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오 년 시월의 이야기
주말 아침, 누리의 퉁퉁한 배를 두드리며 뒹굴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했다. 혼자 살고 계시던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면서 버려진 유기견(이름은 똘이, 나이는 열한두 살로 추정) 한 마리를 데리고 있다면서, 빨리 와 보라고.
엄마가 들려주는 똘이의 스토리는 이랬다. 두 달 전 혼자 살고 계시던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면서 똘이는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마당에서 혼자 지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배고프다고 짖어대는 똘이에게 이웃들은 담 너머로 사료를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도시에 살던 자식들이 집 정리를 위해 내려왔다가 똘이를 데려다가 키울 사람을 수소문했고(사실 왜 이렇게 뒤늦게 키울 사람을 찾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소식이 엄마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엄마는 작은 백반집을 하고 계셨는데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똘이 얘기를 전해 주셨고 동물을 좋아하는 엄마는 그 얘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똘이의 첫인상은 언뜻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보였다. 얼굴에는 검은색과 흰색 털이 섞여 있고 등과 엉덩이는 회갈색의 털이 솟구치듯 덮고 있어 너구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태어나 털 정리나 목욕을 한 적이 없어 보였다.
난감했다. 똘이가 누리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경제적인 부담을 더 감당할 수 있을지. 그렇다고 오갈 데 없는 똘이를 이대로 버려둘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시간이었다. 어느 것도 똑 부러지게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당에 감이 익어갈 무렵 똘이는 우리 집으로 왔다.
똘이를 보자마자 누리는 견생 처음으로 웍웍! 짖었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낯선 똘이의 출현이 놀라워서인지, 경고성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딱 한 번 똘이를 향해 짖었다. 나는 똘이와 누리가 친하게 지내길 바라면서 목욕을 시키고 병원에 데려가 간단한 검진을 받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무엇보다 누리도, 똘이도 친구가 생겨서 덜 외롭겠지… 라는 막연하고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똘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둘은 친해 보이지 않았다. 똘이는 집안 생활이 적응되지 않는지 문만 열리면 밖으로 뛰쳐나갔고 집안과 마당을 오가는 이중생활을 했다. 그런 똘이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누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데면데면한 가운데 어쩌다 부딪히기라도 하면 똘이는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냈다. 마치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는 나무람 같았다.
감나무 밑은 똘이의 전용 침대가 되었다. 햇볕이 잘 든다는 걸 용케 알아채고는 나올 줄을 몰랐다. 오후만 되면 감나무잎 한 장을 베개 삼아 단잠을 즐기는 장소다. 혓바닥을 살짝 내밀고 자는 폼은 메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미소를 짓게 했다. 최소한 똘이는 우리 집 생활이 평화로워 보였다.
유년시절, 집에 손님이 종종 왔다. 먼 친척이 방문하거나 가끔 약초를 캐러 오는 나그네들이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 ‘언제 한 번 갈게’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인사치레로 말하는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가 아니었다. 그 약속은 서너 달 후에 건 일 년 후에 건 지켜졌고 그래서 대체로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들을 환대했고 건넌방에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고 산으로 밭으로 뛰어가 조물조물한 반찬들로 극진히 대했다. 손님들은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사나흘이 지나면 본래의 집으로 돌아갔고 평온한 일상은 다시 이어졌다.
그런데!
그 손님이 가지 않는다. 하루나 이틀 사나흘 묵었으면 본래의 집이든 다른 여행지든 떠나야 하는데 가지 않는다. 세대와 문화차이로 대화도 통하지 않는, 몸도 마음도 불편한 동거생활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 눈치까지 봐야 하는 안절부절이라니.
문득 누리와 똘이도 그런 사이는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누리에게는 정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다시 말하면 좀 더 심사숙고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적잖은 회의감이 들었다.
불편한 동거 한 달이 지난 요즘도 둘은 여전히 어색한 관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산책길에서만큼은 같이 냄새를 맡고, 영역 표시도 따라 하며 나란히 걷기도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위로하듯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의문에 자답했다. 사람도 낯선 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 누리와 똘이도 그럴 것이라고.
아니면 꼭 친해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에서 밥도 먹고 산책도 하며 같은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으니까. 그냥 각자가 잘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린 왕자(생텍쥐페리)'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서로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오직 하나뿐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거창한 인연의 의미를 누리와 똘이에게서 찾았던 것은 아닌지.
천방지축 똥꼬발랄한 두 살 누리와 산전수전 마당개로 살았던 열 살 똘이. 둘에게는 짧든 길든 자기만의 견생방식이 있으리라. 그 방식을 존중함과 동시에 관조하는 것이야말로 견주인 내가 할 일이 아닐까. 행복의 모양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