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메신저
선율이 가 학원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동네 수학 학원을 가야 되는 시간이 되면 “같이 수업받는 애가 자꾸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라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던 특공 무술도 점점 아이들이 줄어들자, 밤 10시 반이 없어지고 9시 반으로 축소 운영했다. 10시 반에서 매일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9시 반으로 반이 바뀌면서 함께 운동하는 형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예전 시간이 더 좋았어. 같이 운동하는 형들한테 예전에 흑역사가 있어. 그 형들을 보면 그때 내가 잘못했던 일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괴로워. 운동 못 가겠어.” 라며 변명을 했다. 그리고 특공 무술 건물 앞에서 머뭇머뭇거렸다. “아 진짜... 총체적 난국이네.”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깊게 눌렀다. 그날 이후로 다른 과목도 “다른 애들이 나를 보고 있어. 나 그 수업 못 들을 것 같아.” 줌 수업까지 거부하게 되었다.
한편, 정신과에서 진행했던 심리 검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청소년 우울증이었다. 선율이는 불안감과 초조함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 어머니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될 것 같아요.”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정신병원 입원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율이의 증상, 그리고 자살 충동은 나날이 심각해지는데 매장은 먼 곳에 차려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혼자 두면 애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오만가지 안 좋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내 힘으로 정신적으로 극도로 쇄약 해진 선율 이를 예전처럼 되돌려 놓기에 역부족인 것 같았다.
진지하게 정신 병원 입원을 생각했다. 찰나의 순간, 선율이 가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순간이 연상되기 시작했고 입원한 상황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동시에 입원한 선율이의 마음도 마치 나 자신이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쫓겨나고 시설에 격리돼서 갇혀 지내는 선율이의 외로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게다가 버림을 받았다는 배신감이 마음의 상처를 안겨 줬다. 찰나였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면서 선율이 가 느낄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애를 두 번 죽이겠구나.” 나는 정신 병원 입원은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주위에서 뭐라고 하던지 선율 이를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편, 선율이의 정신과 진료가 있었다. “선생님 우리 선율이 가 예전에 일본에서 초등학교1학년 때 집단 폭행을 당했어요. 학교에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학교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어요. 그때 교장선생님이 학교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선율 이를 보호하라고 지시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저에게 약속해 주셨어요. 그 이후로 집단 따돌림이 없어졌고 학교에 잘 다녔거든요. 그래서 학교 측에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신과 원장님은 놀란 표정으로 ”해결 방식이 완전히 전형적인 일본식이네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나는 말을 이었다. “위클래스 선생님께서 정신 병원에 입원해야 될 것 같다고 하던데 입원이 필요한가요?”라고 물었다. 원장 선생님은 “아직 더 두고 봐야 되는데 학교에서 아이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상담 선생님은 학교 측에서 선율이 에게 만 신경을 쓰게 되면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사춘기라 차별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율이 한 테만 집중해서 보살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원장님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건 초등학교 아이들한테나 해당하는 문제이고, 중학교 정도 되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다 이해하는 나이예요. 선율이의 경우 상태가 심각한데 학교 측에서 당연히 이런 아이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위클래스 선생님과 통화를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선율이는 “죽고 싶어. 죽고 나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라며 혼잣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죽기는 왜 죽어. 엄마랑 같이 재미있게 살자.”라고 타일렀다. 선율이는 “아니, 그냥 리셋하고 싶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죽으면 더 힘들게 태어난데.”라고 말하니, “아니, 괜찮아. 그냥 지금의 내가 너무 싫어. 그냥 죽고 새로 다시 태어날 거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 무렵부터 나는 선율이 문제로 학교로 가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장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 가족들보다 내 커피를 좋아해 주는 손님들이 더 소중하다고 착각하며 지냈다. 명절에도 “손님들이 내 커피 마시기 위해 전화까지 해 주시는데 내가 그분들을 위해서 가게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지.”귀국해서 쉬는 날 없이 이날 이때까지 커피만 만들었다. 나는 커피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님이고 뭐고, 애가 죽는다고 난리인데 이 상황에서 가게가 문제냐고...” 아이를 혼자 집에 둘 수가 없으니 엄마와 교대로 아이 옆을 지켜야만 했다. 점점 출근 시간이 늦어지고 퇴근 시간이 짧아졌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공지도 올리지 못한 채 영업을 못하는 일도 생겼다.
새벽에 잠이 깼다. 선율이의 자살 소동 이후로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상생활이 뒤틀려 버렸다. 아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매 순간이 비상시국이었다. 그러니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냐고. 비몽사몽간에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중고매매 사이트 ‘캐롯‘을 열고 짝눈으로 개슴츠래 찡그리면서 올라온 글과 사진들을 훑어보고 있는 나.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신점을 봐준다는 무당집이었다. 무의식 중에 클릭했다. “서구네?” 서구는 집에서 교통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방문객들의 후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후기는 몇 백 개나 쌓여 있었다. 후기 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신점이나 한 번 보러 갈까? “ 선율이 상태도 저 모양이고 장사도 안 되고. 생각해 보니 지금 처해 있는 내 상황이 답답하긴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무당집에 찾아갈 정도로 엄청나게 절실한 건 아니었다. 무당집은 예전에 엄마를 따라서 몇 번 가 본 적은 있다. 특이하게도 장구를 치면서 ”종로로 갈까요~ 청량리로 갈까요~“ 노래를 부르면서 내담자의 상황에 맞는 노래를 부르며 신점을 봐주는 박수무당을 예전부터 알고 있어서 아주 가끔씩 자식들이 어떻게 일이 풀릴지 물어보러 찾아가시곤 했다. 엄마가 무당 아저씨의 장단을 맞춰 주니,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공수가 아주 맛깔나게 나왔다. 엄마는 노련하게 무당 아저씨에게 질문을 유도해서 온 가족의 공수를 다 받아 왔었다. 그래서 나도 한 번쯤은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서 무당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보고 싶었다. 무당에게 어떤 답이 나올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한 번 궁금해지면 못 참는 성격이었는데 딱 그 호기심이 발동해 버렸다. 이 새벽에, 그것도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일어나자마자 딱 낚여버렸다.
