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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연 May 06. 2023

죽음에 대한 간접경험

1초 = 영원

탼생이나 삶에 대한, 아직은 살아있는 자들의 견해나 연구나 정의들이 차고도 넘치는 현재이지만 죽는다는 것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있다고 오랜 생각끝에서 나오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며 너무나 상적이고 관념론적인 것이라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는다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죽는다는 과정은 어떠하며 그 과정중에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나 학설이나 또는 종교적인 관점들은 명확한 답을 하지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어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회사에서 매년 종합검진을 받으란다. 일정한 병원을 지정해놓고 거기서 여러가지 내몸에 대한 컨디션을 채크하는데 이럴때마다 내몸이 실험실의 교보재가 된 듯 하다.

피를 뽑고 대소변 샘플을 제출하고  X-레이 촬영을 하는등 여러가지 검사를 한다. 그러면 이주일 안에 그 결과를 알려주는 메일을 받게 되고 이것은 때로는 공포가되고 잘 관리했다는 자랑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안도가 된다. 특히 이런 종합건강검진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이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날부터 식사를 조절하고 약품을 탄 물을 잔뜩 먹고 속을 깨끗이 비우는 과정이 있는데 나의 경우 이런 과정이 꽤 흥미롭다. 특히 수면유도제가 내몸속에 투여되고 다시 깨어나는 과정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임한다.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위해서 검사실로 들어가기 전에 약물을 삼키고 엄마뱃속의 태아같이 옆으로 쪼그려 누우면 마지막으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검은 호스를 주입하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수면으로 유도하는 약품을 주입하게 된다. 이 과정을 처음 해봤을때는 두렵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반드시 깨어날 것에 대한 믿음을 득에 의해서 알기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학과 내가 누가 이기나  대결을 하는 순간이 수면유도제를 투입하는 싯점이다.  이때 두눈을 부릅뜨고 절대로 잠들지 않겠노라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잠들지 않는다. 아무 약이라도 넣어봐라. 절대로 잠들지 않는다. 절대로 지 않을거야.


어디선가 사람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 oo님 정신이 드세요?"

아~ 어김없이 나는 졌구나.

수면내시경에 소요되는 시간은 회복시간을 합해서 15분 남짓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부터 그 시간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죽음이란 영원히 잠드는 것이라고 한다.

주로 편안한 안식의 시간으로 들었다고 하고 영면한다고도 한다. 즉 영원히 잠든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죽음이란 잠든 것일까? 잠들었다 함은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깨어남 없는 깊은 잠을 영원히 자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수면내시경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수면유도제가 내몸속에서 활동을 하면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모든 존재적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육체도 영혼도 감각도 사라진다. 나를 중심으로 봤을때 내가 나를 느낄 수 없으며 나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다. 깜박하는 그 순간부터 십분이지나든 하루가 지나든 십년이 지나든 백년이 지나든 천년이 지나든, 그 시간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든 순간부터 일초와 수억광년 혹은 영원이란 시간적 개념은 같다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때는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겻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죽음은 육체적 죽음 보다는 영적 죽음을 말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혼수상태에 들어서 몇달 몇년을 버티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며 자신의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눈을 감았다가 금방 깬 것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육체와 시간의 실존은 오롯이 곁에서 간호하던 사람만의 몫일 것이다. 

내가 수면상태에 있을때 의사는 긴 호스를 내 몸안에 찔러넣고 이리저리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나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내가 아니었으므로 그 자체를 모른다. 그러다가 만약 의료사고로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사실을 인지할 수가 없다. 다만 나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기억했던 사람들만 슬퍼할 따름이다.

혹자는 죽음의 세계에 갔다가 왔다고 한다. 자기의 영혼이 유체이탈을 하여 위에서 내려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더라고. 또는  종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죽어보니 누군가 자기를 천국과 지옥으로 데리고 다니며 사후의 세계를 보여주더라고.  어느 유명한 목사님 마저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단테의 신곡을 너무 열심히 읽었나 보다.


인간은 죽음이 두렵다. 그것은 죽는 순간 느끼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은 후에는 고통을 느낄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의식이 사후에도 나를 지배한다는 가정하에 사후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후를 주관하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 나란 존재 자체가 없는 완벽한 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다시 깨어나는 것, 그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아닐까.


숙면을 취하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숙면이란 꿈도 시간도 자아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정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일어나보니 아침이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숙면의 상태. 시간도 공간도 없다.  마치 수면내시경을 받는것 처럼.  이로써 우리는 죽음이란 것을 간접체험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무리일까.


지금 생각으로는 천년만년 살 것 같다.  그래서 아등바등 산다. 장례식장을 가면 누구나 말한다.

"이렇게 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아등바등 사나?"

그리고 다음날 출근하면 똑같이 아등바등 살아간다.


올해 시월에 종합건강검진을 할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 보리라.  잠들지 않고 버텨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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