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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은 Sep 25. 2024

그림자의 꿈

                                                            그림자의 꿈

                                                                                                                                

                                                                                                                                     이도은

 

       

어쩌면 의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보면서 의자를 떠올린 건 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떻게 봐도 의자였다. 더 이상 실체는 의미가 없었다. 사진으로 찍혔을 때 이미 본질은 사라졌다. 더욱이 그림자로 나타났을 때는 그저 어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둠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등이 길었다. 빛이 위로 향했을 것이다. 오래 바라보니 어이없게도 등이 자꾸 자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줄기식물처럼 스멀스멀 뻗어나가 내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표시 나지 않게 등을 키워나가는 의자. 눈을 감는 척하다가 뜨면 그림자도 자라고 있다가 정지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밴드의 귀찮은 가입 조건을 거부했을 것이다. 

밴드의 다른 사진들도 빨리 보고 싶어졌다. 가입 승낙이 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나의 닉네임과 프로필 사진이 통과되어야 했다. 심사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틀 만에 가입을 허락한다는 통보가 떴다. 나의 닉네임은 ‘모빌’이었고 프로필 사진은 정수리 바로 위에서 해가 내리쬘 때 바닥에 생긴 내 그림자였다. 두 발 아래 생긴 짧은 그림자는 성별조차 식별하기 힘든 음지에 불과했다.

의자를 찍은 사람의 닉네임은 ‘it’이었다. ‘미친 허공’도 있었고, ‘눈동자의 귀’나 ‘죽음의 부활’ 같은 이름도 있었다. ‘모빌’이라는 내 이름은 너무 진부해 보였다. 밴드는 그림자를 찍는 사진동호회였다.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it’이 유일했다.  

나는 회원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it’이란 남자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남자라고는 했지만, 사실 어떤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의 사진에서 거칠고 과격한 이미지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가 남자라고 단정 지었다. ‘it’뿐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한결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댓글이나 사진은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그 밴드는 모든 것을 그림자로 이야기해야 하고 그림자 밖으로 자신이 나오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규칙이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더욱 궁금한 법이었다.  

it의 사진은 모두 의자였다. 하나의 물체가 그렇게 많은 사진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도 검은 그림자로. 정말 실체를 숨기기에는 그림자 속만 한 곳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도 그저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그림자 사진을 찍는 일에 열중했다. 문을 찍어 보기로 했다. 열린 방문 뒤로 생긴 그림자를 본 뒤부터 자꾸 거기로 눈길이 갔다. 방문을 열어 놓고 벽이나 바닥에 생긴 그림자를 찍었다. 창문을 빼내 세워 놓고 찍기도 했다.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부분과 통과하는 유리 부분이 특이한 명암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 내내 내 방 창문을 넘어 들어왔던 그것에게서 나는 이십 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약 냄새가 진하게 풍기던 충효약국의 반지하 방에 난 창문.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내 학비는 물론이고 오빠와 동생의 학비까지 벌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내가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초등학생 과외부터 청소 알바까지 쉬는 날은 일 년에 이틀뿐이었다. 명절 전날에는 떡집에서도 일했다. 오빠의 거듭되는 재수 생활과 방탕도 내가 거부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했고, 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도 보태졌다. 엄마와 가족들에게 나는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보태야 하는 의무 말고는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잘라 낸 후로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서 제외되었다. 우리는 경주에서 그런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골짜기에 살았지만 남의 농토를 빌어 많은 농사를 짓던 때는 그래도 서글프게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2년 만에 들어간 야간 대학 한 학기를 겨우 마칠 즈음 수입이 제법 많은 일이 들어왔다. 휴학을 결정했다. 우리 집이 있는 산내에서 보면 경주터미널은 명동이었다. 터미널 근처 충효동에 약국이 딸린 부잣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나는 집을 벗어나는 것과 생활비가 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낮에는 약국에서 약사 보조를 했고, 저녁에는 그 집 꼬맹이 셋의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씻기고 놀아주고 숙제를 봐주고 동화책을 읽어서 재우는 일까지 끝내고 나면 반지하 내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0대 약사는 너무 과묵했고 너무 날카로웠다. 저녁에 되어야 돌아오는 간호사 안주인은 매일 지쳐 있었다. 부부에게서는 늘 진한 약 냄새가 풍겼다. 너무 낯설고 차가운 냄새였다. 약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나는 온종일 뭘 하며 움직여야 할지 몰랐다. 약 진열장을 내 맘대로 정리할 수 없어 닦고 또 닦는 일만 했다. 드문드문 들어오는 손님들은 아무도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약사만 찾았다. 손님이 없을 때도 나는 먹지도 않은 약 냄새에 취한 상태로, 그저 영문 없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앞으로 맞잡고 서 있었다. 약사는 약국 한구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이나 신문을 읽었다. 약사가 손님과 상담을 하거나 약을 조제하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나는 변함없이 벽에 세워 놓은 긴 빗자루처럼 서 있었다. 키 작은 가사도우미가 마당을 가로질러 들고 오는 밥상을 달려 나가 받아 들 때가 되면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크게 몰아쉬는 숨과 함께 약 냄새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난쟁이처럼 키가 작은 가사도우미에게 밥과 찬이 얹힌 밥상은 너무 거대해 보였다. 

