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누구나 아는 떨림

무대는 피아노 앞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by 비플렛 쌤

떨린다는 건.

마치 온 세상이 지진처럼 흔들리는 일.

그 순간 내 근육은 통제불능 상태로 달리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나를 어디론가 몰아세운다.


나는 원래 조용했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피아노라니.

다행히도 그 시절 시골에서는 그랜드 피아노를 보기 힘들었다.

내 키보다 큰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으면, 그 커다란 몸체가 나를 가려주는 방패 같았다.

피아노 뒤에 숨어 손가락을 움직이는 건 무섭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까진, 정말 무섭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암기력이 폭발했다.

시험 성적이 오르는 재미에 푹 빠져, 피아노를 내려놓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부임한 음악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콩쿨에 한번 나가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부하겠다고 피아노를 내려놓은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결국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고, 그렇게 출전한 무대가 경상남도 학생경연대회, 이른바 도대회였다.


예선에서는 *“떨어지면 창피하겠다”*는 생각에 조금 떨렸지만, 본선에서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어차피 피아노는 곧 접고 공부에 전념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실수 하나 없이 연주를 끝냈고, 1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 순간, 내 진로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주말마다 왕복 여덟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고, 한 시간 레슨을 받았다. 부모님은 피아노를 전공하던 동생의 레슨까지 잠시 멈추고 내 입시에 집중하셨다. 동생의 앞날까지 함께 짊어진 듯한 책임감이 내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예고를 다닌 것도 아니었고, 대학 실기시험이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나는 어느 여름, 생생한 꿈을 꾸었다.


시험장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앞 학생이 연주를 잘 이어가다가 어느 부분에서 크게 틀렸고, 울며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곧 내 차례가 되었다.


심장이 폭발하듯 뛰었다.

손가락은 제멋대로 건반 위를 헤맸고, 톤은 흐트러지고 템포는 붕괴했다.

“망했다…”는 절망이 엄습하는 순간, 눈을 떴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건 그냥 꿈이 아니었다. 실전과 다름없는 경험이었다.

그 새벽, 나는 본능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시험곡을 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꿈처럼 엉망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연습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멘탈을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이후로도 세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 매번 깨어난 뒤 건반을 두드리며 조금씩 적응해 갔다. 덕분일까, 대학 입시는 무난히 끝났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방 학생에게 서울 생활은 버거웠다. 회색빛 도시, 지하철의 빽빽한 인파, 낯선 친구들 사이에서 과대표까지 맡게 되니 금세 지쳐갔다. 드러나기를 싫어했지만, 원치 않게 자꾸 앞에 서야 했다. 향수병은 깊어졌고, 연습은 대충 흉내만 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대학 첫 실기시험.

시험장에 들어서는데 조교언니가 쇼핑백을 내 손에 쥐여주며 심사하는 교수님께 전해달라고 했다.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마음이 산란해진 채 피아노앞에 앉았고, 도무지 집중이 안되어 결국 연주가 끊기고 막혔다. 겨우겨우 이어갔지만, 그날 이후 ‘막힘’에 대한 트라우마가 시작됐다.


그때 알았다.

떨린다는 건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온 세상이 무너지는 체험이라는 걸.

독주회를 앞둔 동료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독주회 날만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 세계에 들어서 있었다.


좋은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겐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먼저였다.

길고 고되기도 시간을 지나 여전히 무대에 설때,

이제는 안다.

그 떨림 속에서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때로는 그 떨림마저 즐길 수 있다는 걸.


떨림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꿈속의 실패, 실전의 긴장, 오래 붙잡아 두었던 트라우마까지…

결국은 나를 단단하게 세운 과정이었다.


떨림은 실패의 전조가 아니다.

삶이 나를 앞으로 밀어 올리는 진동이다.


나는 올해 초 교육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평생교육, 인간의 심리, 음악 인문학, 그리고 코칭까지…

새로운 배움 앞에서 다시 학생이 되는 경험을 거듭하며, 여전히 성장의 길 위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무대는 더 이상 피아노 앞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나는 피아노와 다른 분야를 함께 이어가며, 때로는 새로운 배움의 무대에 선다.

그러다 가끔은 피아노 연주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그 특유의 긴장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첫 발표,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회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전하는 고백.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무대 위에 서며 떨린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순하다.

떨림을 밀어내기보다, 그 떨림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


나는 또다시, 새로운 떨림과 함께 길을 내어 걸어갈 것이다.

떨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성장의 다른 이름이니까.

가족과 드라이브 중 우연히 발견한 한적하고 눈부신 바다

작가의 이전글아무도 안 궁금한, 오래전 대학 실기시험 현장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