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8일 >>>
나, 아내, 수연이, 우리 세 사람의 인생에 공히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시니 바로 존함을 “김진형”이라 하는 침술사다. 우리 부부는 “어르신”, 수연이는 “할아버지”라 불렀다. 우리끼리는 “침 할아버지”라 했다. 이 분과 우리는 혈육처럼 가까웠는데, 2008년에 폐기종으로 77년의 생을 마감하시기 바로 전날까지도 --- 그의 외아들은 끝내 모습을 안 보였고 --- 우리 수연이가 내내 그 병상을 지켰다. 언제든 “수연아!” 부르시면 다가가서 손발의 붓기를 가라앉혀 드리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에게서 배운 침술이었다. 덕분에 그 요양병원의 여러 간호사, 요양사들도 한동안 어깨며 목이며 팔다리에 수연이의 공짜 침을 많이 맞았다. 마침내 그가 돌아가시고는, 그의 60여 년 “침 인생”을 함께했던 모든 침술/의학서적, 장/중/단침 등 각종 침, 소독기구 등을 수연이가 다 고인의 유지(遺旨)를 따라 물려받았다. 2010년 시카고에서 IT (Information Technology) 벤쳐를 시작했던 김수연, 불과 그 2년 전에는 서울에서 전혀 다른 업(業)에 몰두해 있었다. 앉혀 놓고, 눕혀 놓고, 엎어 놓고, 갖은 질병의 환자들에게 온갖 침들을 다 놓아 주며 살았다. 스물 두 살의 여대생이었다. 어디 가서 좀처럼 듣기 힘든, 아주 희귀한 이 스토리 뒤에 숨은 사연은 이러하다.
현대증권을 나온 이듬해인 2002년에 “시카고 투자자문(CFIC: Chicago Financial Investment Company)”을 세운 나는, 사업이 잘 안 되자 2004년부터 몸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왼쪽 팔이 내 팔이 아닌 듯, 마치 긴 막대기가 덜렁덜렁 달려 있는 듯, 매우 불편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내 의지와는 무관, 왼손 손가락들도 조금씩 움찔거렸고 입가의 안면근육도 여기저기 씰룩거렸다. 그리고 가벼운 두통으로 머리가 늘 흐릿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꺼림칙했다. 장남이셨던 우리 할아버지도 중풍으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지, 막내 넷째 할아버지도 갑자기 온 뇌경색으로 즉석에서 돌아가셨지, 우리 아버지와 셋째 작은아버지도 중풍을 앓고 계시지, 집안 내력상 내 이상징후들은 모두 중풍 “전조증상”임이 확실했다. 그래도 설마 하며 차일피일 미루던 나는 마침내 어느 날 근처 큰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 봤다. 사진상으로 보이는 의사의 소견은 이상 무(異常無). 내친 김에 그보다 더 큰 아산병원을 가 봤지만 거기도 똑같은 말. 그래서 내가 물었다. “저는 분명 증상이 있는데 선생님은 아무 이상 없다 하시니 참 난감합니다. 병원에는 원래 예방치료 같은 것이 없으니, 이를테면 진짜로 중풍이 딱 걸리면 그 때 다시 오라는 말씀입니까?” 그랬더니 그는 “네, 맞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병원들의 반응을 보건대 “현대의학”에는 기댈 구석이 없었다. 견문 좁은 내가 더 이상 방법을 모르고 있는데, 우리 CFIC의 김부장이 묘안을 내놨다. 주요 일간지 J사(社) 기자들이 단골로 찾아가는 침쟁이가 있으니 같이 한번 가 보자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많은 기자들이 주로 점심시간에 4인1조로 택시를 타고 가서 단체로 후딱 맞고 오는, “무면허”지만 용하기로 소문난 곳이라 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고, 우리는 일과 후 곧장 그 어르신을 찾아갔다.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신 ‘31년 신미(辛未)생. 훤칠하고 깡마른 체구에 단정한 용모. 