복채가 10만 원인데 캐롯을 보고 왔다고 하면 5만 원에 할인해 준다고 적혀 있었다. 매일 돈 없어서 쩔쩔매면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5만 원 정도면 충분히 무당집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새벽에 문자를 보내면 민폐니까 아침 9시가 넘어서 적혀 있는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차분하고 매너 좋은 목소리의 남자분이었다. “어디 사세요?” “아, 네. 저 희연구 살아요.”라고 말했다. “이미 꽉 차있으니까, 가장 빠른 날이 3일 후 13시인데 이 날 오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아, 네.”라고 대답했다. 이 날은 공지 올려서 매장 영업시간을 늦추고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역에서 내려서 올라와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더니 조용한 주택가가 나왔다. 10분 정도 걸었나 보다.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저 태양이 내 고운 얼굴에 잡티를 만들고 늙게 만들겠구먼.” 나는 최대한 그늘을 찾아 걸어갔다. 무당집은 허름한 2층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벨을 누르자마자 남자분이 바로 문을 열어주셨다. 박수무당이셨는데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되고 허름한 건물 외부에 비해 실내는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이 두 개 있었는데 한쪽 방에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무당 선생님은 “여기 의자에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라며 그 방의 테이블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몇 분 후에 무당 선생님이 들어오시고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방울과 부채를 테이블 앞에 놓으며 “ 반말을 할 수가 있는데 그건 신이 말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방울과 부채를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리고, 한 손은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방울소리를 들었고 긴장의 순간이 멎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 무당 선생님이 방울을 멈추고 부채를 내려놓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허~. 신까 물이 있어서 촉이 좋지만 우리네 같은 일을 할 팔자도 아닌데, 왜 소주, 막걸리를 붓고 향을 피우는 게 보이느냐~“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속으로 내심 놀라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무당 선생님이 나에게 ”소주 따르고 향 피우는 건 왜 해요? “라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시켜서요. “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신 붙으라고 그런 거 해요? 그거 하면 오히려 잡귀들이 들어오는데? 그래서 더 장사가 안 되는 거예요. “ 무당이 말했다. ”저야 모르죠. 엄마가 하라고 시켜서 했으니까요.. “ 그랬더니 무당이 몇 초 동안 할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 엄마는 원래 패션 디자이너였다. 요즘이야 세상이 좋아졌으니까 패션 디자이너 선생님으로 통하지만 그때는 옷 만드는 기술이 있으면 양장쟁이로 통했다. 1960년대, 엄마는 중학교 졸업 후에 바로 양장 기술을 배워서 이대 부근에서 교복 만드는 일을 했다. 근무처 사장님은 저녁때만 되면 엄마한테 종종 커피를 타서 가져다줬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밤새워 일해야 되는데 새벽에 일하다 졸면 일이 더뎌지니까 일을 조금이라도 더 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지금도 종종 그 시절 얘기를 하곤 한다.
그런 엄마가 결혼하면서 양장점을 차려서 운영했었다. 꽤 능력이 좋았다. 그 시절에 양장점 2곳을 운영하면서 제자가 15명이나 배우면서 일했었다고 말하곤 했다. 게다가 본인이 옷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결혼식 때도 직접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아빠와 결혼식을 올렸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후에 내 옷도 만들어서 입혔을 정도였다. 그때 만나서 친해진 엄마의 친구들이 지금도 50년 지기 친구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그 당시 엄마와 이모들은 새벽부터 점집과 무당집을 다녔었다고 한다. 점집에 쏟아부은 투자액이 엄청났었다고 추억을 끄집어내곤 했다. 그 당시 점집에서 들은풍월이 많다 보니 잡지식도 많아져서 산 무당이 따로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엄마는 초하루가 되면 “오늘 초하루니까 터주대감님께 술 좀 올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손님이 없는 날에는 “터주대감님께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향이라도 좀 피워봐. “라며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나는 그 집요한 잔소리에 못 이겨서 매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편, 나의 외 고모할머니는 경기도 양평에 초원사라는 절을 불사한 중창주였다. 우리 친척들은 모두 고모할머니를 노장 스님이라고 불렀다. 노장 스님은 내가 중학교 때 입적하셨다. 부모님은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와 내 바로 밑의 동생을 돌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학 때만 되면 절로 보내져서 방학 내내 절에서 생활했다. 노장 스님은 도력이 있으셔서 천기를 보시곤 하셨다고 한다. 한 날은 노장 스님이 천기를 보시더니 “선우 쟤 무당집 다닌다. 인등 불 꺼라!” 라며 호통을 치셨다고 하셨다.
당시에 우리 집은 명동의 영락교회 부근에 있는 화룡빌딩 주차장 바로 옆의 100평 규모의 2층 건물에서 중국집을 운영했었다. 그렇게 인등 불을 끄고 난 이후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계엄령으로 인해 장사를 못하게 되자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갖은 고생을 했었다. 그 이후에 노장 스님은 “그때 내가 인등 불을 끄지만 않았어도 저것들이 그리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후회하셨다고 한다.
