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
나는 1980년12월에 입대해서 1983년2월에 제대하고 곧바로 3월에 복학했다. 고등학교 3년은 내내 앉아서 공부만 했고, 대학교 3학년 1학기까지는 흉흉한 시국에 안개 속을 헤맸고, 군대 2년3개월은 꼼짝없이 울타리 속에 붙잡혀 있었고, 이제 그 다음 운명은 나도 몰랐다. 신림동 하숙집에 방을 하나 얻어 들어가 보니 내가 최고참이었다. 각과 각지 출신 여러 졸병들 중에는 금속공학과 3학년 내 동생도 있었고, 지 고교동창 절친도 한 명 있었다. 김병장, 김병장 하고 불리며 살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이제는 매일 형, 형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된 것이었다.
그 때는 해외유학이 대세라 나도 미국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뒷바라지를 약속하셨으므로 나는 남은 3학기를 일단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다. 고등학교 시절 “단 한 순간도” 안 쉬고 공부하던 때를 생각하면 공부다운 공부를 무려 5년이나 쉬었으므로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복학 첫 학기를 총력돌진하고 있는데 하숙집에 약간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동생의 절친이라는 그 후배가 줄곧 의기소침해 있는가 싶더니 어느 날 동생과 함께 내 방을 찾아왔다. 사연인즉슨, “학사경고”를 그 이전 학기에 받았는데, 계속 공부가 손에 안 잡혀 아무래도 한 번 더 받을 것 같고, 따라서 그 학기가 끝나면 퇴학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인가? 서울대를, 그것도 최고 점수의 학과를 들어왔으면 이미 그 재주는 검증된 것이고, 좀 놀다가 한 번 그런 경고를 받았다 해도 이제 안 놀고 공부만 하면 얼마든지 만회되는 일 아닌가? 설사 한 번에 크게 만회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이번 학기에 재차 학사경고는 안 받을 정도로만 하면 되지 않는가? 퇴학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는 준엄한 분대장의 목청으로 강력히 그 나태함, 나약함을 꾸짖고 분발을 독려했다. 하지만 표정을 보나 대답을 보나 뭔가 석연치 않았고, 안타깝게도 가을학기부터는 그 후배의 모습을 더 이상 그 하숙집에서 볼 수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05년 12월, 집사람이 영문 편지 한 통을 내밀며 말했다. “여보, 그저께 도근이한테서 전화가 와서, 학교에서 편지 한 통이 올 텐데 별 것 아니니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했어요. 이게 그거 같은데 그래도 한번 읽어나 보세요.” 그 때 도근이는 미국 보스턴 소재의 명문 밀턴 아카데미(Milton Academy) 9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막 마친 것이었다. 미국에서 “부모의 평균학력”이 제일 높은, 즉 하버드나 MIT 같은 명문대 교수님을 부모로 둔 학생들이 아주 많은, “미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고등학교”를 우리 도근이가 들어가서 첫 한 학기를 끝낸 것이었다.
편지를 뜯어 보니 맨 위에 제목이 “Academic Warning”이었다. 영어로 warning은 우리말로 “경고”라는 뜻이니 뭘 좀 조심해 달라는 가벼운 부탁의 편지인가? 그런데 그 앞에 붙은 academic은 뭐지? 사전적 의미로는 “학업의, 학문의, 학사(學事)의” 등이 있는데...... 음...... 뭘까...... 아하! 엥? 서양말로 데자뷰(déjà vu)라 하던가, 순간 22년 전 그 까마득한 신림동 하숙방의 전설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듯 나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아! 그래, 맞다, 학사경고! 이게 바로 그거네! 한 번은 점잖게 말로 하지만 두 번째는 가차없이 엉덩이를 발로 차 내쫓는 학사경고! 바로 그 무시무시한 최후통첩이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이었다.
당장 전화해 보라며 난리법석을 떤 끝에 얻어 낸 소식은 이것이었다. 엄마 옆에 편하게 살다가 난생 처음 기숙사 생활을 하니 좀 힘들었다, 늦잠 자다가 아침 첫 수업에 지각도 여러 번 하여 출석에서 감점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C학점도 두세 개 받았다, 그리고 만일 남은 3년 반 동안 어느 과목에서든 단 한 번이라도 또 C가 나오면 퇴학이다, 그러나 염려 마시라, 절대 퇴학 같은 것은 안 당하니 나를 믿어 달라, 하는 것이었다. SSAT 점수가 100점 만점이 아니면 학생들이 감히 지원조차 꺼리는 동부의 명문고 밀턴에 겨우 83점으로 원서를 내밀고 당당히 합격을 받아 냈던 우리 도근이. 그 놀라운 신화가 이처럼 짧게 막을 내리나?
옛날 그 후배는 실력이 충분했으나 잠시 슬럼프를 겪었던 반면, 도근이는 근본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미술이 좋고 공부는 싫다던 놈이 공부만 죽도록 시키는 학교를 갔으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게 아닌가...... 전혀 예상 못했던 뜻밖의 번민 속에 한 번, 두 번, 학기중/학기말 리포트가 날아왔다. B, B-, B-, B+, B, B+, B-…… 황급하게 훑어 보는 성적표 왼편 끝에서 오른편 끝까지 C는 어디에도, 한 번도 없었다. 물론 A도 없었다. 나는 못 봤지만, 아내의 말로 수학은 어쩌다 한 번씩 A가 나왔다 했다. 집안 DNA 탓인지 도근이 자신도 “다른 과목은 몰라도 수학은 A 못 받으면 화가 난다”고 했다 하니, 그 “아주 가끔”의 A는 인력으로는 어찌 안 되는 운명 같은 것이었으리라.
열심히 해 봐야 크게 써먹을 데도 없는 공부, 내 진짜 좋아하는 미술을 하는 데에 괜히 시간만 뺏는 공부, 그러나 우습게 봤다간 부모님을 실망시키며 학교에서 쫓겨날 판인 공부, 그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공부”를 슬기롭게 잘 다스려 낸 도근이. 그는 학사경고를 받은 후 7학기를 줄곧 “all-B”로 이끄는 기적을 보여 줬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지혜였고, 실력을 뛰어넘는 예술이었다. 그리고는 틈틈이 미술을 하여 지금은 그 살기 힘든 뉴욕에서 혈혈단신 자립, 유명 광고기획사의 Art Director로 일하고 있다. all-A는 훌륭하지만 살벌하고 밋밋하다. all-B가 보다 인간적이고 여유롭고 또 익사이팅하다. 성적표에는 A가 없어도, 우리 도근이가 최고 A+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