약사가 약국에서 식사할 동안 나는 주방에서 가사도우미와 함께 밥을 먹었다. 가사도우미 역시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사람처럼 조용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일을 알려 주지 않았다. 부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본 적이 없어서 그 집에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종일 숨을 쉬지 않은 채로 살았을 것이다. 


한 사람, 매일 찾아오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나는 거기 약국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24시간 내내 그 한 사람이 오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왔다.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검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내게 말했다. 박카스랑 게보린 한 알 주세요. 그녀는 게보린 알을 톡, 하고 소리 내어 빼낸 다음 따닥, 소리가 나도록 박카스 병을 따서 둘을 함께 먹고 갔다. 그녀는 약사를 찾지 않았고 내게 박카스와 게보린 한 알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비로소 내 존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저 멀리서 약국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내 손은 이미 박카스를 향해 뻗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일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그녀가 약국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호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낸 다음 분명한 목소리로 내게 박카스 한 병과 게보린 한 알 주세요, 라고 하기 전까지는 약에 손을 뻗지 않았다. 내가 그 공간에 머물렀던 시간 중에 누군가의 눈에 내가 보인다고 느낀 때는 게보린과 박카스를 건넸던 순간이 유일했다. 다크서클이 진한 그 여자의 눈에 내가 보이는구나. 내 손을 거쳐 건너간 게보린을 이 여자가 먹고 있구나, 내가 여기 이곳에,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구나, 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나는 되도록 길게 끌고 싶었다.

다섯 살, 일곱 살, 열 살 아이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어른들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날뛰었고, 나는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거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쥐어뜯기는 정도는 즐겁게 감수해야 했다. 세 아이는 비명을 질러대며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때쯤엔 나도 조금 큰 목소리로 제재하기도 했다. 그러지 마. 아프다고. 내가 낸 소리는 아이들보다 조금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흩어져버렸다. 아이들의 방과 부부의 방이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들 부부가 아예 나를 아이들의 샌드백쯤으로 취급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내 방을 쳐들어온 검고 긴 침입자 때문에 나는 여름이 지나갈 때쯤 충효약국을 그만두어야 했다.     

it은 의자 말고도 다른 소품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었다. 둘둘 말린 밧줄 같은 게 의자에 걸쳐져 있는 사진이었다.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그리 잘된 구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엉성한 구도는 도식성을 전혀 느끼지 못해서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보였다. 그림자는 그저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증거였고, 사막의 모래바람에 날려 다니는 유일한 생명의 흔적처럼 여겨졌다.   

온통 그림자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림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늘 외엔 어떤 사진도 용납하지 않는 밴드지기의 의도가 조금 궁금했다. it은 회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다른 회원들의 사진이 무수히 올라왔지만 역시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그의 의자였다. 아니 내가 의자라고 여긴 그림자였다. 그것을 두고 의자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모빌? 

it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왜 모빌이죠?

안 되나요?

어지러워서요. 자꾸 흔들리니까요.


