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은 Sep 26. 2024

브로치

                                                          브로치

                                                                                                                           이도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창가에 스밀 때 아내는 고개를 수그리고 강력 접착제를 쥐어짜고 있었다. 저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아내는 얇고 투명한 비닐장갑을 꼈지만 자칫하면 강력 접착제에 손가락이 붙어버릴 수 있으므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딘가 완전히 몰입된 저런 광경을 맞닥뜨리면 또 다른 실루엣에 젖어 들곤 했다. 가끔 아내의 그런 모습 위로 겹치는 환영처럼 떠오르는 얼굴. 어머니의 옆모습이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수제로 만든 브로치의 꽃잎들을 조몰락거릴 때도 함부로 말을 시키면 화를 냈다. 말을 시키면 꽃잎들이 비뚤어져서 망가진다고 제발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어떤 날은 탁자 위에 화려한 꽃잎들이 수두룩했다. 아마도 내가 없는 사이 만들어서 말리고 있었겠지. 꽃잎들을 만들고 다음엔 초록 이파리들이 크기가 각기 다른 모양새로 탁자 위에 깔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클로버가 소복이 핀 들판을 연상케 했다. 아내의 솜씨는 날로 향상되어갔다. 저 꽃잎을 사람의 손가락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내는 섬세했다. 가끔은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십 년 넘도록 근무했던 학교에서 명퇴했다. 막상 학교를 관두고 나니 딱히 할 일이 마땅찮았다. 처음 몇 달은 계속 잠만 잤다. 그런 날이 길어지자 아내의 잔소리가 날로 심해졌다. 어떤 날은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눈에 보이는 꽃들, 흙담 등을 닥치는 대로 찍었다.      

아내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매일 뭔가 골똘한 생각으로 숨 가쁜 나날을 살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브로치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아내의 블로그는 이 천명을 훌쩍 넘어선 회원들이 동아리처럼 소통을 했다.

주문이 들어온 브로치를 포장하고 택배를 보내는 과정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아내였다. 장사는 제법 잘 되고 있었다. 일이 밀리는 날에는 택배 포장을 조금 도와주려고 했지만, 아내는 내가 한 포장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재포장해야 한다고 오히려 성가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큰둥해져서 대문을 빠져나와 집 앞의 공원 벤치에 앉아있곤 했다. 어떤 날은 날아가는 공중의 새들을 바라보거나 가끔은 떨어지는 잎들을 줍기도 했다.

이 모든 자잘한 일상의 조각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답습되어 온 듯한 착각이 자꾸 들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내 몸 속속들이 뿌리가 박힌 기억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늘 뭔가가 헛헛해서 뚱한 표정을 짓고 밖을 배회했던 아버지처럼. 가끔은 생뚱맞게도 내 몸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도 브로치를 참 좋아했었다. 가까운 시장에 갈 때도 당신의 왼편 가슴에 브로치를 달아야 외출했다. 다른 곳에 사치를 부린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허름한 옷에도 브로치를 달았다. 장날에도 어머니가 가끔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사 온 것은 호떡도 아니고 꽈배기도 아닌 바로 작은 브로치였다. 그렇게 사 모은 브로치가 어머니 서랍에 하나씩 둘씩 모여갔다.

어떤 브로치는 아예 옷에 달아 놓은 채 옷장에 걸려 있었다. 가령 어머니가 자주 입는 스웨터라든가 아니면 코트 깃에 달려 있기도 했다. 어머니의 브로치는 색깔이 다양했다. 주홍빛이나 호박색 보석으로 만든 동그란 모양도 있었고 옥색 빛이 감도는 싱그러운 이파리 모양도 있었다. 주로 당신이 그날 입는 옷 색깔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을 달거나 아니면 그 정반대의 브로치를 했다.