한편, 무당 선생님은 오방기를 잡고 나에게 내밀면서 “두 번 뽑는데 우선 하나만 뽑아 보세요.” 하길래 무심코 그중에서 한 개를 뽑았다. 그랬더니 빨간색 깃발이 손에 들려있었다. “조상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보통은 두 개를 뽑으라고 하는데, 빨간색을 뽑았으니 한 번만 뽑으면 돼요.”라며 깃발을 치웠다. “당신은 대운이 들어와 있어서 앞으로 12년 동안 아주 좋아요. 그동안 좋은 일 많았잖아요?”라며 말하길래, 나는 “응?” 하며 갸우뚱했다. “돈을 못 버는데요?”라고 하니, 무당이 “그렇지 않았을 텐데요?”라고 하길래 돈은 못 벌어서 고민은 늘 하면서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어서 “아, 뭐 그렇기는 하네요.”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가게를 유지하고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만 해결이 되면 돈에 큰 욕심은 없다. 사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경제 개념도, 돈에 대한 개념도 없이 살아왔다. 나는 돈이 있으면 다 써버리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냥 소소하게 커피를 만들고 손님 응대에만 집중하고 가게 운영이나 자금 관리 등을 전부 엄마와 둘째 동생에게 맡겼다. 그래서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돈을 엄마나 동생에게 타서 쓰고 있어서 그동안 크게 돈 걱정 없이 살아왔다. 엄마랑 동생이 지금까지 내 구멍을 그렇게 메꿔줬기 때문이다. 이런 가족들 덕분에 50살이 넘어도 순수함을 유지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뭐, 더 물어볼 거 있어요? “라고 묻길래, ”저 실은 우리 애 앞으로 뭐 할지 물어보러 왔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보살님 아이는 귀신 들린 신병을 앓고 있어서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점점 더 뒤처지는 아이가 될 겁니다. “라고 말했다. ”얼마 전부터 애가 죽겠다고 하던데요? “라고 말하니 무당이 ”그거 봐요. 그렇다니까요. “라고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라고 묻자 ”방법이 있지요. 내가 그 방법을 알려 드릴 거예요. “ 라며 책상 서랍에서 부적을 꺼내서 보여 줬다. ”이 부적을 가져가서 내가 하라는 방법대로 하면 괜찮아져요. “라고 말했다.
”저 하나 더 여쭤도 돼요? “라고 묻자, ”말씀하세요. “라고 하길래, ”제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 될까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무당이 ”그 가게는 터주대감도 장사의 신도 모두 나가고 없고 빈껍데기인 죽은 가게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장사가 되겠어요? 이 부적을 사용하면 아이도 가게도 괜찮아집니다. “라고 말했다. 원래 이런 무당집에 가면 굿을 하라고 하거나, 부적을 하라고 하니까 그런 거 됐다고 엄마가 딱 잘라 얘기하고 나오곤 했었다. 나도 애당초 무당집에 가기 전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그 부적으로 아이도 살려 내고 장사도 잘 된다고 말을 들으니 솔깃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만데요? “라고 물으니 무당이 ”원래 100만 원인데 보살님에게 30만 원에 드릴게요. 마침 오늘이 길일에 시간까지 딱 들어맞아서 굉장히 좋아요. 보살님이 운이 정말 좋네요. “라고 하는 거였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얘기를 들었더니 선율이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에 ”저... 지금 3만 원 밖에 없는데요. 오늘 가지고 가고 다음에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나누어서 보내 드리면 안 될까요? “라고 물었다. 내 은행 잔고를 탈탈 털어서 단돈 3만 원이 내 전 재산이었다. ”아... 그건 안 되지요. 그냥 다음에 돈을 마련하신 다음에 연락 주세요.”라고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아,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당은 “다음 예약손님이 오실 시간이라,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 보세요.”라며 슬슬 마무리하려고 했다. “아이 아빠가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근처로 이사 왔거든요. 나중에 가족들 모두 다 같이 살자는 얘기가 오가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라고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냥 혼자 사세요. “라고 하는 거였다. ”왜요? 안 맞아요? “라고 물으니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소름 끼치잖아요. “라고 하길래, ”아아~ 네. “라고 대답했다. ‘내 촉이 맞는구나.’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1시간이 지났다.
“우리 집은 항상 예약 손님들로 꽉 차 있어요. 물이 고이면 썩죠? 물이 계속 흐르도록 해서 맑은 상태로 만들어야 돼요. 이렇게 손님이 계속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물이 계속 흐르듯이 손님도 끊기지 않고 계속 흐르도록 만들어야 돼요. 보살님 가게도 손님이 끊겨서 죽은 가게가 되어버린 상태예요. 내가 장사가 잘 되도록 처방을 알려줄 테니 다시 터주대감님과 장사의 신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돼요.”
시간이 다 되어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무당 선생님이 현관까지 배웅을 나와 주면서 ”검은색 옷이 보살님한테 좋지 않으니까 밝은 색을 입으세요. “ 라며 서비스인양 덕담을 해 주셨다. 현관에서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얼떨떨하면서도 석연치 않았다. 선율이의 일로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데, 뜨겁게 내리쬐는 초여름의 햇볕은 더욱더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지지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뜨거운 열풍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 힘이 풀리고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하철역까지 터덜터덜 역까지 가는 길이 왔을 때보다 한층 더 멀게 느껴졌다.
‘만두‘는 대수대명의 대명사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했을 때 맹획을 사로잡고 풀어주기를 7번 되풀이하는 칠종칠금은 유명한 고사다. 뜻을 이루고 귀한하던 제갈량 앞에 노수의 험한 물살이 가로막았다. 맹획은 풍습에 따라 사람 머리 49개를 바치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알려 줬다. 제갈량은 밀가루 반죽에 고기를 싸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어 제물로 바치자 물살이 잔잔해져서 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인상적이다. 나도 죽겠다는 선율 이를 살리기 위해 내 수명을 깎아내서라도 어떻게든 아이를 살리고 싶은 절실한 일상이 이어졌다.