내가 왜 모빌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문이 열리기를 바란다면 문밖에 서 있는 자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문을 두드릴 때 문안에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문밖에 있는 자는 택배입니다, 라든가 혹은 윗집입니다, 라고 ‘택배’나 ‘윗집’이 마치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고유의 이름이기나 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소리쳐야 한다. 닉네임은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니까 상대에게 아주 잠깐 나를 보여주는 단축키 같은 것이다. 매번 변신할 수 있는…… 그것이 닉의 매력이다. 나를 버리고 싶을 때 언제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곧 버릴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it이건 모빌이건. 

나는 지금껏 옛날 그 약국이 있던 근처에 살고 있다. 나는 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동생 말대로 융통성이 없어서인지, 겁이 많아서인지 도무지 낯선 고장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게 가장 낯선 곳은 충효약국이었다. it과의 대화 때문인지 나는 약국이 있던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집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저 그곳을 나오기 전날 밤 혼자 서 있었던 서천교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 내가 걷는 근처 물속에 작은 돌을 던졌다. 물이 파장을 일으킨다. 파장이 조금씩 커지니 어지러웠다. 모빌은 흔들리는 것. it의 말을 생각하는데, 물속에 비친 다리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가 물속에서 떨고 있었다. 나는 물속에 떠 있는 서천교 그림자를 찍었다. 흑백이 아닌 그림자였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고 내 방은 반지하에 있었다. 약국 아래 반지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방인데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긴 했지만 열어 놓기는 곤란했다.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땅바닥에서 풀썩이는 흙먼지가 더 많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모가지를 돌릴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를 내는 선풍기가 밤새 돌아가던 날, 다른 날보다 특별히 더 더웠던 그날, 옆으로 웅크려 누워 부어오른 종아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던 내 눈에 들어온 건 긴 그림자였다. 잠이 들 듯 말 듯 하는 내 눈꺼풀에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골목 쪽에서 창을 통과한 그것은 내 눈썹을 간질이듯이 움직였다. 골목에 누군가 지나가는 거겠지. 누구든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러나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서성이고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은 연거푸 그림자의 일렁거림에 눈이 자꾸만 가려웠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불을 켜자, 그림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불을 껐을 때 다시 그림자가 바깥을 향하고 있는 창문을 통해서 내가 누운 공간을 침범해 들어왔다. 길게 자신의 몸뚱어리를 늘어뜨리면서. 그날부터 밤마다 그림자는 창문을 뚫고 쳐들어왔다. 단순한 막대기로 보이기도 했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길게 뻗어 흔들어대는 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방 안을 기웃거리는 어떤 사람의 머리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점점 길어졌고, 점점 커졌고, 점점 새카매졌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다음 날 내 방 창문이 나 있는 골목으로 나가 보았다. 저 멀리 가로등이 하나 보였고 마주 보이는 집 담장이 있었다. 내가 누운 방의 창문은 반만 땅 위에 있어서 그곳에 누가 살든 말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한 문이었다. 나는 그곳에 파묻혀 그해 여름을 보냈다. 

약사 남자는 여전히 나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고 일을 지시하지도 않았다. 선풍기 방향 돌려라. 인제 그만 들어가거라. 그런 몇 마디 말 말고는 그냥 나를 내버려 두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검은 입술을 가진 여자도 여전히 게보린과 박카스를 사러 왔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거 계속 먹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그렇게 입술이 새까매지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꼈지만 참았다. 키가 작은 가사도우미 여자 또한 힘에 부치는 밥상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오갔다. 가녀린 주인 여자 역시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여전히 지친 얼굴로 돌아와, 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이들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it은 내 컬러 그림자 사진에 열광하며 그의 사진도 더 과감해졌다. 의자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은 새 한 마리, 밧줄 같은 것으로 허리를 감은 의자, 그것을 응시하는 음산한 창문. 남자의 튀어나온 목젖을 연상시키는 팔걸이 모서리…….


이혼한 뒤로 10년을 혼자 살던 동생이 찾아왔다. 서천교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동생은 새로 만나는 남자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별한 젊은 은행지점장이라고 했다. 동생은 자주 사진을 보내왔다. 그가 사 준 가방과 코트와 소파를. 

모든 게 투명한 사람이야. 

