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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느 편이 테러리스트?

by 김지민

2024년 12월 02일 >>>


마치 짜장면 시켜 놓고 기다리는 듯

“야, 아직 멀었나?”

하며 글 독촉을 하는 친구가 있다. 미국 사는 초등 동창인데, 하루는 이런 카톡이 왔다.

“지민아, 니는 어짜믄 그래 철저하게 거듭났노?”

내가 답을 보냈다.

“하하, 거듭난 게 아니고, 임자 만난 거지.”


하하, 진짜 그렇다. 나는 “임자” 제대로 만났다. 겉보기엔 하늘하늘한데 샅바를 잡아 보면 3m 깊이의 콘크리트처럼 딴딴한, 상상초월의 엄처를 만나 엄청 “인간”됐다. 집안의 4대 종손. 외가 친가 사촌동생만 23명. 학교 때는 반장/전교회장/과대표. 늘 우쭐대며 세상 모르고 자고(自高)해질 수 있었을 내가 가녀린 아내에게 끄떡 들려 메침을 당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바짝 엎드려 지난 10년을 살았다. 남은 세월도 똑같이 살 것으로 예상된다. 요 얼마 전 대학동기 송년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광주(光州) 사는 절친은

“지민아, 니가 어찌다 요로코롬(요렇게) 됐냐, 잉? 기운 좀 내라.”

하며 글썽글썽한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나를 보면 절로 “남성 우월주의”가 연상되는 친구, 혈기왕성했던 우리 옛 시절이 그리운 친구, 참으로 인간미 “짱”인 친구다.


거듭났든, 임자 만났든, 요로코롬 찌그러졌든, 나는 지금이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 내 주제에 딱 맞다. 우리 부부싸움이 대략 2주에 1회, 1년에 25회, 결혼 30년간 총 750회. 내가 진정 “우월”했다면 그 중 최소 70%는 이겼어야 했는데, 나는 100% 깨졌다. 매번 내가 잘못했다 해야만 싸움이 끝날 수 있었다. 우월은 단지 꿈이었고, 실제론 “완전열등”했던 것이다. 따라서 열등한 자가 강한 자 밑에 눌려 사는 현재의 우리집 권력구도는, 동정할 것 하나 없는 냉혹한 자연의 순리다. 우리의 그 “30년 전쟁”을 끝내 준 2014년 “부부학교”에서 나는 선언했었다. “이제 아내에게 완전히 순종하며 살겠다”고. 그때 우리 교인들은 모두 “저거 며칠이나 갈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지금 10년, 그새 그 “순종”은 실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 나를 “따라 하는” 남편도 한 명 생겼다. 그런데 내가 그 “순종”을 목숨 걸고 지켜 낸 것은 다른 누구보다 아들딸을 위해서였다. 사고무친(四顧無親) 미국 땅에 사는 그들에게 영상통화 속 엄마의 밝은 표정, 해맑은 음성, 깔깔깔 웃는 소리는 바로 “생명수”. 그 생명의 물이 끊임없이 콸콸 넘쳐 흐르도록, 나는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그 “순종”의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내 “인권상황”은 솔직히 남들에 비해 많이 열악하다. 여기 한 예가 있다. 지난 7월말 어느 오후, 사상최악의 폭염에도 여전히 짜랑짜랑한 “여보!” 소리. 급히 뛰어가서 보니, 두 피스 안락의자 세트를 --- 팔걸이의자, 다리받침대 --- 내 다락방으로 좀 옮기자고 했다. 귀한 거라서 버릴 수도 없고, 달리 둘 자리도 없는 상황인 듯했다. 우리집의 많은 물건들이 그렇듯, 그건 그냥 의자가 아니었다. “작품”이었다. 새 걸 사려면 눈이 휘둥그레질 거액이 드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디자인한,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의자였다. 그런데 두 피스 중 덩치가 많이 큰 팔걸이의자의 운반이 문제였다. 우리집이 너무 작아 집 안의 계단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고, 나가서 보니 옥상계단 또한 너무 좁아 거기도 통과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건장한 이웃을 한 분 모셔서 옥상 난간에 사다리를 대고, 힘들게 그 의자를 함께 들어올렸다. 3평도 안 되는 내 다락방(=사무실). 천신만고 끝에 안락의자가 들어와서 장차 훨씬 “안락”한 삶이 기대는 됐는데…… 모종의 “고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대입 체력장 때 내가 제일 못했던 종목은 전체 8개 중 “윗몸 앞으로 굽히기”. 서서 무릎을 편 채 손끝을 최대한 발밑으로 내리는 동작인데, 유연한 사람은 20cm도 쉽게 내리는 것을 나는 1~2cm도 못 내렸다. 내가 상대적으로 하체가 길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이 뻣뻣하여 가슴이 허벅지 근처에도 못 가니 손끝이 내려갈 리 만무한 것이었다. 바로 이 핸디캡이 40년 뒤에 재현됐다. 6년 전, 아내가 갑상선 수술 후 체력단련차 주민센터의 “요가 클래스”에 가자 해서 갔더니, 선생님 포함 40명 중 나 혼자 청일점. 그 클래스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리 뻗고 앉아서 윗몸 숙여 발을 잡는 동작이 나는 제일 안 됐다. 여성들은 식은 죽 먹기인데 나는 땀만 뻘뻘, 손끝이 발목까지도 채 안 갔다. 그럴 때마다 --- 같이 살면 꼭 얻어맞으며 살 것 같은 무섭고 튼튼한 --- 그 젊은 여선생님이 내 등에 올라와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말을 타듯 양 무릎으로 내 상체를 공구며,

