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안덕면, 모슬포 여행
1.
그러니까 우리의 대화는 보통 이런 식이다.
"자기! 자기! 서귀포에 가로등이 왜 그렇게 없는지 알아?"
"여기 제주시보다 개발이 덜 됐으니 그렇겠지."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래! 서귀포에서는 감귤농사를 많이 하잖아. 밤에는 귤들이 빛을 받으면 안 좋대! 그래서 가로등이 없대! 완전 신기하지!"
"... 또 어디서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왔네. 누가 그래?"
"인스타그램에서 봤어!"
"제주도청에서 공식적으로 확인 해준 내용이야?"
"그건 아니지만! 완전 말 되잖아! 왜 일교차도 클수록 과일이 더 맛있다고 하니까 빛도 상관있겠지!"
"(한숨 쉬고 물을 따라주며) 순진한 영혼아, 냉수나 먹고 정신 차리게."
"아니 귤들이 자야 된다니까!"
프리랜서 작가인 나와 약사인 남편. 우리의 성향에 대해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키워드로 설명하자면 '슈퍼 문과 여자와 슈퍼 이과 남자'. 요즘 유행하는 좀 더 트렌디하고(?) 세분화된 성격유형 지표까지 덧붙이자면 'ENFP 여자와 INTJ 남자'가 되겠다.
환상과 이상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나와 현실과 이성의 땅에 발을 굳건히 붙이고 사는 남편.
이 아이스크림 튀김 같은 극단적 조합의 우리가 부부로 맺어진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만 모아서 만들어진 것 같은, 나와는 전혀, 전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존재가, 바로 그 다름 때문에 서로에게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 구석이 있다는 것.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늘 저런 모양새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고 가지만 하나의 목표가 생기면 2인 3각 달리기처럼 서로의 의견을 상호 보완해가면서 기묘한 스텝으로 죽이 척척 맞는다. 이번의 여행도 그렇다.
"토요일 크리스마스부터 화요일까지 병원이 쉰대. 그럼 약국도 쉴까? 육지에 여행 갈까?"
"이 시국에 무슨 비행기 타고 여행이야~ 그리고 연말이라고 어디든 사람 많고 비쌀 텐데 이불 밖은 위험해!"
"그래 그럼. 난 집에서 쉴 바엔 약국 열고 돈이나 벌래."
"그건 아니지! 크리스마스엔 가족이랑 있어야지! 그러면 우리 멀리 가진 말고 한라산을 넘어서 서귀포시로 여행 가자. 산 넘으면 여행이지~"
"겨울에 서귀포라면, 방어 먹으러 모슬포에 갈까?"
"좋아! 그럼 관광객 좀 빠지는 월, 화에 1박 2일로 떠나자!"
기름 오른 방어 회에 깔끔한 알코올 한 잔 곁들이지 않는 건 불법이니까, 말 나온 김에 술 마시고 걸어서 돌아갈 수 있게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모텔까지 후다닥 예약 완료.
방어를 먹기 위해 산을 넘는 여행이라니. 참으로 극과 극이 조화로운 우리스러운 여행이다 싶다.
2.
샘 많은 제주 영등할망이 우리 계획을 엿들은 걸까?
여행 전날 크리스마스까지 그야말로 눈이 펑펑 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넘어 거의 블리자드 크리스마스였다. 눈 맞은 야자수의 황당한 실루엣은 늘 나의 웃음 버튼이다. 열대의 식물로 태어난 야자수는 자기가 이 한반도의 남쪽 섬에서 매해 폭설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며 살게 될 줄 꿈에라도 알았을까?
부산 토박이였던 나는 처음 제주로 이사 올 때 눈이 씨가 마른 부산보다 더 남쪽나라로 왔으니 이번 생엔 눈 보기는 글렀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섬나라 제주는 습도가 높아 그런지 눈도 비도 한번 내리면 겁나게 오는 곳이었다. 덕분에 부산 촌 여자는 아직도 매해 신나게 눈 구경을 하는 중이지만, 올해는 당장 내일 한라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멈추지 않는 눈에 그야말로 똥줄이 탔다. 스노체인도 없는데 눈 쌓인 중산간 도로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면 어떡하나, 방어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동태가 될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전날 취소하면 환불은 안 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에 나는 남편한테 매달려서 줄줄이 비엔나 하소연을 쏟았다.