그렇게 멋을 부리느라 꾸물거리기라도 하는 날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충 나서지 않는 어머니를 도무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거울을 자주 보는 것조차 못마땅해서 혀를 끌끌 찼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쓸데없는 것을 달고 다니냐는 것이었다. 약간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 말다툼하는 날에도 계속 어머니 브로치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그냥 옷만 남부끄럽지 않게 챙겨 입고 가면 되지 뭐 하러 그걸 굳이 다냐고 나무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한 번도 지지 않고 오히려 달았던 브로치를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았다. 어머니는 대체로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브로치를 다는 것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작은 사치가 내게는 오랜 수수께끼로 남았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뒤,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거미줄처럼 엉켰던 생각들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외갓집 문중 산에 어머니를 안치했다. 꽤 먼 거리였다. 내가 6학년 여름 방학 때 외삼촌 결혼식에 가고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때 장조카 결혼식을 마치고 혼자 남은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왔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다시 이곳에 오니 기분이 묘했다. 

양양에 있던 고모네 집에 들렀던 기억. 둔전리였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흙집이 몇 채 서 있었던 곳. 거기서 할머니와 감자옹심이를 먹었다. 돌배나무 뒤에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던 고모의 얼굴도 아련할 뿐. 아득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어린 날들의 기억이 스르르 되살아오다니. 기억이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봉고에 탄 우리 형제 중에서 그 누구도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자거나 멀거니 창밖의 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들은 너무 오랜만에 가는 길이었다. 홍천 생곡리 선산이 있는 오지 산골까지 가려면 족히 한나절은 달려야 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해져서 다시 그곳을 가게 될 줄은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어린 시절의 그때와는 정반대의 느낌으로 전혀 설레지 않았다. 슬픔이 목 안을 자꾸 껄끄럽게 갉아댔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 중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큰 누이가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장의차는 외갓집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갔다. 도로가 끊긴 지점에서 십여 분을 다 같이 걸었다. 거기서부터 누구랄 것도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던 들길이며 할아버지의 음성이며 어렴풋이 떠오르는 따스한 기억 때문에 속으로 울었다. 그런데 누이들은 아예 수건 한 장을 입에다 대고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그 울음 속에는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뼈에 사무쳐 토해내는 처절한 절규였다. 누이들의 울음소리가 내 뼛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서럽게 들렸다.          

어머니를 묻은 묘 앞에서 자식들이 빙 둘러앉았다. 두런두런 친척 어른들이 지난 얘기들을 앞뒤 꽁지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셨다. 서로 맞장구를 치는 얘기도 있었고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나는 담담하게 듣기만 했다. 그런데 그 얘기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얘기가 있었다.     

삼촌이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술술 한 얘기였다. 큰외삼촌에 관한 얘기였는데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강원 최전방 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했다가 지병으로 세상을 떴고 둘째 외삼촌은 예천군 읍사무소 9급 지방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예천군 농정과 팀장으로 근무했다고 자랑삼아 말했지만, 여전히 내겐 낯선 존재였다.

그다음 얘기가 내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원래는 외할아버지가 ‘성’이 없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노비에게는 성과 이름이 없었던 시대였다고. 막내 삼촌은 내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를 뱉고선 쓸쓸하게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사람에게 성과 이름이 없었던 시대라니. 역사 시간에나 듣는 얘기를 삼촌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성을 호적에 올리려면 본관이 있어야 했는데... 김 씨, 이씨 성이 가장 많은 것은 노비들이 성을 택할 때 주인집 성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어머니의 성이 이 씨였던 이유는...          

삼촌은 꽤 지루하게 설명했다.          

호적에 오른 것과 족보에 오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야. 족보는 문중의 공식 자손으로 인정받는 것이고, 호적에 오르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오르는 것이지. 그래서 족보 없는 성씨는 조상이 노비였다고 추측이 되는 거지...          

아무도 그 얘기에 반박하지 않았고 더는 알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슬슬 흙 묻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는 어른도 있었다. 마치 극비사항을 함부로 누설하는 막내 외삼촌을 책망이라도 하는 듯. 그때야 가까스로 삼촌은 입을 봉했다.          

우리 형제들은 장지의 허드렛일을 마친 후, 집안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손길이 가닿은 가구들, 당신이 날마다 수없이 문을 여닫았을, 찬장 속속들이 모두 꺼내어 정리했다. 어머니가 사 모은 그릇이며 유리잔,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서랍 속의 행주와 각종 소품을 꺼냈다. 누구도 부엌살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분리수거 자루에 담았다.          