그 눈빛을 보니 가히 보통 위인이 아니었다. 허튼 짓 하다가는 당장에 혼쭐날 것 같은, 무조건 절대복종을 해야만 될 것 같은, 그런 비범한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었다. 어디가 아프니 어쩌니 긴 사설이 불필요했다. 시키는 대로 똑바로 그를 마주하고 앉자마자, 얼굴, 머리 밑, 목뒤, 어깨 등에 6, 70 개의 침이 순식간에 퍽퍽 갖다 꽂혔다. 약 10cm 되는 --- 침 5 cm, 손잡이 5cm --- 단침들이었다. 이들 침의 원리인즉슨, 예리한 “침” 쪽보다 훨씬 굵고 무거운 “손잡이” 쪽, 이것들이 수십 개나 허공에 찰랑찰랑함으로써 끊임없이 진동을 침 끝으로 전달, 신경을 자극하여 혈액순환을 돕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 경험한 침, 맞을 땐 아프고 불안하고 지옥 같았어도 온데 꽂고 앉아 있으니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침을 하나씩 다 빼시길래 속으로 휴 끝났구나 하는데, 웬걸 “이제 돌아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앞의 침들은 단지 워밍업, 곧 “진짜”가 시작되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 그 어르신 말씀으로는, 내 피 속에는 과도한 지방질과 --- 소위 고지혈증의 원인인 고지질(高脂質)과 --- 많은 노폐물이 섞여 돌아다니므로 그것들을 다 빼내야 된다고 했다. 만일 안 그럴 경우, 그것들이 뇌에 가서 혈관을 막으면 뇌경색, 심장에 가서 막으면 심근경색이 된다는 것이었다. 침은 “살”에 갖다 꽂히는 것인데, 도대체 그것이 “피”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어떻게 제거한다는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절대 꼼짝도 해선 안 된다!” 하고 단단히 경고하신 어르신은 왼손으로 내 왼편 얼굴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내 오른쪽 목뒤를 찌르기 시작하셨다. 좀 전과 같은 하늘하늘한 침이 아니고, 단단하고 짧고 굵은 소위 “수술용” 침. 목뒤 정중앙에서 오른쪽으로 4~5cm, 오른쪽 귓밥에서 좌하(左下) 쪽으로 4~5cm, 대략 거기 어디의 “한 포인트”를 겨냥, 약 10~15초간 침을 좌우로 돌리며 찌르시는 것이었다.
앞서의 그 모든 단침은 손목의 스냅(snap)을 이용, 한 번 탁 찌르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 침은, 목을 통과하는 “기저동맥”이라는 혈관을 찾아 일부러 약간 “생채기”를 내는 침, 따라서 유일하게 피도 조금 나면서 “찌른다”기보다는 “후벼 파는” 느낌이 났다. 매우 위험하고 엽기적인, 사람에 따라선 충분히 거부할 수도 있겠다 싶은 침이었다. 하지만 그 어르신 앞에 앉는 이상은 누구든 꼼짝없는 모르모트. 깊은 혈관에 상처를 냈으니, 그 다음 작업은 거기를 통해 혈액에서 “나쁜 성분들만” 빼내는 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며, 또 어떻게 그런 걸 알아차리셨을까? 지금도 너무 궁금하지만, 아무튼 그걸 도와주는 기구가 있었다. 공기 흡입기가 달린 지름 6~7cm의 반구형(半球型) 투명 용기, 그 원주 부분을 상처 낸 침구멍을 중심하여 목에 꽉 붙이고 공기를 한껏 빨아내면, 자연히 용기는 목에 착 달라붙고 그 압력 때문에 혈관에서 용기로 뭔가 빨려 나오게 되는, 그런 장치였다. 왼쪽 목에도 똑같이 그런 용기가 매달렸고, 40분쯤 더 뒤에야 그날 치료가 다 끝났다. 서서히 쭉 빨려 나온 것은 작고 투명한 두 실린더로 흘러가 고여 있었는데, 노란색 고지질(高脂質)은 위에, 콜타르처럼 끈적끈적한 시커먼 피는 밑에, 뚜렷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섬뜩한 불순물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맑은 선혈이 나올 때까지, 매일 그 침을 맞아야 된다고 하셨다.
