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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Aug 21. 2024

퇴사한 딸 옆에 개기는 개딸

이천이십 년 십이월의 이야기

아침 7시. 

촙촙촙촙촙촙촙…. 


일곱 살, 노견의 대열에 들어선 누리는 언니가 집에 오고부터 매일 아침 언니방으로 출근을 했다. 


언니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불이 켜져 있든 꺼져 있든 '철퍼덕' 언니 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거실의 동태를 살피는 경비를 자처한다.  열린 문 사이로 자신의 아침밥이 잘 준비되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고, 아침마다 돌아가는 청소기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장소.  




코로나로 전 세계가 불안에 떨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집이었다. 

첫 직장에서 퇴직금이 아까워서라도 3년은 버텨보겠다던 딸은 정확히 3년을 채운 후 퇴사를 했고 마음도 바이러스도 가장 안전한 집으로 내려왔다. 


퇴사 한 달 전 퇴직금과 모아 두었던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을 만들었고 친구들과 여행 일정을 짜고 베이킹 수업을 신청하는 등 퇴사 후 여유로운 삶을 계획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삿짐을 빼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휴게소에서 딸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두둑한 봉투를. 봉투 안에는 자그마치 오백만 원이라는 현금이 들어 있었다.    


오백만 원의 힘이었을까, 막상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보통의 엄마들처럼 조금 더 버텨주기를 기대했던 아쉬움은 얄팍한 한지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하긴 퇴사를 한 마당에 3년이나 버텨 준 것만 해도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인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솔직히 내가 아쉬움으로 포장했던 마음의 불편함은 딸이 공식적인 백수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식은 어떻게 보면 확장된 개념의 또 다른 나라고 볼 때 퇴사를 한 것도, 백수가 되는 것도 내가 당한 일처럼 여겨졌고 미래에 대한 조바심을 느끼게 했으니까.  


다행히도 그 조바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석 달 후 딸은 퇴직금이 통장에서 살금살금 빠져나가는 게 견디기 어려웠는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내년에 다시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딸과 달리 누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런저런 생활의 반응에 무관심하거나 느려졌다. 누리 앞에서 딸이 한바탕 춤을 춰도 눈만 껌벅껌벅 '이 언니가 오늘은 또 왜 이러나' 싶은 눈빛이고, 간식이 없으면 뽀뽀도 해 주지 않았다. 치사하게!  


마당에 실외배변을 하는 누리는 쉬나 응가가 마려우면 현관문을 긁으며 열어달라고 하는데, 볼일을 보고 들어올 때마다 잘했다고 간식을 주는 버릇을 들인 우리는 골든리트리버가 얼마나 JQ(잔머리 지능)에 뛰어난 반려견인지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한 번에 쉬와 응가를 하던 누리가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얼마 전부터 쉬를 하고 들어와 간식을 얻어먹고는 다시 응가를 하러 나가는 것이었다(어떤 날은 응가를 하고 쉬를 한다). 고작 2분 사이에. 처음에는 우연이겠지 싶었는데 그 횟수가 잦아질수록 우리는 누리의 JQ에 졌음을 인정했다. 쉬와 응가를 조절할 수 있는 엄청나게 건강한 방광과 괄약근 소유견 누리는 그러고 나면 위풍당당한 몸짓으로 거실에서 나를 쳐다봤다. 


'뭐해? 빨리 간식 안 주고' 이런 표정으로 말이다.  


간식을 자주 먹는 것 같아 시선을 피할라 치면 주방, 화장실, 세탁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 태세로 측은하지만 강렬한 레이저를 쏘아댄다. 그것뿐이 아니다. '기다려'라는 말은 듣는 척만 하고 날쌔고 잽싸게 간식을 낚아채기까지 한다. 짬밥 꽤나 먹어 본 형아들의 몸개그처럼 누리는 우리에게 웃음을 줬다.  


이런 누리의 행동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었구나', '그래서 우리도 만만한 사이가 되어가나?' 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싸울 때 '내가 만만해 보여?(= 너 지금 나 무시하냐?)' 관계가 아닌 만만해서 부담 없고, 만만해서 편하고, 만만해서 투정 부리고 기대고 싶은 사이 말이다. 


누리가 앞으로 우리와 몇 년을 더 함께 할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만만하게 개기면서 주인 눈치를 보지 않는 편한 친구로 지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반려견의 베스트프랜드가 견주라면 서로가 분명 행복할 거라는 오지랖 건너는 기대를 하며 오늘 저녁에는 누리는 닭가슴살 육수, 나는 뱅쇼로 건배 좀 해야겠다. 우리의 빛나는 우정을 위하여! 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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