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은 주위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자녀양육은 육아서보다 내 방식대로.
새벽에 비가 왔나 보다. 베란다 창틀에 대롱대롱 맺힌 빗방울이 나를 반긴다. 창밖 너머에서 들려오는 맑고 경쾌한 새소리는 피곤한 월요일 아침, 비타민 역할을 톡톡히 한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삼 남매를 무사히? 등교시키고 뒤돌아선 순간, 놓친 건 없는지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막내다.
"엄마, 내 실내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가득 베여있는 목소리다.
'실내화'라는 말에 내 머릿속 번역기가 돌아간다. '엄마, 죄송한데 실내화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 실내화는 어제 빨아서 화장실 옆에 세워 둔 채 그대로 있었다.
"알았어. 천천히 가고 있어. 엄마가 갖다 줄게."
왜 안 챙겨갔냐고 핀잔을 줄 새도 없이 무조건 반사가 일어난다. 얼른 외로이 남겨진 실내화를 꼬마 주인에게 보내주자. 전화를 끊고는 즉시 옷을 갈아입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달린다.
이만하면 빛의 속도다.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듯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새들의 지저귐도 오늘따라 유난하다.
짧은 순간, '내가 왜 뛰고 있지?'부터 시작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휙휙 지나간다.
'우리 막둥이가 엄마 운동하라고 실내화를 두고 갔구나. 이참에 운동이나 해야겠다.'
'아, 비 온 후라 공기가 참 상쾌하다.'
'오늘 중요한 일정은 뭐지?' 등등.
"엄마"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끊임없이 떠오르던 상념이 멈췄다. 저 앞에서 나를 먼저 발견한 막내가, 안도감
때문인지 무척이나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모, 이모" 부르며 막내 친구들이 안긴다.
"주말 잘 지냈니?"
재잘재잘 주말 지낸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 얼굴이 아침 해처럼 빛난다.
"엄마, 고맙습니다."
가방에 실내화를 넣어주니 막내가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를 한다.
"학교 잘 다녀와. 오늘도 즐겁게 보내자."
내 시야에서 아이들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뒤돌아선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본다.
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느릿느릿.
몸과 마음이 분주했던 월요일 아침이 지나간다.
느림의 미학에 빠져들 때쯤 문득,
'이런 상황에 지혜로운 엄마는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해졌다.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네가 못 챙겼으니 다시 집에 와서 챙겨가."라고 얘기했을까?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엄마의 사소한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가 줄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기만 했다. 언제 이 소소한 행복이 특별한 행복으로 바뀔지 모르기에 이 순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남편은 종종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스스로 하게끔 일일이 챙겨주지 말라고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런 도움으로 아이가 지극히 의존적이거나, 유약한 아이로 자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확신한다. 엄마의 작은 배려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랑이, 아이들을 통해 세상에 흘러갈 것을.
이미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위해 팔 걷고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눈물 나게 고맙다. 남을 도와주는 일에 진심인 아이들을 보며 나의 교육관이, 내 양육 방식과 태도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엄마가 처음이라 서툰 일도 많고, 잘하고 있는 건지 두렵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수많은 육아서에서는 엄마의 지나친 헌신이? 아이 버릇을 나쁘게 한다고 말한다. 또 어릴 때부터 자립심을 길러줘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럴듯한 미명 하에,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맨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앞으로도 나는 나름의 중용을 지키며, 내 방식대로 아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비록 '지혜로운 엄마'라는 말은 못 들을지언정.
나는 그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고,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길 바란다. 넘치는 사랑은 주위로 흘러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