항아리 속이나 그릇 속에도 몇 개의 브로치가 더 발견되었다. 그런데 목걸이나 반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머플러나 스카프를 자주 한 것도 아니었다. 옷장에 옷을 꺼내 보니 곳곳에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오직 집착했던 것은 브로치였다. 어머니가 즐겨 사용했던 브로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다. 정말이지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한 아직 상자를 열어 보지도 않은 새것 같았다. 방금 사 온 거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멀쩡했다. 어떤 것은 조금 값비싸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따로 찬장 속 가장 맨 위 칸에 두었던 것은 아닐까.           

안방의 장롱 정리를 도맡았던 큰누나가 소리쳤다.  

        

-다들 이리 와봐. 장롱 안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뭔데? 뭐야’를 외치며 한곳에 모였다.  

        

-엄마 사진이 딱 한 장 있네.          

-좀 봐. 큰 언니.  

        

둘째 누나가 낚아채 사진을 자세히 봤다. 그 사진은 형제들 손에 의해 한 바퀴 빙 돌았다. 

         

-에게? 집문서도 아니고 고깟 누렇게 때묻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뭐 그리 귀하다고 상자 속에 넣어 보관을?          

실망한 목소리로 입을 삐죽거렸다. 사진은 한 바퀴를 돌고 내 손안에 들어왔다. 엄마의 처녀 시절 사진이었다. 한눈에 엄마와 엄마 또래의 한 여자와 엉거주춤 서서 찍은 아주 오래된 듯한 사진. 사진이 퇴색되어 금이 가 있어도 그 속의 한 사람은 분명 엄마였다.          


앗.

나는 그때 심장이 오그라들 뻔했다. 갑자기 뒤통수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엄마의 옆에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한 여자의 가슴에 달린 것. 거기에 꽂힌 내 시선은 오래도록 머물 수밖에 없었다. 큰누나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젖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만 봐. 엄마, 좋은 데 가셨을 거야. 사진은 누나가 간직할게. 액자에 넣어서 내 방에 둘 거야.          

-독사진도 아닌데 뭐 하러?          

-엄마가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안 그래?          

-이 사진, 나 주면 안 돼?          

-뭐 하러?          

-그냥.          

-그러고 보니 정말 우리 가족은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없네.     

-그런데 누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이 사진 속에 이 사람은 누구야?          

-그, 그건. 나도 잘 몰라. 엄마 친구겠지 뭐.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한 번 봐.          

-왜? 뭐가 있다고?          

-이 여자 가슴에 달린 거.          

-아, 그거. 브로치네. 그게 뭐 어때서?          

-엄마 친구라면 왜 이렇게 행색이 완전히 달라?          

-그만해.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샅샅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아니라, 엄마가 브로치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정작 브로치는 왜 엄마 가슴엔 없고 엄마 친구 가슴에 있냐고. 이상하잖아?     

-넌 별것이 다 이상하네. 됐고 그 사진 나 주라.          

-안돼. 이건. 내가 가질래.          

-암튼 똥고집은 그대로네. 알았어. 대신 액자는 꼭 해. 알았지?          

-그럴게.          

-그런데 누난 이 사진 속의 저분, 잘 몰라?          

-얘가 왜 이래? 오늘 같은 날. 시시콜콜 따지고 드네. 안다고 해도 그게 왜 중요해.          

-왜, 화를 내는데? 누나답지 않게.          

-아니, 그렇잖아. 네가 엄마도 아니고 엄마 친구에 관해 물으니 너무 웃기지 않아?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잊었어?     

-…… 

         