최고의 병원도 “사후(事後) 수습”밖엔 길이 없는 중풍. 그것도 온갖 촬영, 검사, 약물/물리치료에도 불구, 결국 완치가 안 돼 불구자로 퇴원하는 중풍. 첨단의학의 그런 부끄러운 “한계”를 훌훌 뛰어넘어 “치료” 이전에 “예방”을 해 주시는 어르신. 내 눈에 그는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닌, 하늘이 병자들 치료를 위해 “특별히 지어 보내신” 분이었다. 점점 친해지면서 더 많이 알게 된 그는 가히 천재(天才)요 기인(奇人)이었다. 14세에 중국인한테서 처음 침을 배웠고, 많은 중국 의학/침술서적과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을 평생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꼭 60년 침술을 연구하고 또 베풀고 계신 것이었다. 두루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현대의학 지식도 의사 못지않았다. 딱 한가지, “무면허”가 빌미가 되어 여러 번 수사기관에 불려가긴 했으나, 그럴 때마다 처벌은커녕 그쪽 간부들의 부모님, 장인장모님 치료로 “사건 종결”을 봤다고 했다. 노래와 기타반주 실력도 프로 뺨쳤는데, 아니나다를까 한때는 강원도 어느 TV 방송국의 기타리스트 겸 밴드마스터였다고 했다. 게다가 얼마나 멋쟁이신지 선글라스, 시계, 팔찌, 신발, 모자 등등이 작은 액세서리 가게 하나 차릴 정도로 많았다. 팔방미인에 한량이시라 큰 상처를 조강지처에게 주셨는지, 두 분 사이에 난 외아들이 전화 한 통 안 한다고 했다. 재혼하여 함께 사시는 부인은 키가 자그마한 교회 권사님이셨다.
그 어르신 댁을 그처럼 들락거리며 맞은 침이 3~4천 발, 그야말로 나는 “침 맞는 달인(達人)”이었다. 그 중에는 병 치료에 아울러 온몸 “대청소”도 해야겠다며 10일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례로 놓으신 침도 있었다. 마지막 날, 발바닥의 “용천(龍天)”이라는 곳에 놓으신 침. 너무너무 아파서 용(龍)도 그걸 맞고는 몸을 휘감으며 하늘로 도망쳤다는 침. 그 침 맞기 전날은 밤새 뒤척이며 잠을 못 잤다. “용천지랄한다”는 말이 거기서 유래됐다는, 실로 몸이 뒤틀리고 숨이 멎는, 글자 그대로 “지랄 맞게 아픈” 침이었다. 중풍의 두려움이 아니었어도 과연 그런 걸 다 참을 수 있었을까…… 아무튼 죽기살기로 그렇게 맞아 낸 침들이 결국 효력을 발휘했다.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 어르신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처럼, 언제 어느 침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석 달 만에 내 모든 증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곧바로 내가 어르신께 데려간 사람이 우리 수연이, 시카고대학 입학을 1년 미루고 서울로 와 CITC 인턴으로 일하던 중이었다. 수연이도 순환기 계통에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카플터널(CTS: carpal tunnel syndrome, 손목터널증후군). 컴퓨터 키보드나 피아노를 칠 때, 마치 전기가 통하듯 양 손목 안쪽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오는 병이었다. 머디어라(Madeira) 여고 4년간 기숙사에 살면서 버지니아 주의 몇몇 병원을 다녔으나, 결국 다 허탕만 치고 졸업했던 것이었다.
미국 의술도 못 고친 카플터널, 하지만 그 어르신께 그런 건 병(病) 축에도 안 들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랑 똑같이, 수연이도 앉자마자 혈액순환을 위한 수십 발의 침을 머리와 얼굴 등에 퍽퍽 맞았다. 그리고 맨 끝엔 목뒤에 시뻘건 피멍이 좌우 하나씩 둥그렇게 생겼다. 이 “기본 침들”을 매일 맞으면서, 특별히 카플터널 때문에 수연이가 이틀간 따로 맞은 침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어깨침”이라 부른 --- 나도 어깨 이상 때문에 맞았던 --- 침이었다. 여기에 사용되는 침은 찰랑찰랑 날카로운 쇠줄만 1미터 남짓 되는, 일종의 “손잡이 없는” 장침(長針).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건 그냥 말끔한 철삿줄이었다. 하지만 모든 다른 침들처럼 그것은 크롬 성분이 섞인 특수합금, 환자의 몸을 아주 깊숙이 찌를 때 사용하시는 침이었다. 이 어깨침은 맞기가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 한 쪽만 맞는데, 일단 환자가 앉아서 그쪽 팔을 먼저 수평으로 들어 올린다. 그러면 어르신이 일어서서 몸을 구부려 어깨뼈 위로 그 침을 내리꽂으시는데, 뼈 사이에 구멍이 있는지 약 4~5초 뒤에는 그 끝이 겨드랑이로 빠져 나온다. 그 나온 끝을 어르신이 쭉 잡아당겨 처음 꽂았던 구멍에 다시 꽂으시면 그 침은 일단 끝이다. 그리고는 “이제 팔을 내려라” 하시면 팔을 내리는데, 그 다음은 자동이다. 누가 뭐라 안 해도 눈이 감기고, 침 안 맞은 쪽으로 몸이 슬그머니 쓰러지고, 아무 말도 안 나오고, 숨만 겨우겨우 쉰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똑같다.