충동적이고 도전도, 시작도 홀랑 홀랑 잘하지만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나와 달리 완벽주의자 남편은 뭐든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일단 스타트를 끊고 나면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달리는 성격이다. 내 걱정 타령을 묵묵히 듣던 남편이 가만히 나의 손을 잡고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는 내일 죽어도 서귀포로 간다.”
아니 뭔데 이렇게 진지한데... 나는 눈 맞은 야자수처럼 황당하게 얼어붙었다. 아니 방어 먹으러 목숨까지 걸 일인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저 근거 없는 근엄함에 압도되어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래,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월요일이 밝자마자 기대 반 걱정 반 종종걸음으로 커튼을 걷었다. 날은 아직 흐렸지만 눈은 그쳤고 큰 도로들은 밤새 제설 작업을 마쳤는지 선명한 아스팔트를 드러내고 있었다. 만세!
숙소만 있을 뿐, 나머지는 그때 그때 가고 싶은 대로 가기로 한 무지성 서귀포 여행이 드디어 시작됐다.
3.
서귀포로 한 시간은 달려야 하니 그전에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가고 싶은데 무엇을 먹을까?
차를 타기 위해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내 안의 돼지 세포들이 두뇌를 풀가동한다. 우선 눈이 와서 매우 추우니 따뜻한 국물 요리가 좋겠고, 겨울과 연말에도 어울리는 메뉴면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바로 식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떠올려라 떠올려. 맛있는 음식을 생각할 때의 나는 분하게도 수능 때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식당 하나. 2년 전 겨울, 친한 동생들이 제주에 놀러 왔을 때 먹어보고 나중에 남편과 꼭 다시 같이 와야지 했던 곳!
이름부터 보양의 아우라가 끓어오르는 '한우수육만두전골'.
정갈한 이불처럼 덮인 제주산 한우 양지와 아롱사태 수육을 걷으면 그 아래 제주산 돼지고기로 직접 빚은 손만두와 각종 버섯 야채가 옹골차게 들어있는 맑은 전골이다. 고기로 시작해 고기로 끝나는 스테미너 폭발 메뉴지만 이슬처럼 청순 영롱한 육수와 수많은 채소들이 어쩐지 저칼로리 식단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의 뇌를 슬쩍 속이고 눈 가리고 아웅 마시따 하면서 많이 먹을 수 있다.
식당 이름도 메뉴 이름처럼 직관적이기 그지없다. '면 뽑는 선생 만두 빚는 아내'다. 간판 하나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식당인지 다이렉트로 알려준다. 나는 글을 쓰고 문학을 사랑하지만 음식에서 만큼은 은유를 싫어한다. 할매 손 칼국수, 경주 박가 국밥처럼 무슨 식당인지 주메뉴가 무엇인지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없는 육하원칙에 가까운 투명한 작명이 좋다.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그저 음식에만 집중하고 싶은 나의 돼지 세포의 본능이랄까. 만약 이 메뉴의 이름이 청춘 전골이나 양지바른 전골이었다면 나는 만두를 먹는 내내 이 음식에서 청춘의 의미를 찾느라 골을 싸맬... 아니 잠깐만 근데 양지바른 전골은 좀 괜찮은데? 참신했어?
육수가 끓으면 고기와 야채를 한차례 건져먹고 그 후에 만두를 떠서 먹으면 된다. 겨자소스를 살짝 찍은 수육은 입에서 살살 녹는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표정을 보니 여행의 첫 단추가 아주 잘 꿰진 것 같아 기분이 흐뭇하다. 이곳의 또 하나 좋은 점은 먹는 방법과 순서를 매뉴얼로 정리해 테이블마다 적극적으로 비치해 놓은 것인데, 덕분에 처음 이곳을 들른 사람도 종업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전골을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이런 자기 주도 학습 전골 훌륭해.