초여름 날의 오후 2시는 매우 더웠다. 위클래스 선생님에게 선율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 오전 업무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나는 병원의 심리 상담 선생님보다도 학교의 상담선생님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한 시간 30분 동안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학생들의 사례를 나에게 들려줬다. “어머니 선율이 상태가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굉장히 심각해요.”라며 주의를 줬다. 사춘기 아이들은 살얼음판과 같다. 단단한 것 같지만 살짝만 밟아도 금이 가서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는, 마치 초겨울 강 한복판의 상태와 같다.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보건소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아! 참! 보건증 갱신해야 되는데.” 하며 공원에 설치된 탑시계를 처다 봤다. 오후 4시였다. “일부러 보건증 갱신하러 다시 오는 것도 귀찮으니까 아예 지금 하고 갈까?” 하며 보건소로 들어갔다. 접수를 마치고 안내에 따라서 지정된 번호가 쓰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보건증을 발급받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마지막으로 흉부 촬영을 해야 했다. 탈의실에 가서 상의를 벗고 촬영복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오려는 순간에 “아! 목걸이” 라며 라커에 설치된 거울에 비친 목걸이가 보였다. “엑스레이 촬영하려면 빼야 되겠네” 하며 목걸이 두 개를 뺐다. 촬영만 하고 금방 나올 거니까 라커 안에 넣어 뒀다. 그리고 나와서 흉부 사진촬영을 했다.
그 목걸이는 내가 꽤 오랫동안 차고 다녔던 애장품이었다. 일본의 M 백화점에서 특주로 만든 황소자리를 이미지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말발굽 모양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우측에 에메랄드가 포인트로 두 개 박혀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목걸이였다. 나는 항상 이 두 개를 목에 걸고 다녔다. 꾸미지 않아도 이 목걸이 두 개만 차면 귀티가 났다. 매일 돈이 없어서 쩔쩔매더라도 겉모습은 있어 보여서 자신감과 자존감이 올라가는 듯했다. 한국에 귀국하고 나서 안 차고 다니다가 그해 벚꽃 필 무렵에 불현듯 “이런 예쁜걸 장롱에만 모셔두면 의미가 없지.”라는 생각에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 목에 걸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이틀이 지났다. 선율이는 학교에 가지 않고 매일 게임만 했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 과거 자신의 흑역사가 생각난다며 머리를 거머쥐며 괴로워했다. “게임이라도 해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지.”라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그냥 내버려 뒀다. 우울증이 생긴 이후로 선율이는 내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호시탐탐 탐냈다. 그날도 내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서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금반지가 그렇게 좋아?” “응.” 선율이 가 말했다. “엄마가 옴자 목걸이 선율이 한 테 줄까?” 라며 선율이 에게 목걸이를 주려고 목에 손을 댔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히지를 않는다. “아! 목걸이!” 갑자기 멘붕이 왔다.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을 더듬어 봤다. “아! 그때 보건소에서 목걸이를 뺐었는데.” 나는 가방을 뒤져봤다. 목걸이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저녁 6시가 넘어서 보건소에 연락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9시에 보건소에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그저께 탈의실에서 목걸이 두 개를 잊어버리고 그냥 나왔는데 보관하고 계신지 알 수 있나요?”라고 문의했다. “아, 네. 잠시만요. 확인하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전화번호 좀 알려 주시겠어요?”라고 보건소 직원이 물었다. 얼마 후,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희가 다 찾아봤는데 목걸이가 없었습니다.”라고 답변을 받았다. “cctv로 확인 못하나요?”라고 물었지만 “라커룸은 cctv 설치가 되어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라는 답만 돌아왔다.
다음 날 경찰서에 분실신고를 하러 갔다. “내 신세가 이게 뭐람.” 안 좋은 일만 연일 생겨 버리는 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끼던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도 속이 쓰렸지만 아이도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내 상황이 한탄스러워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왜 우세요?” 접수를 도와주던 담당 형사가 울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우리 애가 죽는다고 해서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보건소에 보건증 만들러 갔다가 목걸이를 잃어버렸어요. 아이 일 때문에 속상하던 차였는데 아끼던 목걸이까지 잃어버려서 더 속상한 거예요.” 나는 서럽게 울었다.