이 어깨침 맞고 수연이가 나중에 지 엄마한테 한 말이 있다. “엄마, ‘눈앞이 캄캄해진다’가 그냥 말로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줄은 그날 처음 알았다. 진짜로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라.” 하하, 맞는 말이다. 나도 겪었지만, 침이 어깨를 관통하는 순간 무슨 흑색 셔터가 찰칵 내려오듯, 뜬눈에 세상이 온통 새까매진다. 그런 어깨침, 목에 피 빼는 침, 듣기만 해도 엽기적이고 실제로 보면 까무러칠 침들을 다 맞고 수연이는 일주일 만에 가볍게 치료가 끝났다. 어렴풋이나마 지 엄마 소원대로 “의대 진학”을 목표하고 있던 수연이. “현대의학이 못 고친 병을 일개 침술사가 어떻게 이처럼 쉽게 고칠 수 있을까?” 아마 강한 의문이 그 마음에 남았으리라. 아무튼 수연이는 해결됐고, 이제 아내의 차례. 당시 아내는 뉴욕 주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Pratt Institute)에서 실내디자인 석사를 하고 있었다. 뉴저지의 집에서 운전만 거의 왕복 세 시간. 길이 막히면 네 시간. 게다가 40대 초반에 자식들 키우며 20대 초중반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해 내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눈 밑이 종일 파르르 떨려 너무 불편하다”는 호소를 듣고 있던 터였다. 나도 나았고 수연이도 나았고, 내가 전화에 대고 자신 있게 말했다. “여보, 이제 곧 방학하고 한국 오기만 오면 금방 낫는다. 조금만 더 참아라!”
2004년 12월 추운 겨울날, 수연이 완치 후 한 달쯤 뒤에 아내가 예정대로 귀국했고, 우리는 바로 이튿날 어르신한테 갔다. 아내도 우리랑 똑같이 수십 발 침을 먼저 맞았고, 이어서 목뒤에 둥근 용기 두 개를 매달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뗄 때까지 40분간 TV를 보려던 참이었다. 나는 아내 발치의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등을 소파 앞 부분에 기대고 TV 쪽을 보았다. 한 4~5분 지났을까, 사람마다 평생 안 잊혀지는 장면들이 있지만, 나는 그날 그 순간이 지금도 너무 생생하다. 몸을 움직이다 무심코 내 손이 아내의 발에 가 닿았는데, 이것이 어쩐 일인가, 항상 얼음장 같았던 아내의 발이 뜨겁다 할 정도로 따뜻하지 않은가? 눈 밑 떨리는 건 비교적 최근이지만 손발 찬 것은 벌써 5~6년. 늘 나는 “당신 손발이 왜 이리 차냐”고 물었고, 아내는 늘 그저 “잘 모르겠다”며 지나온 터였다. 나는 기뻐서 춤을 추었고, 아내 또한 눈 밑이 이제 안 떨린다며 좋아서 뛰었다. 뉴저지에서 1년 넘게 마그네슘도 복용하고 병원도 다니고 했으나 모두 허사. 그런데 침을 맞고는 하루도 아닌 한 시간 만에 수족냉증과 눈 밑 떨림이 동시에 사라지다니! 이런 기적이, 이런 은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기분이 좋아 그 후 아내가 다 낫고도 계속해서 “몸에 좋은” 침들을 놓아 주셨고, 우리는 우리대로 세상에 좋다는 음식은 다 사 드리며 어르신과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 셋의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다음은 아버지 차례. 