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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Aug 07. 2024

매일 밤 옆에 있어 줄개

이천십구 년 시월의 이야기

간만에 속상한 일이 생겼다.(좋은 건가?)


가깝게 지내던 선배가 나에게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다며 어떤 일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며 밤늦게 전화를 했다. 나는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선배는 나를 손절했는지 전화도 받지 않고 마주칠 때마다 느낌이 쎄했다.         


2000년대 초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만남을 이어주는 '재회 컨셉'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주로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자식과 헤어졌던 부모들의 출연이 많았다.  


특히 해외에 입양되었다가 수십 년 만에 가족과 상봉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으며 한국말이 서툴러 더듬더듬 거리면서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미안하다는 어머니를 향해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며 껴안고 우는 자식의 모습에서 용서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확인하곤 했다.


문득 그 프로그램이 생각난 건, 머지않아 그 선배가 나에게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 마음을 받아주고 용서할 수 있을까에서 비롯된 과도한 피해의식에서였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나의 고통이 제일 커 보이기 마련이니까.  


사실 용서를 할 수 있을까의 이면에는 나에 대한 험담과 비난이 섞인 소문, 뒷담화들이 퍼질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선배는 그렇게 대담한 복수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오해로 얼룩진 소문이 맹신적 믿음에 안착하면 뱀의 혀처럼 살살거리는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내가 허우적댈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역시나, 실제 그런 소문을 듣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TV 프로그램 얘기로 돌아가보면 자식이 부모를 용서함으로써 그 부모는 죽어있던 삶이 다시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용서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눈물을 쏟으면서 뜨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용서에 인색해졌다.

비난을 받으면 같은 비난과 험담으로, 상처를 받으면 같은 상처로 앙갚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위 사이다 행동이 각광받고 있다. 당한 게 있으면 몇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정의로 포장되고 그와 함께 복수와 참교육을 주제로 한 TV드라마나 영화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솔직히 나도 화가 났다. 밤늦게 나를 질타하고 비난하는 전화를 받은 것도, 손절한 듯 나를 대하는 공격적인 선배의 눈빛을 보며 나도 같이 퍼붓고 지르고 싶었다. 근데 정말 그랬다면 내 기분이 나아지고 문제가 해결됐을까 생각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누리를 안고 한참을 있었다. 딸이 한 것처럼 누리에게 속상한 마음을 기대어 놓았다. 그렇게 하는 게 세상 누구한테 털어놓는 것보다 편하기도 했고, 따뜻하고 듬직한 누리의 온기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 왠지 오늘만 자고 나면, 또 오늘만 자고 나면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보름쯤 지나 오해가 풀렸고 선배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해왔다. 그 마음을 받아줬고 예전처럼 불편함 없이 대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선배와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선배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의지나 마음이 단단하고 넓어서가 아니었다. 변함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고 응원해 주는 가족과 누리 만으로 충분히 행복을 누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쯤은 괜찮고 견딜만 하니까 기다려 보라는 무언의 지지 같은 것이랄까.    


오늘밤도 온돌방 같은 누리 배밑에 발가락을 들이밀고 쓸데 없는 상상을 해본다.

혹시 수백 년쯤 지나고 나면 용서나 자비, 인자한 마음 같은 건 부단히 노력하고 자신을 계발해야 부여받을 수 있는 라이선스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고. 그럼 AI로봇에게도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되어야 겠지? 뭐 이런 진짜 쓸데 없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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