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
교회는 거룩한, 또는 최소한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그들의 결혼 스토리 또한 거룩하다. 특히 목사님, 선교사님 부부 같은 분들 사이에는 각자 2~3년 간절한 기도 끝에 서로를 짝으로 허락받았다는 간증이 허다하다. 우리 부부는 밥 먹을 때 기도도 안 하는 엉터리들이라, 그런 얘기를 들으면 영 실감이 안 난다. 최근에도 한 번 겪었지만,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하고 그런 분들이 거꾸로 물어 오시면 참 난감하다. 전혀 교회에 안 어울리는, 이 분위기 깨는 얘기를 꼭 해야 하나…… 우린 서로 눈빛으로 텔레파시를 보낸다. 대개의 경우 내가 대답한다. “네, 죄송한데 저희는 고스톱 판에서 만났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1983년5월5일, 내가 제대하고 복학해서 살던 신림동 하숙방에서, 낡은 군용 담요 위에 화투를 펼쳐 놓고 생애 첫 대면을 했다. 여자대학 기숙사생 4명 대(對) 하숙집 남학생 5명, “춘계 고스톱 대결”에서 만난 것이다. 내가 친척 여동생을 통해 주선한 친선경기였다. 처음에 두 편으로 나눠서 시작했다가, 돈을 딴 사람들끼리 다시 붙어 총 서너 시간 혈투 끝에 내가 다 땄다. 그리고는 근사하게 한 상 늦은 점심을 샀다. 첫 만남부터 시작된 “비(非)거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 우린 결혼하고 신혼 때에도 이불 위에서 고스톱을 쳤다. 물론 아내는 내 적수가 못 되었다. 그 때 종합상사 내 월급이 26만원인가 했는데, 하루는 돈을 많이 잃은 아내가 월급봉투째 들고 나와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서 아내한테 “짤짤이”를 한번 해 보자, 그걸 하면 고스톱에 비해 훨씬 더 빨리 만회할 수 있다고 했다.
아내에게도 그날 가르쳐 줬지만, 짤짤이는 도박 이전에 매우 건전한 “수학 게임”이다. 모든 자연수는 3으로 나누면 나머지가 1, 2, 또는 0이다. 그런데 나누어 떨어져서 나머지가 0 된다는 것은 나머지가 3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그 남은 3을 다시 3으로 나누면 나머지가 0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짤짤이는 결국 상대방이 손에 쥔 구슬의 개수를 3으로 나누었을 때 그 나머지가 1이냐, 2냐, 3이냐를 맞히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1 짚고 3 갔다” 하면, “나머지가 1이면 내가 따고, 3이면 비기고, 2면 네가 먹어라”는 뜻이다. 그것을 줄여 “일삼(13)” 이렇게 말한다. 수학적으로 공평한 게임이다. 왜냐하면 매번 한 쪽이 구슬을 쥘 때마다 그 “쥐는” 쪽이 이길 확률이 3분의 1, 그 상대 “가는” 쪽이 이길 확률이 3분의 1, 또 비길 확률이 3분의 1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가령 “일삼(13)”을 갈까? 상대의 구슬 쥔 손을 가만히 “읽어” 봤을 때, 그 개수가 7개일 공산이 제일 커 보이고, 만일 그게 아니라면 6개일 것 같고, 상대적으로 5개나 8개일 확률은 낮아 보인다 하자. 이럴 때 7 나누기 3 하면 나머지가 1이니 우선적으로 “1을 짚어(확보해)” 놓고, 다음으로 6을 3으로 나눈 나머지인 “3을 차선으로” 선택, 그 두 숫자 1과 3으로 “일삼(13)”을 가는 것이다. 간단한 이치라 아내는 금방 다 이해했고,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과연 짤짤이는 길어야 한 판에 10초, “훨씬 빠른 만회”에 혹했던 아내는 “훨씬 빠른 추락”에 당황했고, 급기야 힘 한번 못 써 보고 월급을 홀빡 다 털렸다. 내가 짤짤이 선수라는 말을 친구들한테서 들었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으리라. 원래부터 남편보다 돈을 훨씬 더 좋아했던 아내는 상기된 얼굴로 판돈을 확 다 쓸어 안아 갔고, 그 후로 근 40년, 우린 다시는 짤짤이를 안 했다.