아내가 한국에 왔으므로 이제 “밥” 차려 드리는 것도 문제 없고 하여, 우리는 바로 서울 광장동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그리고는 득달같이 어르신께로 달려간즉, 어르신과 아버지의 상봉은 물고기와 물의 만남이었다. 동갑이시니 즉각 정서가 통하셨고, 두 분 다 명석하시지, 똑같이 신이 많은 기분파시지, 노래는 공히 가수 수준이시지, 서로 일본말도 통하고 일본노래들도 척하면 착이지, 흘러간 우리 가요도 누가 선창만 하면 바로 합창이 나오지, 첫 만남부터 둘은 서로 완벽하게 어우러지셨다. 중풍은 언어장애 아니면 수족마비로 오는데, 아버지는 전자의 경우라 말이 어둔하셨다. 그래서 어르신이 “기본 침들” 외에 더 놓으신 것이 바로 우리가 “혀침”이라 부른 침.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는, 턱 밑에서 위로 퍽 찌르면 혀 위로 툭 튀어나오는 침. 하하, 우리처럼 직접 안 본 사람은 아무도 못 믿을 그 침. 그 무시무시한 침을 5~6개 턱턱 찌르시고는, 침 효력의 배가(倍加)를 위해 어르신은 그 상태로 아버지에게 계속 노래를 시키셨다. 물론 자신도 기타 반주에 몸까지 덩실대며 함께 부르셨고, 아버지도 처음에는 힘들어하시다가 점점 침에 적응되고 흥이 오르자 마음껏 목청을 높이셨다. 2002년에 중풍을 맞으신 이후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침을 다 맞고도 두 분의 노래는 그칠 줄을 몰랐고, 나중에는 거기가 침 집인지 파티장인지 모를 정도가 됐다.
아버지는 침 맞고 말이 눈부시게 또렷해지셨는데, “내 집이 더 편하다”며 일주일 치료만 받고 후일을 기약하며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계속해서 맞아야 다 낫는데…...” 하시며 어르신은 그 이별을 내내 아파하셨다. 완치를 못해 준 것보다, “꿈처럼 만난 친구”를 홀연히 보낸 것이 백배 더 서운하신 것 같았다. 어르신은 그 후 3년을 더 사셨고 아버지는 거기서 또 11년을 더 사셨지만, 그 “일주일”이 두 분께는 생애 “마지막 축제”이셨다. 두 분의 삶에서 그처럼 “순전한 희열(喜悅)”은 다시는 못 봤다. 우리는 그 뒤로도 계속 아는 사람도 데려가고, 아내의 전화 목소리가 밝고 명랑해서 너무 좋다 하셔서 전화도 자주 드리고, 미국에서 선물도 사다 드리고, 또 그새 실직한 내가 한 번씩 어디 삐걱하면 찾아뵙는 등, 늘 가며 오며 살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국립암센터 원장 L박사가 어제 침 맞고 갔다”고 하셨다. 우리는 “역시 대단하시다. 의사라도 급하면 어쩔 수 없다.” 하고 칭송은 해 드렸으나, “무슨 착각이 있었겠지” 하며 공히 반신반의했다. 매사 “곧이곧대로”인 어르신이셨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좀 과장되게 들렸던 것이다. 이삼일 후, “여보! 빨리 좀 와 보세요!” 하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서 뛰어갔다. 아내가 TV를 가리키며 “저기 보세요, L박사가 진짜로 목뒤에 피를 뺐어요!” 하는데, 정말이었다. 우리끼리만 알아보는 --- 보통 3주는 지나야 완전히 없어지는 --- 시뻘건 피멍 “OO” 마크 두 개가, 저녁 뉴스에 나온 그의 목에 좌우로 또렷이 찍혀 있었다. “침은 미신”이라 하던 우리 동네 개인병원 의사의 오만(傲慢)에 대비되는, L원장의 그 겸허한 자세 내지 탐구정신에 나는 지금도 마음으로 높은 경의를 표한다.
