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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연 Apr 24. 2023

추상

뜻을 모르니 행복하지 않다

나는 모른다.

행복하다는 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행복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행복함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르는걸까?  남들은 쉽게도 말하던데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행복이란 좋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면 좋은 상태는 또 무엇인가? 좋다는 것과 행복하다는건 정신적인가 물질적인가 아니면 심리적인가?

그럼 물질은 무엇이고 정신은 무엇인가?

행복이란 감각적인가, 감성적인가?

행복이란 자의적인가 타의적인가?

누가,  어떤책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풀이를 하더라는 것을 믿지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정의일뿐 나와는 상관없다. 우리는 가끔 어느 유명한 사람, 작가, 철학자,  성현들이 남겨놓은 문장과 단어의 노예가 된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떠나서 그 사람의 견해에 쉽게 동화된다. 그리고는 그가 한 말의 뜻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럼 그것은 자기 것인가 아니면 그 말을 한 그 사람의 것인가?  끊임없이 인용하고 따르고 믿으며 그것에 반하는 뜻들을 배척해 나간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들이 소멸해가고 그의 말이 내 정신 한가운데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는가?  완벽한 민주국가가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가?

민이 주인되는 나라,  그런 사회,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진짜로 그런 조직이나 사회나 국가가 존재하는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형상화시켜놓고 그것을 맹신하는게 아닐까?

조국이란 무엇인가? 겨레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왜 이것을 위해서 고난을 감내하고 목숨까지 버리는가?

난 모른다. 그 정신적 상태를...

사랑한다고 한다. 어떠한 상태가 사랑하는 상태인가?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상태가 되는가?

나는 아내를 생각하면 짠~하다. 어떤 때는 찡~하다. 이런 느낌은 무엇인가? 사랑 아니고 다른건가?


세상은 모두 추상이다.

세상은 실체가 없다. 대부분의 고체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한다. 생기란 고체가 아니다. 고체를 존재로 바꾸는 것은 생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생기이다. 그래서 내몸이 존재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추상은 물질을 실존의 세계로 인도하는 원동력이다.  즉 모든 추상들이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형체도 없고 뜻도 없다.

무제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도 생명의 추상과 실존에 대해서 고민한 것 같다. 그러나 답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답을 얻었다고 공언했을지라도 그것은 틀린  답일 것이다.

행복도 사랑도 무슨무슨  주의도 모두가 추상이다. 이 추상은 정의가 없으며 모든 개체들이 가지는 느낌의 가치는 다 다르다. 그래서 인간이, 개인이 위대하며 존중되어야 한다.


길을 간다. 끝도 없어서 평생을 가도 다갈 수 없는 이 길을 마치 끝까지 갈거란 착각을 믿으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며 간다. 열심히 살다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춘다. 자아의 존재적 추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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