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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영 May 05. 2024

19금 OTT콘텐츠 소비와 인간의 이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속 주인공이 알려준 인간의 이질


              일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이란 책을 읽었을 때, 그는 수많은 자살 시도를 하고도 죽지 못한 사람, 단순 운명이 그를 자의적 죽음을 방해하고 있다고도 느꼈다. 그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아닌 ‘우울’이라는 무형의 감정으로 부르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인간실격이란 그의 자전적 소설을 통해 본 다자이 오사무는 그가 인간을 향한 시선을 아무런 꾸밈이나 편집 없이 드러낸다. 마치 눈앞에서 지인이 지속적으로 생(生)에서 이탈하려는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를 ’ 불쾌함의 골짜기‘가 느껴진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이질적 불편함의 논리로 이야기할 수 도 있겠다.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일기‘ 혹은 ‘에세이’로 출판되지 않고, 일부러 자전적 ‘소설’ 출간된 게 아니었을까?


         실제로 인간은 잔인한 소설이나 드라마를 즐겨보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을 당하거나 겪는 건, 그 누구도 원치 않는다. 넷플릭스나 티빙 등 OTT에서 방영하는 폭력 수위가 높은 장르의 드라마나 영화가 큰 인기를 얻는 것도 모두 우리의 뇌는 허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실제 범죄사건을 재구성하여 드라마화하여 방영하는 일은 주변인들로 하여금 다소 잔인한 일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당연히 소재로 쓰기 이에 모든 허가가 있었으리라 믿지만, 그 결정을 하기까지 남겨진 사람들에게 인간 윤리적인 방법으로 다가가 소재 사용 허가를 과연 받았는지는 의심이 든다.


       한 생명을 잃은 주변인들은 한 때 살아있었고, 그들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을 피해자의 생(生)을 모두가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소재 허락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 사건을 모티브 한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을 하면 댓글이나 기사로 ’ 흥미진진‘ 혹은 ’ 재밌다’라는 평가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 일을 실제 주변인의 일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재미있는’이라는 표현은 과연 이타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교육하는 현 사회에서 적합한 표현이 맞는지 우선 생각했다. 우리가 불편해하고, 이질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은 이런 인간의 이중적인 면이다.

 

이런 류(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의 대중적 콘텐츠들)의 콘텐츠를 접하는 시청자들이 조금의 윤리적 의심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해당의 콘텐츠들을 ‘즐기는’ 것이 대중화 그리고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과 직접적인 댓글은 달지 않았지만 해당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청자로서 내가 ’ 즐기고 ‘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난 심지어 이런 장르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기에 스스로 더 충격을 받았다. 또 요즘 드라마가 방영되면, 네이버에서는 실시간 소통을 할 수 있는 채팅형 소통 창구로 시청자들끼리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의 온라인 댓글 창은 고인과 피해자 주변인들을 위해 닫아 두는 편이 고인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은 절대로 실제 범죄를 보티브로 한 소재를 콘텐츠화 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양날의 칼이지만, 피해자 주변인의 허가가 있다면 당연히 소재화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소재를 보는 많은 시청자들이 과연 단순 ‘오락’ 혹은 ‘재미’ 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실제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인들의 고통을 입체적으로 공감하고 또 이면의 한 생명이 여럿에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이해하며, 본인이 소비하고 있는 콘텐츠의 본체가 절대적으로 ‘불편한’ 일 임을 인지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샜지만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위에 이야기한 맥락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으면, 그가 왜 이토록 인간을 혐오했는지 마음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본인의 것이지만, 이를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마음은 더 이상 본인의 것이 아니다. 요즘 나는 인간을 혐오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는데, 이를 딱 한 번이지만 입 밖으로 말한 적도 있었다. 난 이 일을 후회한다. 애당초 그럴 자격이 없다. 우리가 간과하며 살아가는 비윤리적인 행위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 예상되고, 그걸 깨달았다한들 사회화된 현상을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한 개인이 바꾸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을 더욱더 혐오하지만, 그러기에 인간을 더욱더 이해한다.


         아마 다자이의 수없이 많았던 자살시도는 그를 위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타인을 위한 생의 종결이었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전되었다. 그것이 다자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의 자살시도가 단순히 극도의 우울증과 허무주의로 묘사되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 되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단, 사회가 주는 혜택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타당한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에 한해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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