2007년에 들어서면서 어르신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지셨다. 오랜 세월 앓아 오시던 폐기종이 점점 깊어지시는 것 같았다. 아들은 안 나타나지, 부인도 연세가 많으시지, 급기야 우리가 어르신을 병원으로 모시는 일도 생겼고, 우연히 전화통화 중에 아내가 수연이에게 그런 얘기들을 해 주었다. 그러자 대뜸 수연이가 말했다. “엄마, 할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봐 줘. 나한테 침 좀 가르쳐 주실 수 있는지.” 그 전에 서너 번 나한테 침 배우기를 권하셨던 어르신은, 수연이가 대신 배우고 싶어 한다고 하자 더없이 기뻐하셨다. 자신이 14세에 처음 침을 잡으셨으니, 21세의 수연이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르신에겐 “자식”과도 같았던 “침”이 드디어 수연이를 통해 대(代)를 잇게 되어 크게 안심도 되셨으리라. 그렇게 해서 수연이는 또 1년을 휴학하고 와서 상암동 어르신 댁으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환자는 꾸준히 하루 2~30명 정도 됐는데, “내가 죽으면 이제 전부 이 아이한테 침을 맞아야 한다”며 어르신은 처음부터 수연이가 누군지를 분명히 하셨다. 뉴저지에서 초/중학교 때 오리가미(origami, 종이접기)로 온갖 모양을 접어 팔아 자선행사에 참여했던 수연이. 시카고대학에 가서는 “피아노 솜씨가 음대생보다 낫다”는 평을 우연히 지나치시던 음대 교수님한테서 들었던 수연이. 그 야무진 손끝이 “침”에서는 어떨까 궁금했지만, 나는 나대로 문닫은 회사를 어떻게든 부활시켜 보려고 애쓰던 중에 큰 관심은 못 가졌다. 단지 저녁에 집에 가면, 양파며 감자며 사과 등등에 여기저기 침이 꽂혀 있는 것은 자주 보았다.
두어 달이나 지났을까, 수연이는 지 엄마에게 미국 의대생들이 보는 “3D 인체해부” 책을 사 달라고 했다. 침을 찌르면 찌를수록 그 “몸속”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나 너무 궁금했으리라. 1000불(弗)도 훨씬 더하는 비싼 책이었는데, 얼핏 보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 인체가 한 겹 한 겹 벗겨지면서 살이며 뼈며 혈관이며 내장들이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이는, 입이 딱 벌어지도록 놀랍고 기발한 책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호기심 많고 머리 좋으신 어르신이 “나도 한 권 갖고 싶다” 하셔서 우리는 흔쾌히 한 권을 더 사서 드렸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는 시카고에 서너 달 가 있게 됐고, “침 수업” 소식은 한동안 멀어지는가 싶었다. 그렇잖아도 어르신이나 수연이나 입이 무거워 우린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환자가 오면 어르신이 먼저 침을 좀 놓으시고 그걸 이어받아 수연이가 놓는다, 입 돌아간 중풍 환자들이 많아서 그 방면으로 경험이 가장 많이 쌓였다, 그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세상사가 참 묘한 것, 우리는 오히려 시카고에 가 있는 동안에 “수연이의 실력” 내지 “수연이 침의 효과”에 대해 아주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우리집 파출부 아줌마를 통해서였다. 집이 멀어서 오는데 한 시간도 더 걸리지만, “다른 집은 몰라도 사모님이 부르시면 곧바로 온다” 하는, 아내와 아주 친한 파출부였다. 청소도 해 주고 수연이 밑반찬도 좀 해 달라며 아내가 매주 두 번을 부탁하고 떠났는데, 이 아줌마가 일하러 왔다가 우연히 침을 맞으면서 수연이의 열렬 팬이 된 것이었다. 심지어 일 없는 날도 달려와서 엉덩이를 비롯, 온몸에 침을 맞곤 했다.
