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딱 한 번 예외

by 김지민

2024년 8월 16일 >>>


애들이 각각 자립하여 미국 살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하다 보면, “자식들 잘 키웠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나는 극구 아니라며 손을 젓는데, 그것은 겸양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자식은 방목(放牧)”, 나는 애들이 나기도 전부터 그렇게 선언했고, 태어난 후엔 진짜로 자유롭게 “방목”했다. 잘 하면 칭찬은 할지언정, 잔소리나 꾸중은 물론, 어떤 참견도 충고도 점검도 확인도 설교도 안 했다. 기러기 아빠를 오래 하여 솔직히 그럴 기회가 적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을 키운, 또는 교육한, 공이 있다면 그것은 100% 온전히 아내의 것이다. 내가 자식 교육에 유일하게 기여한 바는, “아무 것도 안 한 것”이다.


나는 앞뒤가 꽉꽉 막혀 융통성이 없지만, 감사하게도 하늘이 공부하는 재주를 주셨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의 기대도 그랬고 나 자신도 그랬고, 공부는 꼭 1등이어야 했다. 아주 간혹 2등을 하면, 1등을 되찾을 때까지 한 달 내내 눈치도 뵈고, 스스로도 기가 죽고, 마냥 어두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1등을 뺏어 봐야 그것은 그저 “일상의 회복”이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도 아니고, 늘 걷던 놈이 또 걷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상태로 쭉 가면 오케이, 아니면 또 흑암에 묻히는, “기껏 잘해 봐야 본전”인 삶이었다. 그런 “불행(不幸)”의 대물림이 싫어, 나는 자식들에게 공부에 대해선 특별히 더더욱 함구했다. 그런데 곁에서 지켜본즉, 설사 내가 공부니 성적이니 “따지는” 부모였다 해도, 어차피 그런 단어들은 입에 안 올렸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딸은 공부를 “알아서 잘 하니” 말이 필요 없고, 아들은 “알아서 안 하니” 백 마디 말이 다 불필요했으니까. 이래저래 우리 자식들은 “공부”에 관한 한은 세상 어느 아이들보다 “자유함” 속에 살았다. 그래서인지 둘 다 대학도 3년, 2년 다니다 중퇴했다.


사실 나는 두 아이의 “공부”를 전혀 다그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기러기 아빠 시절 --- 아들놈 초/중학교 시절 --- 우리 농담이 그 증거다. 방학 때 한국에서, 또는 거꾸로 내가 미국 갔을 때, 밥상머리에 앉으면 으레 내가 말한다. “도근아, 밥이라도 마이 무~라(많이 먹어라). 뭐도 못하는데?” 그 아비에 그 아들, 똑같이 싱거운 이 놈이 빙긋이 쪼개며 대답한다. “공부도 못하는데……” 그러면 나는, 그래 맞다,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아빠 봐라, 엄마한테 꼼짝도 못하지 않느냐, 밥 잘 먹고 튼튼한 게 최고다 하며 맞장구를 쳐 준다. 그러던 중에 한 번은 학교 숙제 냈다가 돌려받은 거라며 도근이가 뭘 보여 주는데 내 눈이 번쩍 뜨였다. 한눈에 봐도 그것은 조그만 “작품”이지 흔히 우리가 아는 “숙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숙제”냐고 했더니, 자기는 사회, 과학, 역사, 수학, 무슨 과목 숙제라도 가능하면 다 그처럼 디자인도 넣고, 모형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해서 낸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들마다 “혹시 이거 나 가지면 안 될까?” 하고 물어보셔서, 결국 못 돌려받은 숙제가 많다고 했다. 지 엄마를 닮아 미술을 잘 하는 줄은 알았어도, 그 정도인 줄은 그 날 내 눈으로 보고야 처음 알았다.


그렇게 뉴저지 주(洲)의 밀번(Millburn) 중학교를 졸업, 그 어렵다는 메사추세츠 주(洲) 보스턴의 밀턴(Milton Academy) 고교에 들어간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특출한 면이 있었기에 83점의 낮은 SSAT 점수에도 불구, 그 명문(名門)의 매서운 눈이 합격을 허(許)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그 밀턴을 가서 첫 학기 “학사경고”, 둘째 학기를 “올비(all-B)”로 가까스로 넘긴 도근이는 2006년 여름, 시카고에서 방학을 보내고 보스턴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남은 3년도 학기마다 최소 “올비(all-B)”는 해야 안 쫓겨나는, 그런 부담을 안고 떠나는 길이었다. 그런 아들이 너무 애처로웠을까, 아내와 나는 보스턴까지 1박2일, 차로 데려다 주기로 결정했다. 편도 18시간, 그 긴 운전 중의 한 자락에 내가 불쑥 말했다. 평생 지켰던 “무간섭” 주의에, 평생 딱 한 번의 예외였다. “도근아, 니는 공부하지 마라. 미술 해라.” 내 어법상, 나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그렇게 말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랬더니 도근이는 “미술은 취미로 하는 거고요……” 하며 엄마한테 “세뇌”당한 것이 분명해 뵈는 문장으로 대답을 시도하다 흐지부지 말꼬리를 흐렸다. 각자 한 마디씩, 대화는 막 시작한 듯 곧 끝이 났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간 그 가을학기에 “도근이가 사진(Photography) 수업을 하나 등록했대요.” 하고 아내가 말해 주었다. 그 다음 학기에도 또 무슨 미술 수업들을 신청해 듣는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 얼마 뒤에는 도근이가 보스턴 지역 미술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한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12학년 초, 아내가 더욱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알아주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SAIC: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 유명한 미술대학의 교수 한 분이 리크루트(recruit) 팀을 이끌고 전국을 돌던 중, 보스턴에 가서 도근이의 작품들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편지 한 통을 써 주며, “다른 절차 필요 없이 이 편지만 내밀면 합격시켜 줄 것이니, 졸업하면 꼭 SAIC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근이는 일부 장학금도 받으며 SAIC를 결국 들어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졸 학력에 컴퓨터 그래픽스(computer graphics) 기술로 돈벌이하며 혼자 그림 공부를 하다가, 친구들보다 4년 늦게 입학했다. 입학 당시 학교에 제출한 자기소개서에서, 도근이는 “많은 다른 아시아계 부모님들(Asian parents)과는 달리, 공부하지 말고 미술을 하라고 하신 내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한다.


“딱 한 번” 예외를 발휘한 간섭이었다. 그때 그 차 안에서 그렇게 내 입을 열어 주신 하늘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제 “딱 한 번만 더” 아들딸에게 침묵을 깰 일이 남았다. 그때에도 하늘이 부지중에 입을 열어 주시리.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하루 속히 둘 다 예수 믿어라. 아빠의 유일한 기도요 소망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1. 말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