담당 형사님이 “아...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저도 애들 둘 있어서 너무 잘 알아요.”라며 위로해 줬다. “아! 근데 분실하신 목걸이가 500만 원짜리예요? 아... 이거 꼭 찾을 수 있도록 할게요.” 형사가 놀라면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형사님이 말이라도 함께 속상하게 생각해 주고 위로해 주셔서 그것만으로도 많이 위로받았다. “보증서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거든요. 다시 한번 찾아볼게요.”라고 말했다. “네. 꼭 찾아서 사진 보내주세요.” 제가 관내 금은방에도 다니면서 꼭 찾을 수 있도록 해 볼게요. “ 따뜻한 형사님의 말씀이었다. 그 이후로 형사님이 몇 번이고 전화해서 ”선생님 보증서 찾으셨어요? “라고 물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다이아 반지나 다른 보증서는 다 있는데 그 목걸이 보증서만 아무리 찾아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목걸이의 존재를 점점 잊게 되었다. ”그 목걸이들이 선율 이를 대신해서 대수대명 한 것 아닐까? “라며 그 목걸이들이 없어져서 선율이 가 곧 나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품었다. ”분명히 뭔가 의미가 있을 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도 정상이 아닌데 아끼던 물건까지 없어진 것이 속상해서 매일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울고 있는 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응? 왠지 즐겁네? 혹시... 나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가?‘ 갑자기 이런 극한 상황이 즐겁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잔해진 노수의 강을 유유히 건너는 제갈량처럼 나의 무의식에서는 희열과 함께 슬픔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선율이 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엄마가 혜암사 선우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스님께서 오래전에 죽은 내 친구의 영향으로 선율이 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야, 네 친구 아라이 때문에 그렇단다. 천도재 날짜 받아왔어. 스님께 구병시식도 함께 해 달라고 했어. 그때 선율이 꼭 데리고 가야 돼.”라고 엄마가 말했다. 다음 달 7월 2일이었다. 2주나 더 남았다. “아... 그거 스님 몸도 편치 않으신데 구병시식 하셔도 괜찮겠어?” 라며 말했지만, 나야 우리 선율 이를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님이 괜찮으실까 걱정이 앞섰다. 얼마 전에도 다른 사람 구병시식 해 주시고는 많이 편찮으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애가 증세가 갈수록 심각해져서 엄마가 가게에 못 나가고 꼼짝없이 집에 달라붙어서 애를 돌봐야 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엄마와 나는 간절하게 천도재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편, 선율이는 밤새 게임만 해 댔다. 왜냐하면 트라우마가 극도로 심해서 게임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옛날에 자신의 수치심이 떠올라서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 트라우마 중에 하나가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율이 가 5학년이 되던 해가 한창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못 가던 시기였다.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니 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2학기 때부터 학교에 등교하게 되었을 무렵에 숙제를 안 해서 담임선생님에게 혼났었다고 한다. 선율이는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심해진 이후로 이 담임 선생님 얘기를 줄곧 하곤 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한테 연락드려서 선율이 에게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려 볼까?” 그러나 개인 핸드폰으로 문자 넣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학교로 전화해 봤다. “안녕하세요. 3,4년 전에 5학년이었던 강선율 학생의 담임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전화했는데요.”라고 교무과에 문의했다. “아, 네. 그 선생님은 2년 전에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시고 저희 학교에는 안 계세요.”라고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선율이 가 그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데 정작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줘야 되는지 막막했다. 선율 이를 꼭 끌어안아주면서 “사랑해”라고 말해 주는 것이 내가 선율이 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엄마 나는 공부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해.” 선율이는 학교 친구 문제로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 친구 소중하지. 그런데 친구들은 계속 바뀌어. 네가 커 가면서 환경이 바뀌면 어울리는 친구들도 바뀐다고.” 나는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선율이 에게 얘기했다. “그래도 나는 그 애들이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신경이 쓰인다고.” 선율이는 짜증스럽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율아 걔네들도 너만큼 힘들어. 자기네 하는 일들로 정신없이 지내기 때문에 네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그리고 누구나 다 실수해. 너만 실수하는 게 아니니까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라고 설득했도 선율이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 아니야.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선율이는 초조해했다. “야, 그런 걸 뭐 그렇게 신경을 쓰고 그래. 그래봤자 너만 더 피곤해진다고.” 자기 세계에 완전히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선율이 가 답답했다. “아... 몰라. 됐어. 나가. 혼자 있고 싶어.” 선율이 도 답답했는지 나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선율이 가 학교 등교를 거부하고 난 이후로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과 통화가 잦아졌다. “어머니 선율이 가 지금은 학교 등교를 거부해도 사춘기 아이들은 금방 괜찮아져서 학교에 등고하곤 하거든요. 선율이 도 나중에 학교에 다니게 될 수도 있으니 숙려제를 최대한 써 보시는 게 어떠세요?” 나는 최대한 상담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네. 해 볼게요. 부탁드립니다.” 상담 선생님은 자기 자식의 일처럼 선율이 가 최대한 학교 등교 거부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려고 최선을 다해 주셨다.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말뿐이었지만 감사의 표현을 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라서요.” 나는 상담 선생님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어서 한다지만 선생님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참 고마웠다. 선율이 일로 힘든 와중에 상담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씨가 방전된 나를 버티게 해 주는 보조 배터리처럼 느껴졌다.
그런 반면에 학교에서는 아이 일로 자주 연락이 왔다. “어머니 수행평가를 봐야 되는데 계속 학교를 나오지 않아서 하루빨리 선율이 가 학교를 나와야 될 텐데 걱정이네요. 시험을 보지 않으면 유급이 됩니다.” 애가 죽네 자네하고 있는 판국에 학교에서는 시험 이야기만 했다. 며칠 전 담임선생님과의 통화에서 “어머니 숙려제 만으로는 출석 일수가 부족하니 체험학습으로 학교 출석을 대체할 수도 있어요.” 라며 알려 주셨다.
“선율이 가 천도재를 지내러 가는 일주일을 체험 학습으로 대체하시면 어떻겠어요? “라고 하시길래, 나는 ”네. 부탁드립니다. “라고 했다. ”서류를 작성해야 되는데 학교에 와 주시겠어요? “ 그래서 나는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하던지 선율이 가 불이익을 받지 않고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선율이 일로 선생님들과 소통하면서 선행평가, 과제 제출, 시험에 대한 압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 교육 시스템이 좀 이상해. “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으로 집단에서 벗어나 보니 이질감을 느꼈다.
