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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Jan 24. 2023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2)

-김수영의 시와 삶을 함께 읽기

김수영을 읽기 위한 인트로 2     



김수영 시의 총체를 말할 때, ‘온몸의 시’를 말하고는 합니다. 이 말은 1968년 4월에 부산에서 한 문학강연 원고인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는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죠. 이 산문은 지금 읽어봐도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는 부제처럼 힘이 넘칩니다. 이 ‘온몸의 시’는 김수영이 죽기 두어 달 전에 발언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말년에 도달한 어떤 경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가 김수영을 읽어가다 보면 느낄  있을 것입니다만, ‘온몸의  1968,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침내도달한 것이 아니라 김수영 자신이 자신의 평생을 요약한 것으로 이해해야 옳을  같습니다.  요약의 구체적 계기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어쩌면 김수영 자신의 평생 경험이 하이데거 사상의 어느 지점과 만난 것은 아닌가도 싶습니다. 「시여, 침을 뱉어라」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에  영향을 받은 산문이거든요.


시간상으로도 그렇고,  부분은 여기서 길게 거론할 문제는 아니고 연구 차원에서 파고들 주제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강의가 끝나는 지점에서 잠시 언급해볼 생각입니다.      


아무튼 김수영의 ‘온몸의 시’는 김수영 시의 총체인 게 맞습니다. 그런데 이 ‘온몸의 시’가 김수영 자신의 평생이 요약된 것이라면 그 평생의 여기저기에 그 단초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주제도 사실 연구에 값하는 공부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이번에 ‘김수영 읽기’를 하면서 그 단초를 일부 발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온몸의 시’를 이해하기 전에, 초기시에 등장하는 다음 두 가지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것은 ‘정직’과 ‘자기극복 의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초기시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김수영의 내면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김수영의 내면에서 왜 그렇게 꺼지지 않고 타올랐으며,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명료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을 그 심연에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단지 김수영의 경우, 앞에서 말한 영혼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현실로 인해 그 불은 더욱 타올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인상적인 구절을 메모해둔 게 있는데 여기에서 소개해보겠습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의 첫 저서인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에 실린 어느 글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참다운 창조행위가 인간이 자신의 사람됨 이외의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못하고 기존하는 여하한 가치보다 크고 풍성한 어떤 새로움을 오직 그 사람됨 자체의 강인성과 존엄성으로부터 찾아내는, 말하자면 항상 ‘기사회생’이라 불러 마땅한 과정이다.” 결국 시는 사람이 쓰는 것이라면 이 “사람됨”의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됨’은 결국 시인의 작품으로 나타나게 마련인데, 저는 이 말을 김수영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됨 자체의 강인성과 존엄성”이 김수영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긴 경우를 우리는 앞으로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정직’과 ‘자기극복 의지’에 이미 그것이 보이지 않나요?     


먼저 ‘정직’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두죠. 1964년에 쓴 「요동하는 포즈들」에서 김수영은 김현승의 시 「무형의 노래」를 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 시에서 문명 비평이니 잠재의식이니 발언이니 하는 것은 찾을 수 없지만, 거짓말이 없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거짓말’은 무슨 도덕 규범을 어기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과 정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기시인 「공자의 생활난」에서 ‘정직’을 「달나라의 장난」에서 ‘자기극복 의지’를 표출합니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가 단계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자의 생활난」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공자의 생활난」에서도 ‘자기극복 의지’는 피력됩니다. 마찬가지로 「달나라의 장난」에서 ‘정직’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김수영의 경우 ‘정직’과 ‘자기극복 의지’가 ‘온몸의 시’를 떠받쳐주면서 일종의 삼위일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제 나름의 도식화인데, 이런 도식화는 미세한 부분들을 빠트리는 부작용은 있지만, 도식을 통해 읽으면 적잖이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이 도식에 맞춰 읽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요, 강을 건너는 뗏목으로 삼을 만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연구자나 비평가에 따라서는 1940년대의 작품들, 그러니까 「달나라의 장난」 이전 작품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해방공간에 창작된 작품들에서 습작기의 미숙함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의 시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특징은 초기시부터 나타나기 때문에, 작품이 미숙하든 능숙하든 아쉬운 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가장 첫 번째 작품인 「묘정의 노래」를 마지막 작품인 「풀」과 연계시켜 다루고는 있습니다만, 저는 과한 접근이라고 봅니다. 도리어 「공자의 생활난」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편이 생산적일 듯싶고요. 「묘정의 노래」에 대해서는 김수영이 나중에 한 말을 참고만 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때 나는 연현에게 한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고, 그것이 대체로 소위 모던한 작품들이었는데, 하필이면 「묘정의 노래」가 뽑혀서 실렸다. 이 작품은 동묘(東廟)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동대문 밖에 있는 종묘는 내가 철이 나기 전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나의 어린 시절의 성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거대한 관공(關公)의 입상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다음 회에는「공자의 생활난」을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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