내 눈에 어르신 침은 전부 신기(神技), 중국의 화타(華陀)도 이보다 더 잘 놓기야 했을까 하며 늘 나는 그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목뒤침, 어깨침, 혀침 외에 또 놀라운 침은, 우리 식구도 다 수도 없이 맞은 “엉덩이침”. 너무 아파서 예외적으로 비명을 용인하셨던 침. “허리 아래, 하체의 모든 병은 다 낫는다” 하시던 침이다. 환자가 엎드려서 엉덩이를 살짝 내면 약 30cm의 --- 침 15 cm, 손잡이 15cm --- 중침(中針)을 조심스럽게 내리꽂는다. 침이 도톰한 살 속으로 4~5cm 들어가 신경을 “제대로” 건드리는 순간, 둘 중 하나가 일어난다. 즉,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날카롭고 불붙는 자극이 소변보는 쪽에 오거나, 아니면 그 극심한 전기고문 같은 것이 항문에 온다. 그러면 환자는 “아~악! 앞쪽!” 또는 “크~윽! 뒤쪽!” 하고 비명을 질러 앞/뒤 여부를 알려 드린다. 양쪽 다 자극이 충분히 갔다 싶으면, 그 침은 그대로 꽂아 둔 채 반대편 엉덩이를 똑같이 한다. 그리곤 약 30분, 그 두 침이 찰랑거려 미세한 통증이 계속되게 한 뒤, 침을 뺀다. 내가 한창 침 맞으러 다닐 때, 얼굴에 생기(生氣)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여성 환자 한 사람이 알고 보니 병원 간호사였다. 나도 환자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항상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어느 날 어르신이 뜬금없이 말씀하셨다. “걔가 우리 교회 목사님 큰딸인데, 어젯밤 11시에 목사님이 전화하셔서 ‘피 나왔다’고 좋아하시데.” 그렇게 그 여성은 달거리를 시작, 곧 결혼하여 아이도 낳았다. 그 여동생도 언니와 똑같은 해피 엔딩을 맞았다는 얘기는 좀 더 뒤에 들었다. “엉덩이침”은 그처럼 “낫게”도 하고 “낳게”도 하는 신비(神秘)의 침이었다.
“수연이-아줌마”의 “침놓기-침맞기”는 요즘 하는 말 윈윈(win-win)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남편의 건설회사가 IMF 금융위기 때 부도, “사장 사모님”에서 졸지에 파출부로 나서야 했던 아줌마. 몇 년 남의 집 일을 하면서 망가진 몸이 아무리 약을 먹고 침을 맞아도 회복이 안 되던 중, “학생”으로만 봐 왔던 수연이를 뜻밖에 “침쟁이”로 다시 만난 것. 그런데 한두 번 맞아 보니 보통 침과는 차원이 다른, 신통하기 짝이 없는 놀라운 침들이었던 것. 수연이는 수연이대로, 어르신의 가르침을 따라 매일 침은 놓지만, 가시적(可視的)인 “기록” 내지 “자료” 같은 것이 하나도 안 쌓여서 안달하던 중에 아줌마를 보자 눈이 번쩍 뜨인 것. 특히 “엉덩이침” 같은 것은 한 치 오차 없는 정확한 지점에서 출발, 정확한 각도와 깊이로 내려가야 하므로, 꼭 그 전(全) 과정을 비디오로 찍어 보관하며 복습/참고를 하고 싶었던 것. 그리하여 두 사람은, “엄마는 괜찮지만, 찍은 비디오를 절대 아빠한테는 보여 드리면 안 된다”는 아줌마의 간곡한 요구에 합의, 그 뒤 몇 달을 침 놓기-맞기에 서로 의기투합했다. 아줌마는 아내와 통화할 때마다 칭찬에 입이 말랐다. 침을 수도 없이 맞아 봤지만 이런 침은 처음이다, 완전히 다르다, 여기저기 아프던 데가 전부 다 나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얼굴 좋다고 난리다, K대 한방과 나온 한의사보다 수연이가 훨씬 더 낫다 운운하더니, 어느 날 아줌마가 아내에게 속삭였다. “사모님, 나 갱년기 지난 지가 꽤 오래됐는데, 침 맞고 그게 다시 시작됐어요.” 흔히 회춘(回春)은 상징적으로 하는 말인데, 그녀는 “글자 그대로” 회춘한 것이었다.
