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영 Jun 01. 2024

6월, 마음이 가득 찬 느린 인생

짧은 글

여름이었던 곳에 다녀오니 강한 햇빛에 얼굴은 살곁이 벗겨질 대로 벗겨져 엉망이 되었고, 집 곳곳에 산을 이루는 무언가가 생겨났다. 먼지더미 산, 설거지 거리 산, 마른빨래 산 등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약을 먹고 난 뒤, 할 일을 자꾸 잊어버려 큰 화이트보드를 샀다. 회색 냉장고 오른편에 붙어 있는 큰 화이트보드에 차례대로 해야 할 일을 적어나갔다. 약 먹기, 청소, 화장실청소, 쓰레기 모으기 ,,  등등 절반만 하기로 마음먹은 채 딱 절반만 했다. 남들에겐 1시간 안에 끝날일은 나에게 5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했다. 느리지만 해냈다. 해야 할 일의 절반을 끝내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좋아하는 옷과 새로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좋았다. 가려고 했던 빈티지샵과 북카페는 찾아가 보니 모두 영업 종료였다. 내 계획이 아닌 우연한 만남이 있으려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근처 북카페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핸드드립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마들렌을 먹으며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한 권 다 읽고 난 뒤, 열람용 에세이를 한 권 읽었다.


세상엔 좋은 글이 많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이 많아서 이런 좋은 위로의 글이 나오는 걸까? 슬프면서도 고마웠다. 내가 사랑하는 시들은 여전히 오늘도 그 자리에서 나를 묵묵히 위로해 주었고, 새로 만난 책도 나와 처지가 비슷하여 큰 위로가 되었다.



새로 만난 책의 말미에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다. 무해하지 않은 사람. 이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친환경 무공해 사랑 이란 글을 사용한 책이 생각났다. 무해하다. 무공해. 상처 주고 상처받기에 익숙하고, 죽은 후 시체가 부패될 때조차 악취와 벌레가 득실 거리는 인간에게 무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랑하고, 살아가고, 무해해지고 싶아 졌다. 조금 남들보다 느려도, 그래도 충분히 길가의 바람의 방향과 나뭇잎의 색깔을 눈에 모두 담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오늘 다녀온 북카페처럼 취향을 공유하는 공간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아하는 옷들과 음료, 책, 재즈 한 곳에 어우러져 쉼을 주는 공간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아주 천천히 내 삶의 방향을 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돗을 움직이듯이 움직여야지. 이전과 다르게 난 아주 많이 느려졌다. 아주 천천히, 느리지만 그럼에도 방향을 잃지 말아야겠다.



p.s.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목을 끄는 다육이가 있어 데려왔다. 이 작은 식물 하나에 이런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단 것에 스스로 놀랐다. 오키나와에서 보던 바다포도와 닮아 이 친구 이름은 바다포도다. 골동품 가게를 돌며 가장 어울리는 집을 찾아주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으로 시를 읽는 풍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