나는 어릴 때 부산 동래에 살았다. 동래초등학교에서 하교 후 남쪽으로 동래시장 한길을 쭉 내려가다가 왼편 큰길로 꺾으면 동래고등학교 가는 길, 조금 더 내려가서 이발소 옆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거기가 우리집 있는 골목이었다. 그 골목이 얼마나 복잡한 미로였으면 아마 총 길이가 1km쯤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긴 골목에는 구슬을 갖고 노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3학년 때 거기로 이사간 이후, 구슬이란 구슬은 보이는 족족 내가 짤짤이로 다 따 버렸으니까. 그래서 주말에는 종종 명륜동, 온천장, 장전동까지 원정을 갔고, 한 번도 패하고 돌아온 적이 없었다. 구슬을 다 잃으면 나이 많은 형들은 돈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나는 1원에 5개, 기분 좋으면 10개, 늘 후하게 쳐서 바꿔줬다. 그리고 결국은 도로 다 따 가지고 왔다. 조그만 사업이었지만, 스스로 용돈 벌어 쓰는 재미가 쏠쏠했다.
구슬이 자꾸 불어나자 집안 온데 처치 곤란이라, 큰 연탄 아궁이에 다 쏟아 부어 놨던 기억이 난다. “이제 중학교 들어가면 공부해야 된다”며 사촌 동생 한 명에게 물려줬던 그 구슬들이 고무 다라이 두 개나 됐던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초능력자도 아닌 내가 장기적인 기대수익이 0인 “공평한” 게임에서 어떻게 그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가령 짤짤이 대신 동전 던지기를 했어도 나는 똑같이 잘 했을까?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No!”다. 왜냐하면 동전은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어느 쪽으로 기울지 전혀 가늠이 안 되니까. 따라서 상대방이나 나나 팔짱 끼고 그 결과를 100% 운(運)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짤짤이는 달랐다. 일견 모든 게 운(運)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얼마든지 실력(實力)이 운(運)을 대체할 수 있었다. 요는 그 사실을 간파하고 나처럼 그 “실력”을 연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처럼 일찍 정곡을 찔렀는지는 솔직히 나도 의문이다. 하지만 “아, 짤짤이, 이렇게 하면 되네!” 하는 깨달음이 나는 입문과 동시에 왔고, 그 덕분에 6학년 말 “은퇴”시까지 한 번도 슬럼프가 없었다. 우선 내가 “쥘” 때부터 보면, 덩치에 비해 손발이 비교적 컸던 나는 최대 23~4개까지 항상 개수를 되도록 많이 쥐었다. 상대가 무작위로 안 가고 내 손을 “읽을” 경우에 대비, “가능한 한 잘 못 읽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이 “32” “13” 등등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갔지 특별히 내 손을 “읽고서” 간다고 느껴졌던 상대는 없었다. 따라서 내가 쥘 때는 굳이 많은 개수를 안 쥐어도 어차피 50대50, 운(運)이 좌우하는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나머지 절반, 즉 내가 “갈” 경우를 이를테면 60대40 같은 유리한 게임으로 만들면 되는데, 거기엔 예리한 청각과 시각, 정확한 확률계산, 최적의 베팅(betting)이 요구됐다.
