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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2. 2022

[월간여행] 12월 / 방어를 찾아 산을 넘어볼까? ②

서귀포 안덕면, 모슬포 여행

[안덕면, 모슬포 여행 1편 먼저 읽기]

https://brunch.co.kr/@59f07c0ab13d4a7/1


5.

부부가 되어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매일 함께 자니 특별한 하룻밤이 필요 없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숙박업소의 퀄리티에 너무 혈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만 그럴 수 있다) 커플일 때야 여행을 떠나 함께 잘 수 있는 하룻밤이 너무 각별하고 또 멋진 추억을 남기는데 근사한 숙소는 필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떤 숙소도 편안한 우리 집 안방을 따라올 곳이 없고, 서로 볼 것 다 본(?) 사이에 그저 따뜻한 물 콸콸 잘 나오고 깨끗하고 조용하게 잘 수만 있으면 장땡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우리가 고른 숙소는 매우 훌륭했는데, 1박에 단돈 6만 5천 원! 거기다 해수 온천수가 나오는 대형 욕조까지 구비돼 있는 욕실이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나머지 여건은 저렴한 모텔 그 자체지만 댓츠 노 프라블럼!


오후 5시쯤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커다란 종이가 눈에 띈다.

<숙박객분들의 편안한 숙면을 위해 스파 이용은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부탁드립니다.>

해수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런 에티켓이 생긴 모양이다. 어 잠시만 근데 그렇다면, 여기서 또 나의 돼지 세포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린다. 지금 전골에 커피, 케이크까지 배부르게 먹고 들어온 터라 조금 천천히 저녁을 먹어야 신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저녁 7시 30분쯤 나가서 이래저래 밥 먹고 9시가 넘어 들어오면 스파 시간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게 된다. 거기에 욕조 물 받고 씻는 시간까지 빼면... 진짜 소고기 샤부샤부도 아니고 물에 몸만 적셨다가 바로 빼게 생겼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스파를 즐길 족속인가? 네버 아니다! 그렇다면 스파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찬스는...


"자기! 우리 지금 들어가자마자 스파부터 해야 된다!!!"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방부터 던지고 물을 받으면서 셀프 칭찬을 한다. 그래 지금이 딱이야. 추위도 녹이고, 마음도 여유롭고, 소화도 잘 돼서 저녁도 더 맛있을 거야~ 아무리 6만 5천 원짜리 갓성비 숙소라지만 해수스파 모텔에서 해수스파를 못하고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천하의 집순이 게으름뱅이인 나도 돈과 음식 앞에서는 기꺼이 본능을 버리고 부지런을 떨게 된다.


뜨끈한 물에 몸을 누이니 천국이 여기구나. 집에 있는 욕조가 싱글 사이즈라면 이 욕조는 퀸사이즈는 될 것 같다. 내가 국밥 원샷한 아저씨 감탄사를 연발하자 남편이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우니 몸집 작은 우리 호빗 부부에게 딱 맞다. 근데 이거 정말 해수일까? 슬쩍 혀로 입술을 핥아보니 짭짤하다. 오오 진짜야 진짜! 남편과 나는 신이 나서 킥킥거린다.


6.

저녁 7시 30분. 우리는 씻은 조약돌처럼 반들반들한 얼굴이 되어서 비장하게 모텔을 나섰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방어를 영접할 시간이다. 그전에 우리가 왜 방어를 먹으러 이 먼 모슬포까지 왔는지 궁금한 이가 있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제주 남서쪽 끝에 위치한 모슬포. 겨울이 되어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오면 방어떼가 이 모슬포와 마라도 사이 바다에 우르르 모여든다.