나는 체험학습 신청 서류를 받기 위해 학교에 찾아갔다. 아이들이 복도에서 <친구야,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있어.>라고 쓰인 청소년 우울증 자살 방지 피켓을 들며 천진난만하게 장난치면서 서로 뛰어다녔다. ‘우리 선율이 자살 소동이 터진 이후로 학교에서는 비상이 났나 보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자니 ’ 우리 선율이 도 저렇게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지냈을 텐데.‘라는 생각이 쓸쓸하게 올라왔다. 복도를 나오던 국어 선생님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담임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내가 선율이의 엄마라는 것을 알고 인사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선율이 가 1학년 끝날 무렵에 가장 많이 성장한 학생이라고 선생님들이 모두 칭찬했었거든요. 그리고, 지난번에 수행평가 너무 잘 봤었는데 이렇게 돼서 저도 속이 많이 상해요. 선율이 잘 지내고 있나요?” 이에 나는 “아! 그랬어요? 하아... 선율이 집에만 있어요. 대인기피증 때문에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요.” 선생님에게 선율이 얘기를 들으니 잊고 있었던 아쉬움이 올라왔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아이들한테 운동 못한다는 얘기를 매번 듣고 저렇게 되었어요.”라고 말하자 국어 선생님은 “우리 학교 아이들 다 착해요. 단지 사춘기라서 다들 거칠어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아, 네. 그렇겠죠.” 그것도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 애는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폭언으로 인해 학교를 못 다니고 있다. 국어 선생님은 “빨리 학교에 와서 함께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선율이 한 테 꼭 전해 주세요.”라며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어머니, 선율이랑 잘 다녀오세요.”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체험학습 신청 서류를 건네주셨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선율 이만 이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많이 하나 봐요 선생님.”라며 서류를 건네받으면서 물었다. “네. 몇몇 구에서 청소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소식들이 들어와서 저희도 아이들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라며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아, 네. 이게 겪어 보니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에요. 선생님께도 우리 선율이 일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닙니다. 어머니와 가족 분들이 선율이 일로 얼마나 힘이 드시겠어요. 아무쪼록 천도재 잘 지내시고 선율이 괜찮아졌으면 좋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저도 기도드리겠습니다.”라며 격려해 주셨다. 담임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학교를 나와서 선율 이를 보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하아~” 답답해서 계속 한숨만 나왔다.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가 가슴 정 중앙을 꽉 막고 있는 듯 심호흡을 해도 계속 막힌 듯 답답했다. 소화제를 먹어도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나... 사실은 지난번에 무당집에 갔었어.”라고 커밍아웃했다. “그래? 천도재 날짜 받았는데 거긴 뭐 하러 갔어?”라고 엄마가 물었다. “이미 예약을 해서 그냥 가봤지.”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근데 무당이 뭐라고 해?”라며 무슨 말을 듣고 왔나 궁금한 듯 물었다. “선율이 귀신병이라고 하더라고. 처방을 해 주던데 굿은 너무 돈이 많이 드니까 부적을 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근데 3만 원 밖에 없기도 했고, 천도재 날짜도 받았다고 해서 그냥 얘기 듣고만 왔지.”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런 부적은 지난번에 선우 스님한테도 받아 왔었어. 그런데 무당한테 그렇게까지 얘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부적을 안사면 네가 ‘그걸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찜찜하게 생각할 것 아니야. 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하시면서 엄마가 30만 원을 건네주셨다. 그러고는 “그 무당한테 연락해서 내일 돈 건네고 받아 가지고 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한테 돈을 받자마자 무당 선생님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부적하시겠다고요?”라고 물었다. “네.”라고 말하자 “아이는 좀 어때요?”라고 무당이 물었다. “애가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는데 자꾸 죽겠다고 말해요.”라고 말하자 “거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귀신병이라니까요.”라며 이미 우리 선율이 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30만 원 맞죠?”라며 무당에게 확인하기 위해 부적 값을 물었다. “네? 아! 아닌데... 뭐, 일단 그렇게 얘기를 들었던 것 같으니 내일 오세요.”하는 것이었다. ‘응? 뭐지?’ 순간 왜 그때 했던 말과 다른지 의구심이 들었다. 무당은 “내일 1시쯤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네.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럼 내일 오세요.”라며 통화를 마쳤다.
다음날 무당을 찾아갔다. “여기 앉아서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길래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생선 조림 냄새가 풍겼다. 막 점심 식사를 마쳤었나 보다. 이내 무당이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부적 다발을 꺼냈다. 무당집으로 향하는 동안 그 무당이 장인 정신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붓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부적 다발을 보자니 ‘이거 공장에서 대량 생산으로 막 찍어낸 것 사다가 파는 것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당은 여러 뭉치의 부적 다발을 꺼내서 책상 앞에 쭈욱 펼쳤다. 부적 뭉치들 위에는 각각 150, 100, 5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부적 다발을 쳐다봤다.
무당이 그 뭉치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고는 한 장을 꺼내며 나에게 보여 줬다. “처방을 알려 드릴 테니 내 얘기 잘 들으세요. 팥 20알 정도를 이 부적과 함께 넣은 다음에 아이 쓰고 있는 베개커버를 벗겨내세요. 그런 다음에 베개를 뜯어서 베개 솜 안에 깊숙이 집어넣으세요. 그러고 나서 뜯었던 곳을 바늘로 꿰매서 아이가 잠잘 때 베어 주세요. 아이가 군대를 갔다 오고 결혼할 때까지 집에서 함께 살 것 아니에요? 그때까지 베고 있으면 귀신들이 다 떨어져요. 단번에 좋아지지는 않고 시간이 좀 걸려요.”라고 말한 후에 나에게 부적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지난번에 저한테 30만 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부적 하나면 아이도 좋아지고 장사도 잘된다고요.” 나는 부적을 건네받고는 무당에게 물었다. 무당은 “아! 그게 아니라, 장사 부적은 50만 원이에요. 잘못 알아 들었나 보네요.”라며 변명을 했다. ’어라? 이 무당 아저씨가 그때 나한테 분명히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딴소리하고 있네?’ 나는 무당을 향해 ‘그 부적이면 아이도 괜찮아지고 장사도 잘 된다면서!!!‘ 라며 속으로 외쳤다.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깔끔하게 말하고 부적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 선율 이만 살릴 수 있다면 이깟 30만 원이 문제냐. “ 무당집을 나와서 돌아가는 도중에 왠지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2024년 6월 20일>
무당집에서 부적을 받아온 그날, 엄마랑 새 베개를 사러 갔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10년 이상은 넣어 두라고 했으니까 이참에 새 베개를 사자.”라는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베개를 뜯어서 팥과 함께 부적을 넣는 일련의 과정들이 어떠한 의식과도 같았다. 선율 이만 살릴 수 있다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부적을 베갯 속에 넣어 뒀는데도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천도재까지 일주일 남았다. 엄마는 “천도재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 좀 더 견뎌 보자고.”라는 말에,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율이 천도재 지내면 곧 좋아지겠지?” 영가 때문에 그렇다고 했으니 곧 좋아질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잠시 빌라 입구에 걸터 않아서 바깥바람을 쐐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선율이 혼자 놔두는 게 불안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선율이는 책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선율이 옆에서 게임 모니터를 보면서 선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선율: 죽을 거야.
