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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착한 신부(神父)

by 김지민

2024년 10월 29일 >>>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소문도 듣고 TV에서도 자주 뵈며 내심 존경하던 목사님. 내 그 “존경”이 헛되지 않게, 그가 한 번은 자신의 허물을 하나도 숨김 없이 털어놓아 보기가 흐뭇했다. 신임 목사 시절, 어느 교회 집회에 자신과 다른 두 목사님이 초청받았는데, 가서 설교 순서를 보니 자신이 맨 끝이었다. 원래 내성적이고 말주변도 없었던 그는 “야, 이거 죽 쑤면 어쩌지?” 하며 처음부터 걱정이 태산 같던 중,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앞의 두 분이 “더 많이 죽을 쑤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단상에 있는 내내 “죽! 죽!”을 염원했고, 그런 부끄러운 자신을 나중에 되돌아보고 펑펑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인간이 다 똑같다. 매사에 걱정 많고, 이기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남이 못하면 왠지 기분이 괜찮고…… 어쩔 수 없이 다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런 걸 당연시하면 범인(凡人)인 것이고, 늘 뉘우치고 뜯어고치면 그분 같은 리더도 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드러내 놓고 짓는 죄는 물론, 마음에 품은 탐욕조차 죄다. 따라서 목사든 누구든 간에 아침에 눈 뜨고 “종일 열심히” 하는 것이 결국 죄짓는 일. 그러니 목사가 매일매일의 풍부한 경험, 즉 “자기 죄”에 바탕하여 전하는 메시지만큼 공감이 가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목사라고 점잔 안 빼고 그렇게 스스럼없이 “나의 죄”를 밝히며 설교를 하니, 많은 이들이 나처럼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솔직해서 믿음이 가는 성직자가 또 한 분 있다. 미국 어느 천주교회에 갓 부임한 대니얼(Daniel) 신부다. 실존인물은 아니고 2017년 영화 “The Good Catholic”의 주인공이다. 우리말 제목을 붙인다면 “착한 신부(神父)”. 이 젊은 신부는 고해성사를 통해 친해진 젊은 여신도 제인(Jane)에게 이렇게 실토한다.

“내가 신부가 된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첫째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걸 몹시 바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부님들의 미사 집전 모습이 늘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하하, 바티칸에서 들으면 큰일날 말이다.


함께 시무하는 40년 대선배인 빅터(Victor) 신부께는 --- 영화 “리썰 웨펀(Lethal Weapon)” 시리즈에서 맬 깁슨의 파트너로 나왔던 유명 흑인 배우 대니 글로버(Danny Glover) 분(扮) --- 어느 날 이런 질문도 한다.

“저는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요. 신부님은 보이세요? (I don’t see God. Do you see God?)”

빅터 신부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선다.

“나는 하나님이 보인다네. (I see God.)”

그리고는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빠뜨린 한 마디를 마저 보탠다.

“가끔. (Sometimes.)”


평생 본 많은 영화 중에 유일하게 긴 대사를 외우는 이 장면.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도저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 대화. 하나 가식 없이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는,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며 겸허하게 진실을 맞닥뜨리는, 이 두 미국 신부님이 나는 너무 멋지다. 이와 같은 솔직함이 어쩌면 “미국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영화를 보며 했었다. 아무튼 나는 이처럼 진실되고 인간미 물씬한 목회자들에 목이 마르다. 한 톨 허점도 안 보이는, 완벽에 가까운 분들은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하다. 이것이 영화가 아니고, 또 이분들이 다 진짜고 가까이 계셔서, 이분들 교회를 다니며 이분들 말씀을 듣고 배우며 살 수만 있다면 너무 좋겠다.


한국에 교회가 4만 개면 매주 설교만 4만 편. 1년을 50주로 치면 한 해에 200만 편. 교회가 부흥했다는 지난 50년간은 총 1억 편. 삼천리 방방곡곡 그 1억 번의 설교 끝에 돌아온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이혼, 낙태, 자살, 저출산, 성형수술, 황금만능주의…… 뭔가 너무 앞뒤가 안 맞는데, 어찌 된 일일까? 그 모든 설교에 빠진 것이 있었다. 대니얼/빅터 신부의 고백이나 1907년 평양 대부흥을 불붙인 공개회개 같은, 그런 진솔한 참회가 부재했던 것이다. “죄의 힘은 강합니다. 목사인 저도 매 순간 죄 앞에 무너집니다.” 하고 자신들부터 회개하며 위험을 알렸어야 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봐도, 나를 위해 매일 구할 것은 하루치 양식과 “죄, 시험, 악”에서의 구원. 죄에 대한 이런 “엄한 경계”가 없었으니, 마치 잘 먹였는데 예방접종을 빠뜨린 아기들처럼, 무자비한 세파(世波)의 역병 앞에 깡그리 희생제물이 된 것이다.


지난 10년 꾸준히 교회를 다녀 보니, 교회가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 열등생들이 서로를 위안 삼아 “단체로” 열등한 삶을 도모하는 곳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반성, 회개, 변화, 발전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다. 교회마다 지도자부터 변해야 한다. 목사라도 약점이 있고, 힘든 일도 있고, 헛된 생각도 하기 마련. 예를 들면 이런 “사람 냄새” 나는 탄식이 우리 귀에 들리는 날, 비로소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제는 아들 놈이 결혼 전에 동거부터 해 본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 딸이 시집간 지 1년 만에 이혼하고 보따리 싸서 왔습니다. 목회 한다고 평생 고생만 시켜 아내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제가 목사지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을 때도 가끔 있습니다. 요즘은 기도도 잘 안 나옵니다. 여러분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지금은 제 자신이 너무 힘듭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좀 기도해 주십시오.”


대추씨 빨아 놓은 듯이 기승전결 매끈한 설교 뒤에 남은 것은 “타락”뿐. 지금은 목사님들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두서 없고 “진심 어린” 절규를 토할 때다. 사람들은 잠시 외면할지 몰라도, 하늘이 두 팔 벌려 안아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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