어떤 점이 좋으냐는 내 질문에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동생은 가난한 형편에도 학창 시절 내내 밝았다. 그녀는 그 이유가 자신이 이기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동생은 내가 초등학생 과외를 할 때부터 과외비가 들어오는 날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동생은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강변 자전거길로 연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를 지나쳤다.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어느새 해가 졌다. 멀리 예술의 전당에 불이 켜질 때까지 동생은 그 남자에 대해 떠들어댔으나 나는 거의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얘, 저기 궁전 같지 않니?

응? 아, 저기? 언니는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는 불 켜진 예술의 전당이 궁전처럼 찬란해서 은행지점장이 사 주었다는 김치냉장고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나는 서천교 난간에 걸쳐져 풀럭이는 커다란 비닐이 물속에 비친 사진을 올렸다. 비닐은 몇 겹으로 접혔느냐에 따라 투명도가 달랐다. 회원들이 그림자의 실체를 맞추기 시작했다, 물에 뛰어들기 위해 난간에 허리를 꺾은 여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극단적인 상상이군요. 내가 댓글을 올리자 상투적 현실이죠, 라고 it이 답글을 달았다. 아무도 그것을 맞추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실물을 맞추지 못하도록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흔들리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 모빌 그림자처럼. 

무슨 의미인가요?

it이 내게 질문형 댓글을 올렸을 때 다른 회원들도 동조했다. 그들은 내가 찍은 사진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 했다. 

글쎄요.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의미는 각자의 몫이겠죠. 

그렇군요. 그림자는 말이 없으니. 

그렇게 언제부턴가 it은 내게 뭔가를 물었다. 질문하는 사람은 기실 상대에게서 무슨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질문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점점 대담해졌다. 아예 내 방 깊숙이 들어와 나를 슬쩍슬쩍 건드리기도 했다. 시커먼 발자국을 남기며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날도 있었다. 칼이나 도끼 같은 것을 들고 가만히 서 있는 날도 있었다. 얼마나 밤을 새웠는지 나는 아침이 되면 시뻘게진 눈으로 세수하고 약국으로 나갔다. 약사가 나를 흘끔거렸다. 마치 뭔가 알고 있다는 눈으로 흘깃대면 까닭 없이 약사를 후려치고 싶었다. 게보린 여자가 왔다 가고 나면 눈의 따끔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약사가 자리를 비우면 수면제 같은 것을 훔치기 시작했다. 게보린도 한두 개씩 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다가 검은 입술의 여자를 떠올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수면제를 먹지 않았다. 

어느 날 약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뭐가 필요한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 번 더 물었다.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중년 여자 한 사람이 들어와 남자 뒤에 섰다. 

아니, 됐어요.

남자가 말했다. 중년 여자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두 사람은 모두 약사가 돌아오기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약사는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의 어이없는 웃음 뒤로 눈길을 주었다. 약국 유리문 밖 골목을 오빠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두 번의 재수 후 겨우 대학에 들어간 뒤 입대한 오빠가 휴가를 나온 모양이었다. 일병을 달았으니 아직 제대가 멀었던 때였다. 군에서 살이 좀 쪘는지 바짝 붙는 청바지에 한쪽 손가락을 집어넣고 다른 손톱을 이로 물어뜯으며 내가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약국 안을 흘끔거렸다. 나는 오빠를 못 본 척 몸을 뒤로 돌려 약사가 들어오는 문을 향해 목을 길게 뺐다. 5분이 넘어서 약사가 돌아왔다. 기다리던 남자 손님은 고작 어떤 조제도 필요 없는 변비약을 샀고 중년 여자는 소화제를 샀다. 약사는 두 사람을 보내고 조제실 귀퉁이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늘 보던 책을 집어 들었다. 왜인지 그때 나는 눈물을 흘려버렸다. 눈물을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오빠는 청바지에서 손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내일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어. 조금만 주면 돼.

여긴 어떻게 알았어?

네가 통 집에 안 온다니까. 하긴 이런 좋은 집에 사니까 촌구석에 오고 싶겠냐?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뭘? 내가 너한테 손 벌린 거? 말 안 해 주면 나야 땡큐지.