“자, 여러분! 열심히 하시는데 손뼉 한 번 크게 쳐 드립시다!”

하며 놀림 반 격려 반 수선을 떨곤 했다.


이제 그 “고민”인즉슨, 그 안락의자에 앉는 자세가 옛날 그 “요가자세”와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작품”이었든 말았든 안락의자는 일단 “안락”해야 하는 것. 그런데 문제의 그 의자는 앉는 각도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92~3도. 따라서 앉아서 양다리를 받침대 위로 쭉 뻗으면, 뻣뻣한 내 몸엔 그게 거의 그 요가자세, 또는 준비자세였다. 너무너무 불편한 것이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 의자를 안 쓸 것인가, 아니면 아내 몰래 개조해서 쓸 것인가? 며칠 고민한 끝에 “그래 해 보자!”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락방 계단을 내려가 막 현관에서 신을 신으려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아내가 물었다.

“여보, 어디 가요?”

내가 대답했다.

“응, 일하다가 피곤해서 바람 좀 쐬러. 다이소 같은 데 가면 전부 싸고 재밌잖아.”

그리고 나는 진짜 그 길로 뭐든지 다 있소 하는 “다이소”로 달려갔다.


우리 이 안락의자는 뒤로 젖히는 각도는 고정돼 있지만 회전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회전축 밑에는 문어발처럼 낮게 다섯 갈래로 다리가 뻗어 있다. 이것이 가령 네 갈래 같으면, 앞의 두 다리에만 뭘 좀 받치면 의자 전체가 뒤로 누우므로 쉽게 목표달성이 된다. 그런데 “다섯” 갈래이기 때문에 일이 좀 복잡했다. 맨 뒤의 두 다리는 그대로 두고, 맨 앞의 한 다리는 뭘 좀 높게 받치고, 남은 중간의 두 다리는 그것보다 좀 낮게 받쳐서, 다섯 개의 다리 끝이 “평면을 이루게” 해야 됐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다이소와 1층의 롯데마트를 한 시간 넘게 오가며 지름, 크기, 각도, 두께, 높이 등 모든 요소를 면밀히 고려, 마침내 준비물을 다 샀다. 테니스 공에 칼집 낸 의자받침, 고무로 된 여러 두께의 완충장치, 그것들을 고정시킬 튼튼한 고무줄과 테이프 등이 그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바스락거릴 소지가 있는 영수증과 포장지 등은 차에 감추고, 딱 그 재료들만 반바지 양쪽 호주머니 깊이 쑤셔 넣었다. 그리곤 바지는 한껏 끌어올리고 티셔츠는 한껏 끌어내려, 최대한 표가 안 나게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공항 검색대의 스캐닝머신(scanning machine)처럼 아내의 눈이 내 몸을 두세 차례 위아래로 훑는 것이 느껴졌다. “뭔지는 몰라도 이 양반이 희희낙락 분명 싸고 쓰잘데없는 물건들을 잔뜩 사 들고 입장할 타이밍인데…… 참 이상하다…… 왜 아무 것도 없지?” 하는 눈치였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그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며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오래 궁리하고 꼼꼼히 준비한 그대로, 92~3도의 그 불편한 안락의자를 110도로 눕혔다. 너무 편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이제 비로소 이 물건이 명품이 됐구나 생각했다. 거기 앉아 널빤지를 무릎에 놓고 그 위에 랩탑(laptop) 컴퓨터를 얹으면 그건 바로 “일하는” 자세. 그냥 앉아서 다리를 받침대로 뻗고 상체를 뒤로 쭉 기대면 TV 보며 “쉬는” 자세. 다른 것 다 치우고 곧추 앉아서 바이올린을 들면 왕초보지만 “연주하는” 자세. 내내 죽도록 일만 하는 곳이라며 “아오지 탄광”이라 불렀던 내 다락방은, (개량된) 안락의자로 인해 그렇게 “천국”으로 화(化)했다.


