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오 년 사월의 이야기
두 살을 훌쩍 넘어서자 누리의 몸무게는 달달이 최고치를 경신했다. 근육일 것이라고, 근육이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은 우리는 검진하러 갈 때마다 건장한 의사 선생님께 측정을 부탁하고 체중계의 숫자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몸무게의 앞자리는 이월부터 삼을 찍기 시작하더니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의사 선생님은 조금씩 체중 관리를 해줄 것을 권했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시기가 지나면 온순한 리트리버들은 잘 움직이지 않아 비만이 될 수도 있다고.
수영을 사계절 내내 할 수도 없고 다이어트라는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서는 사람처럼 내 미간은 산맥을 그렸다. 최근에 고기를 많이 줘서일까부터 시작해 사료 양을 줄여야 하나, 간식을 아예 끊어? 까지 생각은 나아갔다.
태생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찌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가 아무리 먹어도 안 찌는 사람들인데 우리 가족이 그렇다. 그래서 뼈를 깎는 다이어트니, 피나는 다이어트라는 말은 우리에게 관념적 문장일 뿐인데 그런 우리가 누리에게 다이어트를 시킨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거기에 ‘누리에게 사료만 먹이는 건 나한테 평생 라면만 먹고 살라는 것과 같다’, ‘너무 앞서가느라 누리의 행복을 뺏는 것은 가혹하다’는 아들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은 우리로서는 일단 고기와 과일 간식을 조절함과 동시에 포만감을 높여주는 채소 위주로 식단을 짜기로 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변이 묽어지는 현상이었다. 결국 채소 간식까지 반 이상 줄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산을 넘자 또 산이 나타났다. 허기가 도는지 산책을 나가서 다른 강아지 응가에 식욕을 보이거나 틈만 나면 풀을 뜯어먹는 것이었다. 다른 강아지 응가에 식욕을 보일 때 견주들의 감정은 말해 무엇하랴. 정말이지 너무너무 밉다. 미워서 짜증이 나 혼잣말로 씩씩거린다. 이런 식으로 반려견과 미운 정이 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다이어트를 괜히 시작한 건 아닌지, 아들의 말처럼 누리에게 너무 가혹하게 하는 건 아닌지 숙고의 시간이 찾아왔다. 결론은 아들의 말이 옳았다. 사람 나이로 치면 고등학생인 누리, 어떻게 보면 먹는 양도 더 많이 필요할 시기인데 건강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누리의 최행(최고의 행복)을 빼앗다니.
살이 조금 찌면 어떤가, 건강에 위협이 되지 않을 만큼 관리하면 되는 것이고. 배가 조금 나오면 또 어떤가, 도그쇼에 나갈 것도 아닌데. 그냥 우리가 바라는 것은 누리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하여,
누리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료는 하루 두 번 정해진 양을 먹고 간식도 신선한 고기와 야채를 적절한 비율에 맞춰 먹고 있다. 보통 고기는 일주일에 한 번 생고기나 삶은 닭가슴살을 먹이고 채소와 과일은 거의 매일 먹는다. 특히 초록 바나나는 온 가족이 빠트리지 않고 챙겨먹는 아침 과일로 나눠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일까 누리는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오늘도 누리는 아침에 일어나 앞발 기지개를 시원하게 펴고는 거실 창 앞으로 간다. 나도 누리 옆으로 가서 눈꼽을 떼어 주고 내 것도 뗀다.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한 우리는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다. 누리의 시선은 마당과 하늘 중간쯤에 멈춰 허공에 대고 킁킁킁 냄새를 맡는다. 그럴 때면 까맣고 반질한 코에서 이슬같은 콧물이 댕글거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너무 예뻐 보였다. 굳이 해석을 붙이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아- 밤새 잘 잤다. 오늘도 기분이 상쾌한 걸’의 상태표시줄 같은.
그렇게 창문 앞에서 냄새를 맡다가 마당 위로 후두두 날아가는 새를 본다. 둥절한 누리는 머리를 좌, 우로 절도있게 로봇댄스를 추고 그때를 놓칠세라 나는 “누리야, 방금 새 봤어? 새야, 새.” 막 입을 뗀 아기에게 말을 가르치듯 ‘새’를 반복한다.
아침 루틴의 마지막은 누리의 통통한 배를 토닥거린 후 포옹을 하는 것이다. 등에서 하는 몸포옹을 할 수 있고, 앉은 상태에서 목포옹을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든 누리는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 준다. 그런 무한신뢰의 행동은 나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 이대로, 충분히 만족한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마음껏 누리는 일만 남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