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영수학원에서 초등. 중등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좋았다. 아이들이 학교나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았고 열심히 문제를 푸느라 고개를 푹 숙인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사랑스러웠다.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특히 학원에는 실장님이 계셨는데, 부드럽고 예의 있게 할 말은 하시는 분이었다. 실장님이 수업 외의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신 덕에 선생님들은 자신의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학원에는 투자를 하는 회장님과, 회장이 고용한 원장이 있었다. 회장님은 학원 운영을 잘해서 수익을 크게 낼 원장을 찾았다. 원장이 한 한기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하면 원장은 교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원장님이 왔다. 새 원장은 새 판을 짜야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본인의 기준에 따라 몇몇 선생님들에게 해고 통지를 했다. 나는 해고 통지 대신 앞으로 초등부 실장이 되어 초등부를 잘 끌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내 수업만 하고 싶지, 실장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의지하던 실장님이 안 계시면 학원 생활도 힘들어질 것 같았다. 학원 내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참 피곤했다.
그러던 와중 부모님이 유럽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리곤 나 보고도 유럽 여행을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대학생 때 내가 모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할 때는 너무 위험하다며 절대 못 가게 말리셨던 분들이셨다. 그런데 부모님이 실제로 유럽에 다녀와 보니 내가 여행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셨던 거다. 학원 분위기도 피곤하지, 부모님도 유럽 여행을 권하시지, 이때다 싶어서 정말 직장을 그만두었다.
세계지도 한 장을 준비했다. 유랑이라는 유럽 여행 카페에도 가입했고, 가이드북도 두 권 샀다. 가능하다면 주요 도시는 다 가보고 싶었지만, 나는 체력이 그리 좋지도 않고, 에너지가 많은 편도 아니라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여러 고민 끝에 이탈리아에서 1주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1주일, 프랑스와 두바이에서 1주일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로마. 아씨시. 피렌체. 파도바. 베네치아, 빈, 잘츠부르크, 그린델발트, 융프라우, 베른, 파리, 두바이를 가겠다고 정했다. 유랑에서 한인 민박 정보를 보고 예약을 하고, 여행사에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했다.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사람 같았다. 대학에서 전공도 아버지의 뜻대로 정했고, 생활비도 부모님이 주셨고, 살고 있던 아파트도 부모님이 마련해 주셨고, 아르바이트도 부모님의 뜻대로 과외만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도 나는 날마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뭔가를 결정할 때 부모님의 의견을 물었다.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 없이 거의 서른 해를 살았다. 그런데 나 혼자 처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참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행은 정말 좋았다. 혼자서 낯선 곳에 가서 잘 지내고 왔다는 것이 뿌듯했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길에서 만나는 외국인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구입하고 친구들을 사귀어 함께 식사를 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갔다. 로마의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을 가고 오페라도 보러 갔다.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나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에서 모차르트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근무했다는 베른의 특허청도 가보았다. 혼자 떠난 여행의 큰 수확 중 하나는 자신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뭔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말이다.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강도, 살인, 절도 등등) 하지만 여행을 떠나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지도 않은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덕에 길을 찾기도 하고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장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나에게 도움을 준 어떤 분은 내가 사례를 하려고 하자 자신 말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여행자를 도와주라고 했다. 나는 삼십 년 평생을 작은 경계 안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 잘못을 하지 않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며 살았다. 그런데 여행은 스스로의 부족함만 바라보던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주었다. 좀 더 너그럽고 친절한 세상을 보여주었고 나도 좀 더 내 경계를 넓히고 친절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다녀오자 사람들은 여행지 중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나는 이탈리아 아씨시가 가장 좋았다. 아씨시는 움브리아주, 페루자현에 있는 곳으로 로마와 피렌체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다. 1000년이 된 고딕 양식의 건물들, 중세의 건물들이 아씨시를 이루고 있다. 아씨시는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유명하다. 부잣집 아들 딸이었던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버리고 청빈의 삶을 살면서 가난한 이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도우며 지냈다. 그래서 아씨시에는 프란체스코와 클라라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그들의 정신이 깃든 곳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씨시는 네가 가본 어느 곳보다도 평화로웠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Pace Bene (평화와 善)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씨시 곳곳에 pace Bene가 그려진 기념품을 판다.
늦은 오후 로마에서 아씨시로 넘어온 나는 프란체스코 성당과 멀지 않은 수녀원 도미토리에 묵었다. 수녀원에는 침대와 이불 등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갈하고 기분 좋은 여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녀님이 만들어주신 미네스트로네라는 야채수프를 먹고 저녁 산책을 다녀왔다. 다른 여행지에서는 해지고 나서는 왠지 위험할 것 같아 숙소에서 잘 나오지 않았지만 아씨시는 평화롭고 안전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전 테라스에서 아씨시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올리브 밭과 중세의 건물들위로 해가 떠오르는데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마치 그날의 태양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태양의 찬가(영어로 Brother Son Sister Moon)라는 노래가 저절로 생각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란체스코가 태양의 찬가를 지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하고 아씨시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성 클라라 성당, 성
스테파노 성당, 성 프란체스코 피꼴리노, 성루피노 성당... 그리고 아씨시의 중심부와는 좀 떨어져 있지만 프란체스코가 암시를 받았다는 성 다미아노까지 돌아보았다. 올리브나무와 측백나무가 심긴 길을 찬찬히 걸으니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 걷다 보니 좀 힘들어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어떤 흰머리의 서양 할머니께서 “See you again in heaven.”이라고 인사하셨다. 아씨시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곳인가 보다. 모두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 그렇게 아씨시는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가 되었다.
결혼준비를 하면서 신혼여행을 어디를 갈지 결정할 때였다. 남편은 아씨시를 가보지 않았다기에 우리는 아씨시에 갔다. 절벽 위의 한 호텔에 방을 잡고,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며 아씨시의 저녁길을 남편과 같이 걸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저녁길. 그 분위기를 인생을 함께할 사람과 함께 느끼니 행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테라스의 경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숙소 아래쪽으로 낮은 구름이 가득 끼어 구름바다를 보는 듯했다. 해가 떠오르면서 구름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구름 사이사이에 낮은 지대 건물의 꼭대기만 보였다. 이 경치는 아씨시가 우리 부부에게 주는 선물로 느껴져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