브로치의 테두리를 보더니 누나가 ‘이건 진짜 아냐? 아무래도 진짜 같은데? 이건 내가 가져야 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핸드백에 넣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누나가 가져간 것이 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도 그건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나가 어머니의 브로치 하나를 챙겨갔지만 난 그 이후로도 그것이 진짜였다는 말을 여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진짜 값비싼 브로치를 하실 분은 아니었다. 어쩌다 진짜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모조일 가능성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평소에 알뜰한 분이셨다. 허투루 무엇이든 덥석 사지 않았다. 브로치 외에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선뜻 뭐든 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왼편 가슴에 브로치를 단 여자가 지나가면 뒤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랬다. 어머니가 그것을 가슴에 달고 거울 앞에 서서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끔은 나를 보고 ‘이쁘냐, 어울리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렸다. 내가 보기엔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브로치를 지금 내 아내가 직접 만들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은 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집 곳곳에 브로치가 쌓여 갈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부쩍 더 많이 나서 마음이 울적한 날도 있었다. 어머니가 브로치에 집착할 때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는 일이 잦았던 것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푸성귀를 다듬어 장날에 내다 팔았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기 위해 큰 대야 속에 지푸라기 몇 가닥 엮어 허리를 묶어 가지런히 동여놓은 시금치나 봄동 같은 채소들은 보기에도 정갈하게 보였다. 거기다가 장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걸 팔러 가기엔 무색하게도 어머니는 그날도 예외 없이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옷이든 신발이든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장사를 하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심지어 밭이나 논일하러 나갈 때도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입고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당신은 깔끔했다.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뭐든 바지런하게 움직였다. 끊임없이 일해야 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옷매무새를 중히 여겼다.

담임선생님이 학부모를 초청한 날이 있었다. 그날도 엄마는 먼발치에서 봐도 한눈에 띌 만큼 옥색 치마저고리를 챙겨 입고 나타났다.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돌아서 보도블록 위로 엄마가 저만치서 걸어오실 때 나는 푸른빛 꽃 무더기가 붉은 점 하나를 왼쪽에 매달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어머니는 학부모 중에서 가장 고왔다. 아마도 담임선생님은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를 보며 어느 양반댁 규수일까,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우아했다.

어머니의 외출은 언제나 브로치가 함께했다. 어쩌면 답답하고 진부한 당신의 삶에 숨구멍의 한 방편으로 어머니는 그토록 브로치를 달면서 해소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만이 유일한 어머니의 정신적인 탈출구였을까.

어쩌다 집에 손님이 오는 날에도 어머니는 반드시 청소를 끝내고 돌아서서 옷을 챙겨 입었다. 어머니가 의복을 갖춘다는 것은 특별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날 입고 싶었던 옷에 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브로치를 찾아서 가슴에 곱게 달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 것처럼 흡족해 보였다.     

그런 어머니와는 완전 대조적인 성향을 보였던 것은 아버지였다. 어쩜 서로 그렇게 다른 성향이었을까. 아버지는 떨어진 옷도 아무렇게나 입는 것이 예사였다. 옷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도 툭툭 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수염도 잘 깎지 않았고 언제나 덥수룩했다. 신발은 다 떨어져 밑창이 훤히 보일 때까지 악착같이 끌고 다녔고 옷장에 아버지 옷은 몇 벌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마구 입고 다닌다고 늘 어머니와 실랑이를 한 적도 많았지만 두 분 다 그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특별한 일없이 잦은 외출을 하는 분도 아니었다. 지극히 정적인 분이셨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서 하는 일을 즐겼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브로치 주문이 밀려드는 날엔 아내는 꼬박 화장실 가는 일 외엔 그 일에 열중했다. 어머니가 다리에 쥐가 나도록 한자리에 앉아서 나물을 다듬는 모습과 흡사했다. 어떤 날은 산에서 한 보따리 따온 고사리를 종일 다듬었다. 일일이 지푸라기로 둥글게 말아서 한 덩어리가 되도록 쌓아서 장에 나갈 준비를 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그 일에 몰두할 때도 어머니는 낡은 스웨터에 빨간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자마자 브로치 모양을 스케치하거나 만들기 시작했다. 술이 얼얼하게 취한 날, 나는 아내에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브로치를 좋아하느냐고. 아내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술김에 재차 한 번 더 물으니 그때야 한마디 했다. 그걸 만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무엇을 잊을 수 있냐고 다그쳐 물었다. 아내는 뾰족 칼로 마지막 꽃잎 속의 수술 하나를 곧추세우는 중이었다. 얼굴은 들지 않고 브로치에 새긴 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새엄마의 기억을 도려내는 중이거든? 다른 것도 물론 있지만.     

-그게 뭔데? 

    

나도 모르게 약간 떨리는 목소리를 물었다.

     

-당신이 한 마디 상의 없이 학교를 그만둔 거. 그리고 애들 셋 다 아직 학생인 거. 뭐, 이거 만들 때는 말이야. 딴 생각이 안 나.   