바람이 세고 바다가 거칠다고 ‘못살포’라 불렸다는 모슬포지만 배 뜨기 힘든 바다가 물고기들에게는 얼마나 좋았을까. 암초 사이에 몰려다니는 싱싱한 자리돔을 잔뜩 잡아먹고 뱃살이 두둑해진 겨울 방어는 쫄깃함과 고소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름에도 방어가 잡히지만 수온이 높을 때의 방어는 살에 탄력이 없어 거의 먹지 않는단다. 이쯤되면 제주에 살면서 겨울에 방어 최대 주산지인 모슬포에 안 오는 건 유죄지. 자, 그럼 TMI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어디로 가볼까? 제주도민이라고 제주도의 숨겨진 명소와 로컬들만 가는 힙플레이스를 전부 꿰고 있는 건 아니다. 익숙한 살던 동네를 떠나면 물정 어두운 건 다 똑같다. (토박이도 아닌 우리는 더더욱!) 심지어 여기는 산 넘어온 서귀포인걸. 초보 여행객들이 다 그렇듯이 검색으로 적절한 가격에 구성이 괜찮고 리뷰가 많은 곳을 추리다 보니 두 군데로 좁혀졌다. 미영이네와 만선 식당. 마침 두 식당이 나란히 있다고 하니 도착해서 분위기를 보고 고르기로 했다.


세상에 서귀포 여행객이 다 여기서 저녁 먹나?

우리처럼 초록검색창에 기대 방어를 먹으러 온 관광객들로 식당 앞은 시장통이다.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미영이네의 입구가 더 북적거리는 것 같아서 만선 식당에 들어가 예약자 명단을 쓰고 나왔다. 자리가 나면 전화를 준단다. 하릴없이 가게 근처를 돌아다니기로 한다. 다행히(?) 바로 앞에 포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정박한 배들을 구경했다.

배마다 사람 머리만한 조명들이 주렁주렁하다. 여름밤에 제주바다에 별처럼 떠다니는 것이 이 조명 배들이다. 조명이 이리 크니 육지에서도 수평선이 환할 정도로 눈부시다. 가끔 그 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다 건너 불야성의 어떤 신비로운 도시가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여름에는 갈치를 잡으려고 그렇게 뜬다는데 지금 같은 겨울에는 무엇을 잡을까? 조르르 얌전히 묶여있는 배들을 보니 낮에 열심히 밭 갈고 밤에 외양간에서 쉬고 있는 우직한 소들 같기도 하고...

"......"


어쩐지 방어회의 자태가 한밤 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주칠 것 같은 익숙한 느낌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렇다. 이것은 고등어 회다.


"메뉴는 뭘로 하시겠어요?"

"대방어 2인에 소맥이요!"

"어머~ 근데 지금 방어는 없어요~ 다 나갔네. 호호호"


그래. 맞다. 아까 예약할 때 미리 묻지 않은 우리 잘못도 분명히 있다. 그치만 사장님. 이 시즌에, 이 많은 사람들이, 고등어회를 먹으러 왔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으시는 건 아니시죠? 흑흑.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것이 장사의 기술이라더니. 가방도 코트도 다 내려놓고 따뜻한 공기에 음식 냄새까지 맡고 나니 더 이상은 일어설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은 사장님의 계획대로. 우리는 전투의지를 잃고 순순히 항복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그렇게 고등어회를 먹고 있구나. 그래 삶이란 이런 것이지. 방어 없는 방어 맛집에서 다 함께 고등어를 먹는 우리네 인생.


다행히 긍정적인 엔프피인 나는 '고등어도 맛있을 거야!' 금세 다시 신이 나고, 현실주의자 인티제 남편은 '없다는데 어쩔 거야, 받아 들여야지.' 뒤끝 없이 수긍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지만, 함께 불만 없이 기분이 나아졌다. 묘하게 잘 맞는 궁합이 이번에도 빛을 발해서 다행이다.

회가 나오자 카메라를 드는 남편. 얼마 전 갑자기 브이로그를 찍어서 유튜버가 되겠다고 선언하더니 비싼 카메라까지 사서는 이번 여행 내내 열심히 촬영하고 있다. 목에 마이크를 차고 열정적으로 고등어 회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쏘우에게 잡혀서 목에 시한폭탄이 걸린 인질 같은 게 자꾸 떠오르는데 잠자코 있기로 한다. 하여튼 뭐든 열심히 하는 하는 남편이 귀엽다. 이것도 콩깍지인가?