나는 굳이 약국 문이 아닌 한쪽으로 돌아져 있는 대문으로 들어왔다. 그때 골목 끝 담벼락 뒤쪽으로 슬쩍 몸을 감추는 노란 머리카락의 여자를 보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유리문 안에서 까닭 없이 따끔거리는 눈으로 병신같이 서 있더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그날 밤. 그림자는 아예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에 말을 걸었다.

안녕?

그림자는 조용히 따라 했다. 

안녕.

오늘은 그만 좀 가 줄래?

가줄래…….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널 죽일지도 몰라.

어쩌면 널…….

그림자는 한숨을 쉬고 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꼬박 밤을 새웠다.      

문틀을 청소하면서 빼낸 창문 두 개를 엇박자로 겹쳐 놓았다. 두 개의 물체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는 겹쳐지면서 둘의 개별성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두 그림자는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서로에게 흘러들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없었고 그 구분 또한 의미가 없었다. 사진만으로는 누구라도 실물의 정체를 알아맞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다 떠오르는 대로, 혹은 떠오르게 유도하는 방식으로 제목을 붙일 수가 있었다. 돈이나 사랑이나 밀림이나 희망이나 아무 말이나 엮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 보는 이는 제목에서 실물을 유추해 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곤 그들 나름대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창문을 눕히거나 마름모꼴로 세우거나 해서 세 개, 네 개를 겹쳐 놓고 사진을 찍었다. 밝은 빛을 통과하는 부분과 좀 더 여린 빛, 그리고 더 여리거나 통과하지 못한 부분 등 여러 층의 빛과 여러 층의 그늘이 묘한 무늬를 만들어 냈다. 집이라는 제목을 붙여 사진을 올렸다. 

모빌. 제목이 근사하군요.

제목은 누구라도 마음대로 붙일 수 있는 거니까요.

그곳에 가면 따뜻할까요?

…….

언제부턴가 it과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it은 삼 개월 전쯤 허리에 밧줄을 감은 의자 사진을 찍었고 그것에 ‘LA’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내가 그의 사진을 빠짐없이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를 의식해서 제목을 붙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것이 왜 LA냐고 물으니까 그는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이니까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 달 후에 한국 갑니다.

탈출하시겠다는 얘긴가요?

이제 창문을 넘을 겁니다.

……. 

방을 둘러보았다. 2년 전에 옮긴 투룸이었다. 17평 아파트에 살다가 어머니가 죽고 난 뒤에 옮긴 집이었다. 오빠와 동생들이 결혼하고 어머니와 둘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내가 책임져야 할 몫으로 어머니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결혼할 때 한껏 대출받아서 오빠 전셋집을 마련해 주었다.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는 어머니와 나의 생활비와 맞먹었다. 그 사실을 안 동생이 가족들과 절연하겠다고 펄펄 뛰었다. 실제로 몇 년 동안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으니 언니는 잘 모르잖아.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동생이 화가 난 이유였다. 어머니한테 두 아이 학원비라도 보태 달라고 했다가 오빠한테 거의 다 건너간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네 오빠 결혼하고 나거든 그때 데리고 와. 내가 처음 만난 남자는 어머니의 그 말 때문에 미루다가 끝나버렸다. 두 번째도 비슷했다. 배불러 왔으니 니 동생 먼저 보내자. 그 후 한 번의 연애와 이별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그를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동생은 이혼한 뒤에야 우리를 찾아왔고 어머니는 동생이 불쌍해서 매일 울었다. 어머니는 내게는 잘 들리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중학생인 내게 집안을 책임지게 할 때부터 어머니는 내 말이 잘 안 들린다고 했다. 내가 자꾸 소리치자 고개를 딴 데로 돌렸을 뿐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는 내 말이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던 어머니는 2년 전에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동생한테 천만 원만 보내다오. 그래야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내가 보험사에 대출을 받아서 입금 확인서를 보여주자 엄마는 마지막 미소를 활짝 짓고는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이자만 내다가 죽을 수도 없었지만 이자 내고 살 만큼 수입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학원이나 공부방도 없는 상태로는 모든 게 너무 불확실했다. 집을 처분하고 투룸에 세를 얻었다. 그때부터 동생이 자주 찾아왔다. 가끔 쉬어 터진 김치나 안 입는 옷을 들고 오기도 했다. 