나 : 뭐?
선율: 죽어서 새로 시작할 거야.
나 : 그런 말 하지 마.
선율: 죽으면 다 끝이야.
나 : 야.... 그러지 말라고. 게임처럼 죽으면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줄 알아?
선율: 몰라.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거야.
나 : 야! 너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 그리고 죽으면 더 힘들게 태어난데.
선율: 상관없어. 지금의 내가 정말 싫어. 죽고서 새로 태어나서 다시 시작할 거야.
나 : 선율아. 그런 말 하지 마. 엄마 너 없이 못 살아.
선율: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니까 내가 죽으면 다 없어지는 거야. 엄마도 그냥 다 없어지는 거야. 이 세상도 다 없어져. 그냥 모든 게 다 끝나는 거야.
나: 야..... 너, 누구야...
선율:.......
기가 찼다. 평소의 선율이는 이런 말을 하는 애가 아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선율이의 얼굴 표정을 봤다. 무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선율이 가 아니었다. 확실히. 전혀 다른 누군가가 선율 이를 통해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겁이 났다. 그리고,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순간 느꼈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불안감이 뒤섞여서 자아내는, 불협화음 음악을 들었을 때 느끼는 찜찜함과 불쾌감이었다.
엄마에게 눈짓하자 엄마가 바로 알아차리고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선율이 가 다 들을 테니 집 안에서 서로 선율이 에 관해 얘기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면서도 무서운 마음에 잠깐 엄마를 불러냈다. 집 앞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서 “선율이 가 아닌 것 같아. 완전 딴 사람이야. 이상해. 뭔가 진짜 이상해.” 이 말만 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엄마한테 선율이 가 말한 것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맞는 말 했네.”라고 얘기했다. “엄마, 그 말이 중학교 다니는 아이에게서 나올 말이냐고.” 나는 선율이 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아줬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천도재가 내일이었지만 기다릴 새 없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리는 절로 출발했다. 밤을 꼬박 새운 선율이 가 막 잠들어 버렸다. 엄마는 선율이 가 이제 막 잠이 들어버려서 아무리 깨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우리끼리 갔다 오자. 애 때문에 걱정되니까 오늘 일단 천도재만 지내고 다시 집에 와서 있다가 삼일째에 절에 가서 회향하고 와야지. 애가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둘째 동생 태우가 피시방에서 차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우리를 절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다. “준비 다 됐어요?” 태우가 물었다. 엄마가 “선율이 그냥 자고 있으니까 우리끼리 가자.”라고 말했다. “야, 일어나.” 태우가 차분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선율이 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태우 덕분에 아이를 태우고 출발할 수 있었다. 삼촌을 대하는 선율이의 태도가 우리한테 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이래서 집안에 남자가 있어야 되나 보다.
팔당을 건너고 있을 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목걸이 도난 신고를 접수해 주셨던 담당 형사님이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관내 보석상들 돌면서 잃어버린 목걸이를 들고 온 사람이 있는지 돌아볼 건데 혹시 보증서 찾으셨나요?” 라며 형사가 물었다. “아! 아뇨.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요. 좀 더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해서 둘러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내가 아끼던 목걸이라서 보증서만은 잘 챙겨뒀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2024년 6월 21일>
혜암사에 도착했다. 3일 동안 여기서 보낸다. 엄마는 이곳을 친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노장스님이 입적하고 후임으로 오셨던 분이 선우스님이었다. 그 이후에 초원사 바로 밑에 신도였던 보살님으로부터 땅을 시주받아 지금의 혜암사를 세웠다. 그 이후로 주지스님과 가족처럼 오래 인연을 쌓고 있다. 이번에 선율이의 일이 터졌을 때 엄마가 제일 먼저 연락드렸던 분이 선우스님이었다.
선우스님은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꽤 오래전에 죽은 내 친구 코모리가 영향을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니, 죽었으면 하늘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널 괴롭힌다니.”라며 역정을 내셨다. 절에서 이번 천도재를 도와준 보살님들에게 내가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는 소문도 이미 쫙 퍼져서 다 알고 있었다. “그 목걸이도 고모리가 잃어버리게 만든 거야.” 라며 다 꿰뚫고 있는 것 마냥 아는 척을 하셨다. 내 눈에는 안 보이니 나는 그분들이 말하는 대로 “아! 그런가?”라고 생각하다가 매번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면서 말하는 대로 “아! 그런가 보다.”라며 순수하게 믿어 왔던 것 같다.
선율이는 편안해 보였다. 선율이는 애기 때 일본에서 잠깐 한국에 왔을 때 처음 이곳에 왔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엄마와 나를 따라서 오곤 했다. 선우 스님이 워낙에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스님께서 많이 예뻐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절에 도착한 이후로 선율이는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듯했다. 나와 선율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 10시, 2시, 6시 예불에 들어가서 기도를 올렸다. 선율이 도 많이 차분해 있었다.