  

다음 말을 잊은 사람처럼 나는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천정의 기하학적 무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 얼굴을 덮치는 것 같았다. ‘다시 뭔 일을 새로 해야 하나?’ 그렇지만 나는 충분히 쉴 필요가 있었다. 나야말로 오랜 교편생활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지울 시간이 절실하다고. 아내를 향해 버럭 고함을 치고 싶었지만 끙, 한숨만 내쉬며 억지로 자는 척했다.           

곱게 차려입고 예쁜 브로치를 가슴에 단 어머니를 떠올렸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다가 불쑥 당신의 왼쪽 가슴을 내려다보곤 했다. 마치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그런 모습을 자주 보는 사이 나는 이제 거꾸로 어쩌다가 어머니가 브로치를 다는 것을 깜빡이라도 한 날엔 오히려 이렇게 말해주었다. 

         

-엄마, 오늘 왜 브로치 안 달았어? 

         

그다음 어머니가 내 질문에 답하는 부분은 반전이었다.   

       

-금방 다른 옷을 갈아입으려고 빼놨지.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는 그 틈새의 시간 외엔 거의 잊지 않았다. 마치 모든 준비가 브로치를 다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 것처럼. 어머니의 탈출구는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던 것일까.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집에서도 늘 자주 그것을 달았다. 그래야 어머니는 삶의 활력소를 되찾았던 것일까. 무슨 박카스도 아니고 그것만 달면 스스로 힘이 생기고 뭔가 당당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면 그럴수록 아버지의 의심은 날로 커갔다.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버지가 의심의 눈초리로 시비를 거는 줄 뻔히 알면서도 어머닌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집을 비웠다. 한의원에 한약 재료를 갖다주는 일을 했다. 그건 할아버지 때부터 해온 일이었다. 그나마 조상들이 물려준 선산이 있는 거기서 웬만한 것은 다 채취했다. 칡뿌리며 엄나무, 감초, 온갖 약초들을 망태기가 터지도록 가져와서 마당에 펼쳐두고 작두로 잘게 썰어서 말렸다. 멍석을 마당 가득히 펴놓고 햇볕에 말리거나 망에 넣어 그늘에 매달거나 가마솥에 슬슬 덖었다. 약초마다 갈무리하는 방법이 달랐지만, 아버지의 손에 닿으면 감쪽같이 한약재가 되어 재탄생했다.

아버지가 거래하는 한의원은 제법 많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정기적으로 약재를 배달해야 했다. 아버지가 한약재를 트럭에 싣고 나간 뒤 어떨 때는 보름이 지나서 돌아오실 때도 있었다. 돈이 든 마대를 어머니께 건네주고는 의기양양해서 하며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별일 없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어머니가 아버지 밥상을 차리러 부엌으로 나간 후에 약간 목소리를 낮춰 묻기도 했다.  

        

-나 없는 사이에 네 엄마가 집을 비운 적은 없었냐?          

-아뇨, 집에만 있었어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장롱문을 다 열어보기도 하고 괜히 서랍장도 열어보고 어머니의 화장대도 이리저리 뒤져봤다. 꼭 아버지가 집을 오랫동안 비우면 하는 의례적인 행동이어서 나는 그저 별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어머니는 그다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기야 어머니가 언제 기쁘면 기쁜 표정을 슬프면 슬픈 표정을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닌지라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며칠씩 집을 비우고 돈을 벌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저 담담했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비싼 갈치구이도 보였고 소고기를 간간이 섞은 육개장도 올라왔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국이어서 항상 출장을 다녀온 날에 어머니는 미리 국을 가마솥에 은근히 끓여놓았다가 건더기만 아버지를 많이 퍼 드렸고 우린 주로 국물을 많이 주었다. 아버지는 허겁지겁 드시면서도 눈길은 계속 어머니의 브로치를 쳐다봤다.  

        

-당신은 어데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걸 또 달고 있나?          

-그냥요.          

-어데 갈 때는 몰라도 그냥 집에 있을 때는 그만 멋 부리라.          

-아이고, 이게 무슨 멋이라고.          