고등어 회를 시키면 묵은지가 들어간 칼칼한 고등어찌개와 참기름 간이 된 밥, 구운 김과 각종 반찬들, 거기에 무를 넣고 얼큰하게 조린 고등어조림까지 세트로 나온다. 꿩 대신 닭이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차려진 한 상에 마음이 들떴다.

새콤한 간장 양파에 고등어 회 한 점을 함께 먹으면 기름지고 고소한 고등어의 맛이 입 안에서 사르르 퍼진다. 회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신선한 상태라 비린내는 없다. 김에다 밥 한 술을 올리고 회를 싸서 먹으면 담백한 감칠맛에 박수가 절로 난다. 그래 방어면 어떻고 고등어면 어떠리. 맛있고 즐거우면 됐지! 즉흥적으로 떠나왔지만 멋진 절벽도 보고 스파도 하고 고등어 회도 먹은 오늘. 밤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흐뭇하다.


7.

오전 11시. 체크아웃을 하고 일단 차에 탔다. 제주도민이 되고 나서 생긴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는데, 할 일이 없을 땐 그냥 정처 없이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린다. 보통 어느 쪽으로 가든 10여 분이면 바다가 나오고 그러면 그 길을 따라 해안로를 구경하며 논다. 그렇게 우연히 작고 예쁜 유채꽃 밭을 발견하기도 하고, 도로를 걷는 말을 만나기도 하고, 근사한 카페가 보이면 커피도 한 잔 하는 식이다. 섬 전체가 관광지다 보니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모르는 곳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녀도 볼거리가 있다. 오늘도 그럴 셈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남편 없이 서귀포에 온 적이 있다. 친한 언니의 사진 촬영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언니는 제주에서 피크닉 용품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제주 토박이라 계절별로 피크닉을 하기 좋은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종종 언니와 데이트 겸 홍보사진도 건질 겸 소풍을 떠났더랬지. 그때 언니의 추천으로 서귀포까지 와서 촬영했던 곳이 어디였더라. 해안 도로가 예뻤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휴대폰 사진첩이다. 아이폰 앨범이 그날 찍은 사진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계 해변! 그래! 자기 우리 사계 해변 근처로 드라이브하자!"


처음 사계 해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참 예쁘다고 감탄했었다. 모래 '사'와 시내 '계'. 모래가 시냇물처럼 사르르 사르르 날리는 해변을 상상하니 너무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시내 '계'는 마을에 흐르는 하천과 관련된 단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는 나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사계 해변은 모래사장이 꽤 길고 넓게 이어져 있지만 해변 뒤로 화산지형인 화순층이 있어서 해수욕보다는 눈으로 즐기기에 더 아름다운 곳이다.


제주의 어느 바다든 다 아름답지만 화순층이 눈에 선명히 보이는 사계 해변 근처 해안도로는 이국적인 느낌이 들어서 특별한 기분이었다. 제주도엔 귀한 공룡 발자국도 이곳에서 발견됐단다. 이런 풍경에 뛰어들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지. 해변 근처에 차를 대고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왼쪽으로는 산방산,  바다 위로는 형제섬, 오른쪽으로는 송악산이 보이는 이 완벽한 파노라마뷰라니. 홈쇼핑도 한수 접을 알찬 구성이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이렇게 만들기 힘들겠다. 정말 이 풍경은 실제로 봐야만 그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런 뷰라면 제주시는 발 디딜 틈도 없이 3보1카페가 들어설 것 같은데 이곳은 오히려 한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뭐가 별로 없었다. 이것이 서귀포의 매력인가. 아직은 좀 더 날 것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제주의 느낌.