절에 가는 길목에 꽃을 가지런히 심어 놓으셨다. 꽃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너무 더워서 물을 줘야만 했다. “선율아, 이것 좀 밀어 보겠니?” 기도 스님께서 딸딸이에 큰 물통을 가득 담아서 선율이 에게 끌도록 했다. “오! 역시 사내대장부라 힘이 좋아! 딸딸이도 정말 잘 끌고 말이야.” 기도 스님은 선율 이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척!’ 하고 포즈를 취하자, 선율이 가 씩 웃었다. “내가 봄에 씨를 뿌려서 가꾼 꽃들이야. 얘네들 물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얘네들 말라죽지 않게 물도 좀 줘봐.” 라며 선율이 에게 시키자 선율이는 조심스럽게 정성껏 꽃에 물을 뿌렸다.
밤에는 스님께서 구병시식을 해 주셨다. 얼마 전에도 다른 신도의 구병시식을 하시고는 편찮으시다가 이제야 나으셨다. 그런 스님이 우리 선율 이를 위해서 구병시식을 해 주신다니 감사하면서도 내심 걱정도 되고 만감이 교차했다. 방의 전기 불을 다 꺼놓고 선우스님이 의식을 하시는 동안 우리들은 다 함께 반야심경을 읊었다. 스님과 공양주 보살님이 나가고 나신 후에 선율이 가 놀라서 “엄마! 지금 뭐야? 나 장기매매로 팔아 버리려고 그러는 거야?” 라며 흥분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뭐?!!” 아...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기매매라니.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것 아닌가? 선율이는 불안장애가 심해지면서 자신은 우리에게서 버림받을 것이라는 강박도 커진 듯하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우리 보물.” 라며 엄마가 선율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천도재와 구병시식까지, 2박 3일 동안 치른 큰 행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선우 스님은 “아이를 좀 쉬게 놔두고 내년쯤 학교를 보내면 어떨까?” 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건 선율이 가 정해야죠.” 엄마는 다른 아이들처럼 빨리 예전처럼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어른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이다. 엄마와는 다르게 나는 공부고 뭐고, 이 악몽 같은 상황이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랐다.
천도재를 마치고 법당 정리를 하다가 기도 스님이 나를 부르셨다. 스님은 나에게 책을 한 권을 슬며시 내어 주셨다. 스님이 오래전에 수행하면서 공부하셨던 책이었다. 가끔 절에 올 때마다 기도 스님은 나에게 책을 한 권씩 주셨다. 지난번에는 반야심경을 해설한 책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뭔지 알려고 열심히 읽어봤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읽다 말고 내팽개쳐진 채 저 구석 책 더미에 쌓인 신세가 되었다.
이 날 주신 책은 수행을 시작하면 단계별로 마구니가 보이는데 그 수행이 지속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는 수행자들의 수행서였다. “처음에 수행을 막 시작하면 저~ 벽 너머로 투사해서 반대편이 훤하게 다 보여. 그래서 우쭐해지지. 그런데 그 기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안 보이게 돼. 그걸 거쳐야 진짜 수행인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아, 네에.” 나는 마냥 신기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동경하고 있던 신비한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보살님 자기 전생 알아?” 스님이 물었다. “아뇨. 어떻게 하면 전생을 아는데요?” 스님에게 여쭸다. “수행하면 다 알게 돼.”하고 웃으시고는 가셨다. “전생이라...” 갑자기 내 전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율이의 불안감도 꺼진 줄 알았던 불씨처럼 되살아났다. “엄마, 학교 친구들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하지? 며칠 학교 안 갔더니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나 봐. 나 너무 불안해.” 선율이는 불안 증세를 보이며 초조해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일단 쉬자.”라고 아이를 진정시켰다. 나는 선율이 가 잠이든 후에 선율이의 핸드폰을 열어봤다. 패턴으로 비번이 걸려 있었다. 예전에 곁눈질로 패턴을 외웠었는데 비번을 풀고 들어갔다. 문자들을 확인해 보니 아이들이 선율 이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문자 내용이 하나 있었다. “선율아, 난데, 너 혹시 체육 선생님한테 내가 했던 말 얘기했어?” 라며 같은 반 친구가 하나가 체육시간에 자기가 한 말을 선생님에게 얘기했는지 확인하는 글이었다. “그동안 선율이 가 얘기했던 애가 얘구나.”라고 짐작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율이 핸드폰 잠깐 확인하다가 조금 신경 쓰이는 문자가 하나 있어서 보내드려요. 이 아이와 선율이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 같거든요.” 나는 일단 담임선생님에게 그 문자 내용을 캡처해서 보내드렸다. “네. 알겠습니다.”라고 담임선생님이 답을 주셨다.
단지 그것뿐이다. 나는 그 학생을 트집 잡기 위해서 캡처를 보낸 게 아니다. 선생님께서 상황을 파악해 주시고 선율이 가 아이들과 더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초등학교 때 경험했던 집단 집단 따돌림 사건과 그 학교 선생님들의 대처는 나에게 큰 교훈을 가져다줬다. “선율아. 일어나야지. 학교 가야지.” 다음날 아침이 되어 선율 이를 깨웠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 선율이는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단 가서 있어 보고 힘들면 선생님한테 말씀드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서 학교로 보냈다.
선율이 와 길을 걸을 때는 늘 2m 거리 두기였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다 그런가 보다. 멀찍이 떨어져서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심상치 않은 아이의 행동이 불안하기만 했다. 일단 멀리서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마 후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선율이 가 좀 힘든가 봐요. 데리고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 나는 학교에서 선율 이를 데리고 왔다. “천도재가 효과가 없나?” 천도재를 지냈다고 바로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선우 스님도 천도재를 마친 후에, “조금 더 지켜보자고.”라며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왠지 내 느낌에 이끌리듯 핸드폰을 열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심리 상담, 무당집, 천도재, 구병시식. 할거 다 해봤지만 선율 이를 구하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이거밖에 없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