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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칠공주

by 김지민

2024년 4월 23일 >>>


나는 1986년 8월에 미국 유학을 가서, 공부 마치고 직장생활 하다가 1996년 1월에 귀국했다. 내가 시카고에서 서울로 오던 그날, 아내와 딸과 아들은 같은 공항에서 뉴저지로 날아갔다. 그때는 몰랐는데, 하하, 지나서 보니 그것이 바로 내 “기러기 인생” 첫 날이었다. 그리고는 3년 반이 흐른 1999년 여름, 남편 없는 미국생활이 힘들었던지 아내도 아이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국 간 지 총 13년 만에 일단 전원 철수한 셈이었다. 도근이는 미국서 태어난 덕에 오자마자 외국인학교에 들어갔고, 지 누나 수연이는 그냥 중학교 2학년에 입학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바쁜 직장생활로 정신이 없던 터에 또 해가 바뀌어 2000년 2월. 서울에 사는 동생, 사촌동생들, 제수씨들, 조카들 해서 약 20명이 포천 이동갈비를 먹으러 가게 됐다. 초행이라 앞서 가는 동생 차 하나를 열심히 뒤따라가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수연이 친구 전화였다. 한국 온 지 한 학기밖에 안 되는 완전 이방인 수연이. 학교 적응이 빨라 선도부장도 맡았고, 공부도 금방 상위권에 들었다는 얘길 나는 아내한테서 듣고 있었다. 개학이 며칠 안 남았는데 누가 전화를 했을까 하며 나는 본의 아니게 그 대화를 엿듣게 됐다.


처음 몇 마디, 그리고 또 몇 마디 더, 그리고는 마침내 5분 가량의 대화를 다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진짜 내 딸 수연이가 맞나? 나서부터 어느 한 구석 입댈 데가 없이 착하고 똑똑하기만 하던 애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무슨 친구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학교 칠공주 중의 한 명이라고 했다. 학교마다 노터치(NT: No Touch)니 칠공주니 하는 뒷골목 써클이 있지만, 내 자식을 그런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바로 "나의 딸"이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아무 거리낌없이 저속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자식들이 어떻게 크는지 하나도 몰랐다. 유학 중에는 공부한다고, 직장 잡고는 일한다고, 기러기 시절에는 못 보니까, 또 나중에는 돈 번다는 핑계로, 자식들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한 자식 인생의 한 단면이 그처럼 쇠망치로 나를 쳤다. 나는 즉각 “Go back to America!”를 선언했고, 이튿날부터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 학교든 SSAT 성적은 기본적으로 볼 것이니 수연이는 일단 시험준비 모드로 들어갔다. 나는 한국에 마침 와 계시던 나의 선물(先物) 투자 스승 키퍼(Keefer)씨, 제인(Jain)씨의 도움으로 지원할 학교들 물색에 나섰다.


미국 학교들은 대체로 9월에 개학하는데, 그해에 입학하려면 1년 전부터 준비, 2월까지는 서류제출을 마쳐야 한다. 한국과 달리 초등학교가 1~5학년, 중학교가 6~8학년, 고등학교가 9~12학년이므로 수연이는 딱 고등학교에 지원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미 그 2월 데드라인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고, 우리는 하나도 준비가 안 된 상태. 일견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 귀한 딸을 1년 더 그런 곳에 둘 수는 없었다. 맹모가 세 번 이사를 했다면, 나는 “단번에” 지구 저 반대편으로 딸을 보내고야 말 것이었다.


돌아보면 그날의 그 칠공주 전화가 평생 수천 수만 통의 전화 중 최고로 값진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딸 친구 전화가 아닌 “하늘의 긴급 전령”이었다. 모든 것이 늦었고 미비했고 불확실했음에도, 수연이는 몇 달 뒤 버지니아 주의 전통 있는 명문여고 머디어라(Madeira)에 입학했다. 그 학교 신입생 입학 담당교사는 수연이와의 인터뷰 직후, “우리가 원하는 학생이 바로 이 Sue와 같은 인재”라며 미리 합격을 암시해 줬었다. 이듬해에는 도근이도 지 엄마와 함께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다시 기러기 아빠가 됐고, 우리 가족은 한참 뒤에 국적마저 미국인으로 다 바뀌었다.


그 “운명의” 이동갈비를 얼마 전 다녀왔다. 한산했지만 먼 길이었고, 갈비가 특별히 더 낫지도 싸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푸짐하게 한 상 주문했고, 그 옛날 그 미국행 결정을 한껏 자축했다. 한편으론 두려운 생각도 든다. 1986년에도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6월말에 그만두고 곧바로 8월초 미국 유학을 갔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는 질문 하나에, 바로 그 다음 날 사직서를 냈던 것이다. 앞뒤 안 가리고 불쑥불쑥 내린 것 같은 생(生)의 주요 결정들이, 누군가의 은밀한 계획이었음을 절감한다. 나는 그런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항상 중심 잡고 올바른 길을 가려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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