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3일 >>>
2019년 여름, 우리 교회는 1박2일로 순례사경회를 갔다. 충남 보령시 소재 서해의 섬 고대도. 1832년, 개신교 출신 최초의 한반도 선교사 귀츨라프가 발을 내디뎠던 곳. 감자 종자와 한문성경도 전하고,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한글을 배워 주기도문도 번역해 주었던 섬. 어른들은 그런 귀츨라프의 발자취를 기리려, 아이들을 물놀이를 즐기려, 총 50명 정도가 방문했다.
종일 지친 해가 시원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려 할 즈음, 우리는 배에서 내려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현지 교회를 방문했다가 다시 숙소로 갔다. “순례”의 정신에 걸맞은 소박한 민박집, 취침에 관한 지침도 간단명료했다. 드르륵 미닫이 문 안쪽에는 여성들, 바깥쪽 마루에는 남자 교인들, 각자 가로로 세로로 공간을 확보, 알아서 자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 싱크대 입구 쪽에 몸을 뻗었다. 그리고는 쉽게 잠을 못 이루던 중, 귓가에 모기만 한 “여보!”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보니까 아내가 베개를 들고 엉거주춤 서서, 방 안에는 누가 코를 골아서 도저히 못 자겠다, 여기 당신 옆에 냉장고 앞에서라도 자야겠다고 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고 아내 쪽으로 돌아누워 다시 눈을 감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여보, 여기도 냉장고 소리하고 음식 냄새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어요. 우리 베개 들고 아까 그 예배당에 가서 자는 건 어때요?” 아내의 속삭임이었다. 교회 다니면서 개과천선하고 100% 순종을 모토로 살던 나는 즉각, 두말없이 아내를 따라나섰다. 사실은 나도 잠을 설치고 있던 터였다. 가슴에는 각각 커다란 베개가 하나씩 안겨져 있었다.
시계가 몇 시인지도 몰랐다. 오로지 날샐 때까지 잠 좀 푹 잤으면 하는 일념으로 우리는 4백 미터를 걸어 간밤의 그 예배당으로 숨어들었다. 누가 교회를 영혼의 안식처라 했나? 긴 예배의자에 한 다리는 뻗고 한 다리는 걸치니 세상에 그만한 “육신의 안식처”가 또 없었다. 온 몸이 스르르 가라앉는 듯, 거기가 곧 천국이었다. 바글바글 저 난민수용소를 생각하면 성가신 모기들도 흔쾌히 다 용서가 됐다. 탁월한 우리의 선택을 한참 조잘조잘 자축하다 비몽사몽 막 단잠에 빠져드는 순간, 짤깍, 불이 켜졌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는 그분, 우리의 방자한 행태가 얼마나 민망하셨으면 그처럼 황급히 사람을 보내셨을까? 칠흑 같은 어둠에 새벽기도를 1등으로 오신 분이었다.
또다시 베개를 끌어안고 도망치다시피 교회를 빠져나온 우리는 영락없는 문제청소년 신세. 간밤에 탈출한 그 수용소를 결국 제 발로 다시 들어가 각자 마지막 자투리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이번엔 우리 교인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夏至)가 가까운 6월6일 현충일에 맞춰 짠 여정이라, 이른 시각에 벌써 훤하게 날이 밝고 있는 것이었다. 전날 어두워져서 섬 경치를 하나도 못 봤던 탓인지, 겨우 다섯 시 반인데 숙소는 거의 텅 비어 가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은 못 누워 있고 천근 같은 눈을 비비며 사람들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아내를 깨우지는 않았다.
수술을 받아 한 쪽 갑상선이 없는 아내는, “맛있는 아침 잠”이 특별히 소중한 사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내가 푹 자고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오니 문(文), 윤(尹), 서(徐), 최고참 남자 집사님 세 분만 소파에 앉아 계셨다. 아내보다 15~20세 더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다. “차집사, 어디 가?” 평소 절친한 문집사님께서 물어보셨고, 아내는 엉겁결에 “네, 밖에 좀 나가는데요, 말할 사람이 없어서.”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문집사님께서 “뭐, 말할 사람이 없어? 그럼 우린 뭐야? 우리는 사람 아니야?” 하고 농담을 하셨고, “호호, 그게 아니라……” 아내가 미처 변명할 겨를도 없이 그 집 마루는 하하하, 호호호, 온통 웃음바다로 변했다.
우리 부부는 그간 이 고대도 이야기를 아마 3, 40번은 족히 했을 것이다. 밤새 잠을 못 자 고생한 만큼 더욱 기억에 남았고, 다소 실언한 만큼 두고두고 재미난 얘깃거리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할 사람” 부분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아예 말도 모르는 땅에 와서 단시간에 말을 배우면서까지 “말할 사람”에 목말라헸던 귀츨라프. 아침에 눈뜨자마자 밥도 찾기 전에 “말할 사람”을 찾아 나서던 아내. 이에 비해, “말할 사람”이 없음이 내 삶의 가장 큰 고통이라며 세상을 멀리 했던 나. 생각해 보니 그들이 옳고 내가 잘못된 것이었다. 말할 사람은 만들어 내고 찾아 나서는 것. 따라서 나의 그 고통은 누구도 아닌 무능하고 게으른 나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그렇게 발길 닿는 곳마다 말을 배우고 말할 사람을 만들어, 일평생 원도 한도 없이 복음을 전했으리라. 아내도 옆에서 보면 2, 30명의 “말할 사람”들과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나누고 소통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나의 남은 생에도 과연 그런 일들이 가능할까? 오늘도 여느 날처럼 내겐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광고 전화, 잘못 걸린 전화 벨만 가끔 울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