-그러면 왜 그걸 주야장천 다는 난리야?          

-뺄게요.          

-그걸 단다고 뭐가 달라져? 상놈이 양반이나 되냐고?     

-무슨 말을 그렇게...     

-아니, 그렇잖아. 생긴 대로 살아야지. 나를 보라고. 조상이 양반이라도 어디 티를 내는 거 봤어?     

-네?     

-뭐 잘났다고 집구석에 있으면서도 그걸 떡하니 꽂고 있어. 꼴 보기 싫게.    

 

그러고는 숟가락을 탁, 하고 소리가 나도록 놨다. 아버지는 절반 넘게 남은 밥상을 앞으로 물렀고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리고 천천히 밥을 먹었다. 그러나 브로치는 빼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날마다 바뀐 색깔의 브로치는 계속 달려 있었다.

그날 엄마는 혹독히 앓아누웠다. 군불을 좀 많이 지피라고 했다. 이상하게 한기가 온다고 일찍 자리에 들었다. 독감에 걸린 사람처럼 전에 없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통도 심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읍내에 있는 약국에라도 가서 약을 좀 지어 와야 하는 건가, 혼잣말했다.

어머니는 며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당신이 어림잡아 약초를 한 줌씩 넣고 마당에 숯불을 피워 달였다. 부채질하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뱁새가 황새걸음 걸으려고 흉내 내면 다리가 째지지, 암, 사람이 제 분수를 알아야지. 부채가 바람을 일으킬 적마다 아버지의 혼잣말도 쿨럭거렸다.

집에만 오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불을 때면서 계속 잔소리했다. 나는 부부 싸움할까 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출장을 다녀오면 주로 싸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에 달갑지 않았고 시큰둥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벗어놓은 옷에 여러 번 코를 갖다 댔다. 이리저리 뒤적이는 품새가 영 찝찝해 보였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산으로 망태기를 울러 매고 나갔다. 어머니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버지가 들고 온 빨랫감을 종일 빨아 널었다. 마당 가득히 속옷이 펄럭였다. 빨래를 널 때 햇빛에 반사된 어머니의 브로치가 비췻빛으로 반짝거렸다. 주름을 없애려고 빨래를 털 적마다 어머니의 왼쪽 가슴에 매달린 브로치가 달랑거렸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가 왜 저렇게 이쁜 것을 싫어할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그걸 달든지 말든지 간섭을 안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차피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는 아버지나 그러거나 말거나 끝까지 브로치를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가 도긴개긴이었다.          

나는 돌아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친구를 다시 봤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엄마가 교문을 들어섰을 때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잘 차려입은 소녀의 옆에 남루한 옷차림의 어머니. 어딘가 어색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소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때 묻은 저고리 고름이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의 친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행색을 한 흑백 사진 위로 자글자글 금이 그어졌다. 세월의 흔적처럼 빛이 바랜 어머니의 사진. 엄마는 왜 지금껏 저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했을까. 엄마는 정말 저분과 어떤 사이였을까. 아내가 앙칼지게 나를 불렀다.  


-뭐해요? 야시장 가야 하는데 얼른 나오지 않고.    

 

나는 사진을 빳빳한 종이상자에 넣고 황급히 방을 나왔다. 사진관에 가서 제대로 복구할 참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진관에 들러야겠다. 사진을 복구할 때 나는 뭔가 간절히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 옆에 선 분보다 더 화사하게 복구할 수 있냐고.


아내가 벼룩시장에 내다 팔 브로치 상자들을 차에 실으며 생각했다. 어떤 날보다 아내의 말을 잘 듣기로 맘먹었다. 장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 옆을 지키고 서서 뭐라도 해볼 참이었다. 아내가 목마르다고 하기 전에 음료수라도 냉큼 대령하며 얼쩡거릴 셈이었다.

앞으로는 브로치를 만들 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툴툴거리지 않겠다. 아내의 왼쪽 가슴이 축 처졌다. 한쪽에 너무 많은 브로치를 달아서였다. 그렇게 꽂고 있으면 금방 팔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브로치에 달린 큐빅 들이 저녁 햇살에 눈부셨다. 나는 왜 주책없이 콧등이 시큰거려 괜스레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든지. 아내도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자의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