집안의 4대 종손인 나는 2008년 음력설 조금 전에 서울로 돌아왔고, 설날 아침에 수연이는 많은 삼촌/숙모뻘, 또 그 윗대(代)의 어른들께 다양한 “침”을 서비스했다. 저마다 손발이며 어깨며 등이며 목이며 팔다리를 만지면서 순서를 기다렸고, 수연이는 익숙한 솜씨로 한 분 한 분 차례로 침을 놔 드렸다. 딱 두 사람이 골방에서 엉덩이침을 맞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비명소리”에 나 혼자 빙긋이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뜻하지 않게 수연이는 설날에 세뱃돈 대신 “침값”을 생전 처음 한두 분한테서 받았다. 설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 그러니까 수연이가 어르신께 침을 배운 지 7~8개월쯤 됐을 때, 급기야 어르신을 앰뷸런스에 실어 응급실로 모시는 일이 생겼다. 늘 다니시던 병원이라 기록이 컴퓨터에 다 있어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어르신의 상태가 위중한지 병원에서는 “법적으로 가족”인 보호자를 찾았고, 담당의사는 같이 갔던 그 부인하고만 얘기를 했다. 그간 어르신께서 모아 두신 것이 꽤 많았을 텐데, 왜 그때 치료를 좀 더 받으시게 안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산소 튜브만 코에 꽂으셨을 뿐, 의식도 또렷하시고, 말씀도 잘 하시고, 음식도 자력으로 늘 드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정녕 끝이 되리란 생각은 안 했다. 그래도 응급실 문을 선뜻 못 나서고 주춤거리며 자꾸 돌아보자, “고맙다. 난 괜찮다. 내 걱정 말고 어여들 집에 가!” 하시는 듯, 한 쪽 팔을 들어 연신 “가라”는 손짓을 하시던 미소 띤 얼굴이 아내와 내가 본 어르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르신은 곧 근처의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셨고, 수연이는 매일 달려가 손발의 붓기를 빼 드리며 그 곁을 지켰다. 만일 어르신이 해 있을 때 돌아가셨더라면 수연이는 부모에 앞서 “침 할아버지” 임종을 먼저 볼 뻔했다. 열흘 뒤, 이른 새벽에 어르신이 운명하시자 아들이 나타났고, 그 아들과 그 재혼하신 부인이 장례 후 유산을 반분해 가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천하의 명의(名醫)” 우리 어르신 얘기가 이처럼 허무한 이별로 끝나지는 않는다. 어르신 돌아가시고 수연이가 시카고대학에 복학, 1년을 공부했을 즈음인 2009년 7월,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목장의 서른 살 된 자매가 큰 실의에 빠졌다. 결혼한 지 오래됐는데 애기가 안 생겨 병원에서 “인공수정”을 시도했으나, 그마저 실패한 것이었다. 예닐곱 살 연상인 남편이 7대 독자라 심적 부담이 더욱 컸다. 그 다음 달로 예정된 2차에서마저 실패하면 매우 암담해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듣자마자 나는 주저 없이 수연이의 침을 추천했고, 쉬쉬하며 말은 안 해도 사람들은 전부 “이 자(者)가 지금 미쳤나?” 하는 분위기였다. 인공수정이라는 “첨단과학” 앞에 스물 세 살 여대생의 검증 안 된 “침술”이라니? 일주일 넘게 쥐 죽은 듯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마침내 소식이 왔다. 자매가 침을 맞겠다는 것이었다. 어르신의 침이 거짓말할 리 만무, 그 자매는 금세 온몸이 따뜻해졌고, 2주간 꾸준히 침을 맞고 가서는 2차 인공수정에 성공, 이듬해에 “은(銀)”이라는 외자 이름의 예쁜 딸을 품에 안았다. 수연이랑 같은 범띠, 같은 6월생이었다. 수연이는 “벤쳐” 한다고 그 뒤로는 일체 침을 안 놓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침 할아버지”의 귀한 스토리가 아무 흔적 없이 묻힐 것이 늘 두려웠다. 내가 겪고 보고 들은 만큼 어설프게라도 조그만 “기록”을 남겼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언젠가 수연이를 통해 --- 또는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 누군가가 협력하여 --- 그 놀라운 “침술 자체”가 부활,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영구히 쓰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휴학하고 가는 너보다 그걸 허락하신 너네 부모님이 더 대단하시다”고 수연이 친구들이 말했다지만, 우리 부부는 그것을 고민하기는커녕 쌍수를 들고 환영했었다. 우리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되며, 1년 먼저 가고 뒤처짐이 무슨 대수인가? 고통, 불안, 치유, 환희, 죽음, 이별, 생명탄생…… 어느 과목 어떤 수업이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을까? 두루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일에 힘쓰는 한, 우리 삶의 어떤 시간도 결코 헛되지 않으리. 침을 손놓은 지 15년 됐지만, 그 “산 경험”이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단비로 내릴지 모르는 일.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 늘 하시던 할아버지 그 말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