마당이 되는 금강정산책로, 소나무가 가득한 능말숲산책로, 우리만 알고 싶은 흥교산책로와 송이골산책로 등등.

 

한두 곳은 약간의 등산에너지가 필요해 똘이가 갈 수 없는 곳도 있지만 완만한 숲길이나 시야가 트인 길은 똘이도 항상 함께 한다. 백내장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우리 집에 온 똘이는 숲길 산책이 꽤나 신경쓰이는데 열흘 전 자궁축농증 수술을 받은 터여서 더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십이월부터 이듬해 삼월 사이에 숲길 산책을 하는데, 이유는 반려견들의 혈액을 주식으로 하는 악명 높은 진드기 때문이다. 누리를 키우기 전에는 진드기에 대해서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막상 누리가 진드기의 먹잇감이라고 생각하니 볕이 좋은 화창한 날을 반기면서도 진드기에 물리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특히 강아지들에게 많이 보이는 참진드기는 일단 피부에 붙어서 흡혈을 시작하면 금세 공처럼 부풀고 보호색으로 모습을 감춰 심한 경우 며칠이 지난 후에야 발견할 때도 있다. 누리 역시 머리에 콩만한 진드기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핀셋을 찾을 새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징그러워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입에서는 으으-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어떡하랴.


더구나 떼어낸 진드기는 피주머니를 완전히 터트려 확인 죽음까지 해야 하는데, 그때는 마치 CSI 과학수사대 검시관이 된 기분이다.  가끔은 거실 청소를 하다가 소파 밑에서 말라비틀어진 진드기 사체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날은 온 집안의 이불과 외출복을 세탁하는 날로 세 개의 빨래건조대가 풀로 돌아가며 탈수하는 족족 걷어들이고 널고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삼월이라서 괜찮겠지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며칠 전 숲길 산책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내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였다. 새끼 진드기 오백 마리(넘으면 넘었지 이하는 절대 아니라는 딸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에)가 누리 털에 달라붙어 집으로 온 것.


트로이 목마(악성코드 말고)도 아니고 움직일 때는 깜쪽같이 숨어있다가 피곤에 지친 누리가 가만히 누워 있으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진드기들. 스멀스멀 기어나오다가 털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숨기를 반복하는 진드기들은 어느새 물리쳐야 할 적군이 되었다.

  

올인원 기생충을 먹이고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지인의 조언이 있었지만 딸과 나는 가장 빠르고 효과 만점인 그러나 무한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투명테이프로 떼어내기 작전에 돌입했다. 그나마 누리 털이 밝은 색이어서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쪼그리고 앉아 새벽 2시까지 지난한 작업을 이어갔다.  


거실 청소와 빨래까지 마치자 새벽 4시. 물론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몇 마리씩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최최후의 수단으로 진드기를 끝장내는 방법… 으로 택한 것이 진드기들이 붙어 있지 못하게 털을 빡빡 미는 것이었다. 한동안 못생겨진 얼굴과 약간은 부담스러운 누리의 몸라인을 본다는 것이 미안하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적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면야!       

 

진드기를 잡으면서 태어나 이를 갈 정도의 독한 마음을 먹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향긋한 봄꽃 내음과 생그레한 볕을 즐길 수 있는 삼월에 숲길 산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진드기의 활동 시기가 점점 늘어나는 것도 온난화 때문일까. 징글징글한 진드기 생각에 몸서리치다 문득 당연하다고 여기며 진심으로 걱정 한 번 해준 적 없는 지구에게 미안해 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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