사진에는 없지만 아내의 만두 못지않게 가늘고 매끈한 선생의 면도 정말 맛있다. 만두와 고기를 다 먹고 난 후에 2분 30초만 끓여 호로록 먹으면 이보다 완벽한 마무리가 없다. 참 세상은 넓고 맛있는 건 다양하고 쿵짝 잘 맞는 부부는 많구나. 면 뽑는 선생과 만두 빚는 아내처럼, 우리처럼. 히히.
4.
명색이 서귀포 여행인데 밥은 제주시에서 먹어도 커피는 서귀포에서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달렸다. 카페는 남편이 골랐는데 역시 사실과 증거를 사랑하는 INTJ 답게 지도와 사진을 열심히 훑더니 가장 서귀포스러운 곳을 고른 것 같다. 남편이 찍은 내비게이션이 대평리라고 알려준다. 대평리라. 크고 평평한 땅이라는 뜻이겠지, 넌지시 생각하고 있는데 커브를 돌자 보란 듯 넓은 바다와 탁 트인 평지가 도로 아래 시원하게 펼쳐졌다. 배부름에 혼곤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이 풍경이 다 뭐야!
게으른 우리는 제주살이 6년 차지만 아직도 안 가본 곳이 많아서 탄성 지를 일이 많다. 특히 서귀포는 더더욱 미지의 땅이라 진짜 여행 느낌이 물씬 피어올랐다. 찾아보니 이 넓은 지대는 용암이 흘러 굳어져 만들어진 거란다. 예전에는 '용왕 난드르'라고 불렸는데, '난드르'는 '넓은 돌'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카페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대평 포구에 있었다. 주차를 하고 내리는 것도 잊은채 우리는 차 안에서 한동안 입만 벌리고 앉아있었다. 웅장한 절벽이 카페 앞에 병풍처럼 서있었다.
경계가 선명한 하늘, 바다, 절벽, 풀밭이 묘한 안정감을 주는 기분.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 같기도 하고. 정말 낭만적이네요. 이 색감, 온도, 습도...
고백하자면 저 위용 있는 절벽의 이름은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일상의 나는 멋진 걸 보면 그냥 우와! 하고 넘어가는 안일한 성격이지만 그걸 글로 남기려는 순간 작가의 직업병이 도진다. '잠깐만, 저게 과연 그냥 '절벽'일까? -> 아니지 아니지 저 정도의 존재감이라면 이름이 없을 리가 없어 -> 이름이 뭐야 분명 설화도 있을 스케일이다! -> 절대 확인해야 해!' 의 수순으로 사실 확인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이다.
예상대로 절벽은 아주 멋진 이름이 있었다. '박수기정'. 박수기정은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말로, '바가지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설화는 없냐고? 당연히 있다. 심지어 엄청 귀엽다. 용왕의 아들이 제주로 올라와서 대평리의 한 선비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3년 간의 공부를 마치고 스승에게 감사의 뜻으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노라 했더니, 선비가 물소리가 시끄러워 공부에 방해가 되니 없애달라고 했단다. 그러자 용왕의 아들이 앞으로는 박수기정을 세우고 뒤로는 군산을 세워 대평리에 자연 방음벽(?)을 세워주고 떠났다는 이야기. 정말 밤 중에 글 쓰다 찾은 박수기정 설화가 귀여워서 박수를 짝짝 쳤다.
한참 만에야 들어온 카페 ‘루시아’는 밖의 비현실적인 풍경과는 상반된 평범한 분위기였다. 커피도 무난, 녹차 롤케이크는 겉의 무스 같은 코팅이 자꾸 청포묵의 그것을 연상시켜서 혼자 웃었다. 바다와 박수기정이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 창가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바다 뷰에 집착하지 않는 너그러운 제주도민이다.
흐린 오후에 와서 몰랐지만 이 대평포구가 해질녘에 오면 그렇게 환상적인 노을 풍경을 보여준다는 일몰 맛집이라는데, 다음에는 꼭 예쁜 석양을 만나러 다시 와야지.
[안덕면, 모슬포 여행 2편 이어보기]
https://brunch.co.kr/@59f07c0ab13d4a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