이 팔걸이의자는 내 다락방을 들어오면 그 등쪽이 보이게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 앞쪽 세 다리에 가해진 “작업”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봐야만 눈에 띄게 돼 있었다. 그런데 과연 예술가의 눈에는 예술품만 보이는가? 한 열흘 뒤 갑자기 내 방 문을 쑥 밀고 들어온 아내는,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파랗게 질리며 비명을 질렸다.

“악! 이게 도대체 뭐예요? 안 그래도 그날 왜 빈손으로 오나 싶었는데, 이거 사러 갔었구나! 멀쩡한 물건들이 어떻게 당신 손에만 가면 전부 이렇게 고물이 돼요?”

그리곤 그 “천재적인” 개량작업을 아내는 단번에 무위로 돌려놓았다.

“야, 이거 테러 아이가? 평안한 남의 안식처에 난입해서 이런 파괴행위를 하는 거……”

하고 내가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당신이 한 건 마치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Mona Lisa)에 낙서를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 게 바로 테러예요. 신성한 예술품에 대한 테러!”

하며 자신이 한 건 “테러척결”임을 강조했다. 1인독재가 나름 장점도 있었다. 신속한 의사결정, 즉각적인 실행, 전혀 없는 “뒤끝”. 그렇게 그 사건은 단숨에 종결됐고, 추후 일체 재론되지 않았다.


이제 이 안락의자는 원래 모습 그대로다. 방에 들어오면 내가 윗도리나 모자를 벗어 툭 던져 놓는 용도로만 쓰인다. 물론 아내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일어나 금방 다 치운다. 진짜로 나는 엄처(嚴處)를 만나 엄청 인간됐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 왜 사람들이 “눈치”라는 것을 보는지,

- 왜 문제아동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 왜 아이들이 부모 몰래 뭘 하려는지,

- 왜 사람들이 아부를 하며 사는지,

- 왜 사람들이 말을 돌려서 하는지,

- 왜 말을 다 안 하고 약간 감추는지

등등을 하나도 모르고 살았다.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고, 되는 대로 행동하며 살았었다. 이제 나는 약자, 패자(敗者), 억눌린 자, 능력이 덜한 자, 말 못하는 자, 말하고 싶은 자들의 심정을 너무 잘 안다. 그들처럼 돼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정 그들을 이해할 수 있으랴? 나를 조금이라도 더 인간 만드시려고, 이 같은 천하무적에게 붙여 주신 하늘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지난 10년 우리집에 “평화”만 있는 것은, 이처럼 다소 열악한 인권상황에 내가 100% 적응한 결과다. 그런데 대신에 우리집의 경우, 웬만한 건 아내가 다 알아서 하니 서로 공평한 면도 있다. 나는 모든 일에 마치 제3자. 생각, 판단, 결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 가령 은행, 읍/면사무소, 자동차 딜러, 부동산, 건강보험공단 등등을 항상 나는 그냥 따라만 간다. “여보, 저기 앉아 있으세요.” 하면 앉아 있다가, “여보, 신분증 꺼내서 이쪽으로 오세요.” 하면 가서 서 있다가, “이제 됐어요.” 하면 또 가서 앉는다. “본인확인용” 얼굴만 달고 다니면 되니, 이처럼 편한 일이 또 어디 있나? 가계 운영에 있어서도, “돈 버는 것보다 돈 (현명하게 잘) 쓰는 것이 몇 배 더 힘들다. 따라서 당신보다 내가 더 힘들다. 힘든 일은 모두 내가 할 것이니, 당신은 돈만 벌어라. 그리고 당신의 현재와 미래, 모든 수입은 다 내 것임을 명심해라.” 하며 아내가 명쾌한 지침을 발표했으니…… 나는 아무 고민이 없다. 그냥 일만 하면 된다.


우리집은 특별한 전시가 있는 박물관 같은 곳이다. 흔히 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한 쌍이, 매우 희귀한 관계를 이루며 사는 집이다. 그래도 우리집에 오시는 분들은 조심하셔야 한다. 테러리스트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살고 있으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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