의사란 직업이 그렇더군요.

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의사라는 두 단어를 입속으로 나지막하게 굴려 보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그러나 조금은 권태로운 듯 창을 통해 밀려오는 햇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을 노출하셨으니 이제 여기서 탈퇴해야겠군요.

뭐 그래도 상관없고요. 모빌 님을 만났으니까요.

그는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밴드에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에 수면제는 조금 더 많아졌다. 나는 매일 약국을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다크서클이 검게 내려앉은 여자가 게보린을 토독, 까서 검은 입술 사이로 밀어 넣는 걸 보기 위해 종일 약국 안에 서 있었다. 게다가 수면제를 훔칠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매일 까스명수와 청심환을 함께 사서 입에 털어 넣는 누군가가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아마 나는 그곳에 10년쯤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창을 넘어오는 그림자의 정체를 찾기 위해 창문 밖을 얼씬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잠옷 바람으로 골목에서 토하고 있는 약사의 아내를 발견했다. 어떨 땐 쪼그려 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약사의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한순간 그녀의 형체가 빛이 통과하지 못한 어떤 검은 물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삐거덕거리던 선풍기가 아예 멈춰버렸다. 창을 넘어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은 내 곁에 누웠다. 땀 냄새가 왈칵 솟았다.

결국 넌 여기서, 이 땅속에서 썩어버리고 말 거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발을 들어, 내 곁에서 속삭이고 있는 그것을 힘주어 꾹 밟았다. 그림자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문질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프다고 소리 질러. 

난 소리 같은 거 지르지 않아. 오히려 네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게 바로 나라는 걸 알지.

나는 책상 위를 더듬어 커트 칼을 집어 들었다. 겁을 주듯이 말했다.

비명을 질러 봐. 도망가.

나는 네게 아무리 밟혀도 절대 멀리 가지 않아. 절대 비명도 지르지 않아. 밟을수록 더 길게 자라나는 나를 쫓을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칼을 밀어 올렸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검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순간 휙 지나던 가느다랗고 흐린 한 줄기 빛을 받아 칼끝이 반짝거렸다. 

도대체 그 방법이란 게…….

나를 쫓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한없이 어두워지는 것이야. 나보다 더 짙게.

그림자를 쫓는 방법은 내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림자는 내 속으로 숨어들겠지. 그림자를 향해 칼을 들이댔을 때 나는 조금은 자유스럽고 조금은 슬픈 감정이 함께 밀려왔다. 차갑고 뜨거운 두 개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생에게 밴드에서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미쳤어? 직접 보고 10년을 함께 살고도 믿을 수 없는 게 인간이야. 언니는 그렇게 순진하니까 여태 그렇게 사는 거라고.  

여태 그렇게 산다는 동생의 말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남의 집 애들 구구단 봐주던 생활을 마흔이 넘는 지금까지 변변한 직장도 못 갖고 과외나 학원 강사로 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주 땅을 벗어날 주변머리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것이 모두 내가 순진해서 그런 거라고 동생은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매일 it과 대화를 나누었다. it은 내게 그림자는 정직한 거라고 말했다. 색채로 위선을 부리지도 않으며, 빛을 자신의 몸대로 받아들이고 몸대로 뱉어 내는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몸짓이라고 했다.

그림자는 이름이 없으니까요. 

빛을 받지 않는 모든 것은 없는 존재, 라고 내가 말했을 때 it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빌은 자신의 그림자를 믿지 않는군요. 

it의 그 말에 나는 그와 카카오 친구를 맺었다. 영상은커녕 카톡 음성 메시지로 서로의 목소리도 들은 적 없지만, 우리는 불쑥 서로의 삶 속으로 들어섰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프로필 사진의 배경은 거의 병원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건물이나 병원 구석구석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은 있었지만, 뒷모습이거나 누군지 짐작할 수 없는 단체 사진이었다. 내 프로필 사진도 황리단길이나 소박한 서악마을의 골목길이나 서천교 길이 전부였다. 피차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전한 셈이었다.

창으로 불어오는 미풍에 모빌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바람을 감지한 모빌이, 아니 모빌의 그림자가 팔랑거렸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더운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불청객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방으로 짐작되는 창문 아래를 지날 때였다. 약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도대체 뭐가 신경 쓰인다는 거야.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당신 병이야. 병이라고. 있으나 마나 한 애 갖고 왜 그래.