그냥 산책만 하고 떠나기엔 이 풍경이 아까우니 조금 이른 점심을 이곳에서 먹을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번듯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판의 이름이 기묘하다. '트로피칼 하이드어웨이'. 열대의 은신처라니... 앞서 밝혔듯 나는 식당은 직관적인 이름을 좋아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이름만 들어서는 어느 미국 인디영화에 등장하는 괴짜 주인공의 레스토랑 이름 같은 느낌인데. 그러나 바로 아래 적힌 반가운 글씨가 고민을 날려준다.

'브런치 레스토랑'

옳다구나! 우리는 곧바로 직진했다. 식당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2층부터는 숙박 시설로 쓰이는 듯했다. 이 완벽한 장소에 식당을 낀 숙박시설이라니. 아주 센스가 좋은 걸. 다음엔 이곳에서 하루 자도 좋을 것 같다. 평일 낮이라 손님이 거의 없어서 근사한 창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직 메뉴판을 넘기기도 전인데 남편은 메뉴를 정했다.


"오 여기 버거 있나 보네 그럼 난 버거!"


이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신혼여행으로 떠난 하와이 한 달 살기 때 한 달 내내 햄버거만 먹은 성골 버거인 되시겠다. 햄버거가 있다면 다른 메뉴는 보지도 않는 남편. 저 지독한 외사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아메리카노와 브런치 세트를 주문했다.

"햄버거를 팔면서 콜라가 없다니... 콜라가 없다니..."


남편의 망연자실한 독백을 들으며 속으로 웃는다. 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시킨 청귤 에이드는 새콤달콤해서 맛이 괜찮았다. 옛말에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는데 풍경도 반찬이 되는 것 같다. 에그 스크램블과 소시지 같은 무난한 메뉴들도 눈앞의 멋진 경치를 보면서 먹으니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버거도 패티가 두껍고 육즙이 많아서 맛있었다.


여행의 가장 완벽한 마무리는 무엇일까. 훌륭한 조식? 흥겨운 쇼핑? 아니다.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외치는 이 한 마디다.


"자, 이제 집에 가자!"


8.

이번 여행을 글로 남겨보면 어떻겠냐는 남편의 제안에 귀찮고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투덜거렸지만 덕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우리의 여행을 야금야금 곱씹으며 새롭게 느끼는 제주의 뒷맛이 아주 쏠쏠하다. 눈길을 가슴 졸이며 운전하고, 방어 대신 고등어를 먹고, 귤들이 밤에 잠을 자는지 안 자는지는 결국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디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인생인가. 중요한 건 이 제멋대로의 서귀포 여행이 정말 즐거웠고, 다시 생각이 날 것 같다는 것. 그렇다면 기생충의 송강호처럼, 무계획을 계획으로 정하면 어떨까?


"아예 앞으로 매달 이렇게 여행을 다녀볼까?"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역시 충동 빼면 시체인 엔프피 인간. 윤종신이 월간 윤종신을 낸다면 우리는 월간 여행기를 내는 거야. 나는 글을 쓰고 자기는 영상을 찍고. 어때? 남편은 유명 유튜버의 길이 멀지 않았다고 김칫국을 마시며 환호한다. 정말이지 하나가 튀어 오르면 다른 하나가 말리기는커녕 더 높게 튀어 오르는 이 환장의 호흡. 참 좋다. 그리고 더불어 뭔가 정해지면 일단 타이틀부터 짜고 보는 나의 작가병이 또 재발했다.


"그러면 우리 여행의 이름은 뭘로 하지. 음... 주말마다 제주를 넘나들 거니까, 주제넘은 여행 어때!"

"올, 좋은데?"


허술한 계획과 왕성한 호기심만 들고 떠나볼 월간 여행. 계획대로 되든 되지 않든, 그 자체로 재밌을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이 기대되는 걸?


"자기! 우리 다음 달에는 어디 갈까?"


<초보 유튜버 남편의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vcedn7caO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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