구슬을 “쥘” 때는 양손에 구슬을 넣고 짤짤 흔들다가 “쨕” 하고 나눈 뒤 한 손을 내민다. 그 손에 몇 개가 들었나 짐작하는 데엔 그 “쨕” 소리가 우선 중요하다. 왜냐하면 6, 7, 8개 등 적게 쥘 때는 그 소리의 경쾌/둔탁한 정도가 거의 그 개수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 번을 쥐고 가고 해 본 내 귀에는 적어도 그랬다. 잘 듣고 나면, 잘 “봐야” 하는데, 이때 키포인트는 구슬 쥔 주먹의 모양과 크기, 둘째/셋째 정권(正拳)이 불거져 나온 정도, 푸르스름한 손등 핏줄의 선명도다. 초등학생 조막손이 기껏 쥐어야 18~9개. 따라서 세심한 관찰은 그런 한계 안에서 예를 들어 개수를 9~10, 또는 13~14개로 최대한 압축해 준다. 그러면 확신의 정도에 따라 나름 확률을 산정, 적정 개수를 베팅하면 된다. 나중에 커서야 비로소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베팅법임을 이론으로 깨쳤지만, 아무튼 나는 확률이 높다고 판단될수록, 많이 땄을 때일수록 더 많이 베팅했다. 매번 이 모든 관찰로부터 베팅에까지 소요된 시간은 단 1초, 나는 “이성적 판단이 본능으로” 화(化)할 정도로 짤짤이를 했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유리구슬이 오가는 “아이들 도박”이었지만, 짤짤이 세계에도 엄연히 법도라는 게 있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총잡이도 등뒤에서는 총을 안 쐈듯이, 짤짤이에서도 구슬을 “뒤로 쥐는” 법은 없었다. 등뒤에서 꼼지락꼼지락 몇 개를 쥔 뒤 조용히 한 손을 내미는, 소위 “꼼수 쥐는” 비겁 행위가 용인되고 행해졌다면 내 짤짤이 신화는 원천 불가능했을 것이다. 집중력/관찰력이 남달랐던 내겐 “모든 것을 다 듣고 볼 수 있었으매” 그것이 천혜(天惠)의 게임이었던 것이다. 유학 마치고 귀국하여 몸을 담아 보니, 선물/옵션시장 또한 이름만 근사했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온갖 뉴스니 수치들이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중에 이론상 잃고 딸 확률은 50대50. 하지만 면밀히 관찰해 보면 그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여유롭게 싸움을 즐길 수 있는 곳. 감사하게도 짤짤이 은퇴로부터 25년 세월 뒤에 또 다른 “천혜(天惠)의 도박”이 내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내가 선물(先物) 시장에서 선전(善戰)했던 것은 경제학박사였기 때문이 아니고 짤짤이 박사였기 때문이다. 잡다한 지식/정보는 멀리한 채, 오로지 짤짤이에서 손을 읽듯이 시장에서 가격변동을 읽었고, 짤짤이 베팅을 했던 꼭 바로 그 원리를 선물에 적용한 덕이었다. 세상만사 원리는 매한가지, 결국 어릴 적 구슬놀이의 지혜로 자식들 고등학교, 아내의 미술대학원 공부를 다 미국 명문(名門)에서 시켰다. 이 선물(先物) 사업을 크게 벌이고자 2002년에 회사를 차렸던 것이 실책, 월 4, 5천만 원의 경비에 눌려 3년 만에 접었다. “경영”에 실패했지 “읽기”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심리적으로 흔들리면서 잠시 읽기가 흐려진 때는 있었다. 바로 그 회사를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복안을 얼마 전 딸한테 얘기했다가 무안만 당했다.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한마디 대꾸도 질문도 없이 바쁘다며 나가 버렸다. 반응이 차가울수록 최후 승리는 더욱 값질 것, 언젠가는 딸도 아내도 세상도 모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리라. 이 “한칼”을 품었기에 지난 20년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다.
나 비록 이룬 것은 없으나 오직 한 생각만 하며 살았다. 자식 회사의 녹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재기하나……” 하루도 이 궁리를 멈춘 날이 없었다. 그때는 벌어서 처자식 공부를 시켰고, 남은 인생엔 벌어서 남을 위해 할 일이 있다. 그 옛날 그 짤짤이의 투혼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불사를 꿈이 남아 오늘도 갈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