몰라. 나도 모르겠어.

벌써 오래전에 지난 일이야. 그거 한 번 갖고 매번 이러는 거……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당신 마음대로 바보 같은 애 하나 들여놨잖아. 그 애 얼굴 좀 똑바로 보고 그런 소리 해. 

나는 창문 아래를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가 숨도 쉬지 않고 서 있었다. 약사 아내의 울음이 길게 늘어지고 뭔가를 던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살금살금 밖으로 빠져나왔다. 골목에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 아래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내게서 쫓기듯이 재빨리 걸었다. 내가 나를 밟았다. 무자비하게 밟았다. 나는 급기야 내 그림자에서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렸다. 내게 밟히면서도 결코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 끔찍하게 지독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날 밤 나는 어두운 서천교에서 돌아다니다가 열두 시가 넘어서야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리에 눕지 않고 커트 칼을 잡은 채 창문을 똑바로 노려보고 앉아서 그림자를 기다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 검고 섬뜩하고 두려운 것의 진짜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나는 마주 보아야 했다. 나는 설령 내 날카로운 칼 앞에 선 내 얼굴을, 내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끔찍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마주 볼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창밖으로 부옇게 안개가 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창을 넘어오는 것은 없었다. 

나는 약사와 그의 아내가 깨기 전에 그날 아침을 먹지 않고 부엌에서 조용히 식사 준비를 하는 키 작은 가사도우미에게 인사하고 그 집을 나왔다. 

당장 돌아가. 그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않을 거다. 

몇 번을 갈아타고도 걷고 걸어 마당에 들어서는 내게 어머니는 바가지를 집어 던지고 등짝을 후려치고 난 뒤 앓아누웠다. 나는 다시 약국과 다를 바 없는 곳들로 긴 그림자를 끌고 갔다.      

모빌은 선생님?

it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내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어느 곳에도 그런 단서를 줄 만한 내용이 없는데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짚어 봤어요.

그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일에 능숙한 것 같았다. 

곧 만날 텐데 그 정도 정보는 알고 가야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는 한국에 나오면 무얼 할 거라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다. 여태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 낸다는 투였다. 원래 서울에서 개업할 예정이었지만 경주 같은 곳도 좋다, 좋은 자리가 있으면 알려 달라, 나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고 싶다, 미국에서는 벌었지만 한국에서는 쓰고 싶다 등.     

석 달 가까이 연락이 없던 동생이 전화했다. 동생이 전화할 때는 두 가지 이유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자랑을 하거나 협박을 하거나. 오늘은 후자였다. 물론 구걸에 가까웠다. 남자에게 집을 털어 투자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곧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데 죽어버리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건 당연히 협박이었다.

남자 때문에 죽겠다는 거니, 돈 때문에 죽겠다는 거니?

그깟 사기꾼 때문에 내가 왜 죽어?

그렇다면 그건 구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너는 결혼도 해 봤고, 연애도 해 봤는데 나도 그럴 기회가 한번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동생이 뒤늦게 지금 와서 무슨 소리냐고, 살던 대로 살라고 악을 쓰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날마다 몇 번씩 전화할 것이다. 사정했다가 다시 협박했다가 화를 냈다가 울었다가 할 것이다. 나는 동생의, 아니 그들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가 톡을 보내왔다. LA에서 출발해 오후 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지만 중요한 일이 많아 다음 날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경주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경주 고속터미널에서 만나면 거대한 고분들을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는 내가 당연히 그러리라 믿는 것 같았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밴드에 들어가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그는 이미 밴드에서 탈퇴하고 없었다. 그가 올려놓았던 의자 사진들도 지웠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it이라는 이름의 회원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에 관한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빛의 반대 방향에서, 빛이 통과하지 못해야만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존재.

그가 경주에 도착하겠다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이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전화기를 열어 동생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it과 주고받았던 카톡 내용을 하나하나 삭제했다. 그의 어떤 글도 더는 내게 전달될 수 없도록 했다. 그 차단벽이 빛을 통과시키지 못해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 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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