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
“추리닝”은 영어의 트레이닝(training)에서 유래된 엄연한 표준어다. 사전을 보면 “운동이나 야외 활동을 할 때 편하게 입는 옷”이라 돼 있다. 그런데 나의 사전에는 그 정의가 사뭇 다르다. “하루 24시간, 일년 사시사철, 자나깨나 입는 옷”이다. 더울 땐 아랫도리 걷어 입고, 추울 땐 상의 지퍼 올려 입고, 잘 때 입어도 되고, 깨면 바로 액션이 되고, 더러워지면 쓱쓱 빨아 입고, 또 굳이 안 빨아도 별 표 안 나는, 내겐 세상 최고의 옷이 추리닝이다. 흡사 샌프란시스코 길가의 노숙자 같다며 아내가 길 가다가 놀리며 사진을 찍기도 했었고, 고급백화점 Westfield Mall에선 나를 수상하게 여긴 사복경비원과 실랑이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2022년 8월, 그날도 나는 아내의 명(命)을 받잡고 딸네 집을 나섰다. 추리닝 바지에 티셔츠, 등에는 후줄근한 배낭, 허리춤에는 전대, 다 낡은 모자에 때 묻은 운동화, 전형적인 내 외출 복장이었다. 손에 든 지령문서는 다음과 같았다. 쪽파 3묶음, 대파 1, 마늘(깐 것 선호), 애호박 1, 양파 2(흰색 크고 납작한 것), 고추장 1통(중간 사이즈), 감자 작고 둥근 것 5~6개, 참기름 1병, 당면, 신라면 3개. 정확히 지시대로 안 사 오면 아무리 먼 길도 가차없이 되돌려 보내는 냉혈의 아내, 따라서 품목 하나하나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매우 중요했다. 혹 잘못 받아 적은 것은 없는지 늘 꼼꼼하게 챙기고 되물어야 경험상 두 번 걸음을 안 했다.
그 때 우리가 살던 그 Oak Street에서 Fillmore Street를 북쪽으로 꺾으면 1.5키로쯤이 Japan Town, 언덕 너머 2키로 더 가서 있는 North Beach의 왼편이 그 유명한 금문교다. 그 Japan Town 가기 조금 전에 한국식품점이 있는데, 가까워서 늘 가긴 해도 갈 때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가 않았다. 주로 계산대를 보는 내 나이쯤의 한국 여성이 내게 영어만 썼기 때문이다. 다른 아시아인들이 많아도 한국 사람은 99% 서로 알아보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아는 체를 안 했다. 반갑게 “안녕하세요?”를 하는 젊고 예쁜 여성이 가끔 교대하므로 그날도 기대를 했으나, 입구를 들어서는 나의 오른편 눈가엔 여지없이 무서운 그녀가 비쳤다.
쪽지의 모든 품목을 다 고른 나는 줄을 섰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바구니에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계산대에 놓고 있는데, 뭔가 멈칫하는 느낌에 나 역시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1년 여의 긴 침묵을 깨고 그녀가 건넨 첫 한국말, “그거 비싼 건데요?” 급히 내려다본 내 손에는 날씬한 참기름 병이 들려 있었다. 하하하…… 맞는 말이었다. 그건 경상도 말로 “억수로” 비싼 참기름이었다. 그 가게에 참기름이 열댓 종류 있다, 그 중 유독 비싼 게 있다, 가격만 보면 세 배쯤 하는데 양이 적은 걸 고려하면 다섯 배는 한다, 그래도 “꼭, 반드시” 다른 거 말고 그걸 사 오라고 “특별히 힘주어” 하명하셨던 바로 그 참기름이었다.
남루해 뵈는 내 행색에는 가당찮은 그 비싼 참기름을 보고 기가 막혔던 그녀, 환불이니 교환이니 하며 다시 올 것이 분명하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당장 싼 걸로 바꿔 오라는 눈치의 그녀, 그 오만한 “계산대의 베테랑”이 혹여 무안해할까 봐 나는 “아, 네, 음…… 그냥 이걸로 하께요.” 하고는 계산을 다 마쳤다. 저녁 상에서 그 얘길 했고, 아내도 사위도 딸도 모두 배꼽을 쥐고 깔깔깔 웃었다. 두 달 뒤, 우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 고된 육아도우미/식모/기사/머슴 생활을 또 다 잊은 채, 경기도 광주 우리 전셋집에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나기엔 너무나 평범한 하루가 저물고 있는 참이었다.
그 때 “여보!” 하는 호출에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낮에 잘 먹었으니까 저녁엔 그냥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서 간단하게 먹어요. 다른 건 다 있는데 두부가 없으니까 요 아래 마트에 가서 두 부 한 모만 사 오세요.” 단일 품목이라 지시가 끝났나 싶던 순간, 진짜 중요한 건 이어지는 “단서”였다. 단, 꼭 “P사(社)” 제품을 사라, 절대 다른 건 안 된다, 가격이 서너 배 비싸도 꼭 그거라야 한다, 하며 평소 싸고 많은 것을 선호하는 내게 아내는 경계에 또 경계를 잊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가서 보니 다른 두부들은 다 큼직한 게 천 얼마밖에 안 하는데, 지시한 그 제품은 4천4백원이나 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하나를 꺼내 들고 계산대로 갔다.
두부가 미처 계산대에 놓이기도 전, 꿈처럼 내 귓전을 울린 소리, “그거 비싼 건데요?” 엥? 하하하…… 수만 리 태평양을 건너 마치 copy-paste 해 온 듯 100% 정확히 일치하는 일곱 글자의 그 문장, 그 억양, 그 어감, 그 암시…... 와, 기적이다! 보니 그 주인 아저씨 또한 내 또래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외모로 사람 값을 매기고 돈으로 사람의 격을 정하는 지극히 불건강한 시대를 같이 살았으리라. 그리고 나의 값은 4천4백원도 안 돼 보였으리라. 이번에도 나는 모른 체하고 “아, 네, 그냥 이거 하께요.” 하며 돈을 냈다. 그날도 우리는 그 코미디 같은 기적의 반찬 “그거 비싼 건데요?”를 잘근잘근 씹으며 즐겁게 저녁 한 끼를 때웠다.
어머니는 “개도 손 볼 날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내가 늘 옷을 그냥 집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입어서 그러셨을 것이다. 잠시 산보를 가셔도 단정한 차림에 예외가 없으셨고, 평생 멋쟁이 소리를 들으며 사셨던 부모님께 죄송스럽다. 한 번은 날이 더워 반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었는데, 성격상 양말을 접지는 못하고 끝까지 당겨 올렸더니 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됐다. 평소 패션에 민감한 아내와 아들이 킥킥거리며 흉을 봤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내가 말했다. “여보, 도근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전에 당신이 했던 그 이상한 복장이 올해 뉴욕에서 대유행이래요.” 하하, 그것은 내 복장에 관한 내 생애 최고의 찬사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