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09일 >>>
오래 전에 “진짜 인간성 나쁜 자”라며 누구를 욕했다가, “당신이 바로 그 비슷하다”고 아내가 쏘아 톡톡히 무안을 당한 적이 있었다. 성경에 “비판하지 마라” 하더니, 즉석에서 벌을 받았다. 그 뒤로는 누가 아무리 밉상이라도 어디 말할 데도 없고, 늘 혼자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자도 있지만 만인의 귀감이 되는 존경스러운 분들도 많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그런 분인데, 한 번은 안수집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사님, 제가 몸이 아파서 검사를 받아 보니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참으로 그분답게 말을 받으셨다.
“아니, 당신 이미 죽었는데 뭘 또 죽나?”
그 아프신 분께는 죄송해도 난 이 얘길 듣고 혼자 얼마나 킥킥거렸는지 모른다. 나 자신이 농담을 좋아하지만, 이처럼 고차원적인 농담 같은 진담이 세상에 또 어딨나 싶었다. 그때 그 집사님 표정은 어땠을까? 과연 그 말씀의 속뜻을 잘 알아들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공자의 논어(論語)에도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고 했다. 직역하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는 뜻. 의역하면, 사람이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당장 죽어도 한(恨)이 없다는 뜻. 그만큼 공자는 삶의 길이보다 그 질과 목적을 훨씬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朝聞道夕死可矣”에 굳이 빗대자면, 성경은 조문도즉사중생(朝聞道卽死重生), 즉 도를 깨닫는 그 “즉시”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진리로 “거듭나는” 순간, 세상적인 의미의 “생명”은 거기서 끝나고 예수 안에서 완전한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죽었는데 뭘 또 죽느냐는 반문은 일견 섭섭해도 하자가 없고, 돌이켜보면 그 집사님은 애초 이렇게 말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목사님, 천국 초대장은 아무래도 제가 먼저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조차도 다 하늘 영광을 위해 하겠습니다. 초대받은 그곳에서 마침내 누리게 될 영생(永生)이 몹시 기대됩니다.”
안수(按手)를 받은 집사라면 --- 때로 부침은 있을지라도 --- 평소 그 신앙이 이와 같아야 하리라. 갑작스레 죽음이 눈앞에 보일 때, 적어도 이 정도의 내공(內功)은 발휘해야 하리라.
이삼 년 전, 나는 이런 “내공”의 백미(白眉)를 목격하고 감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은 프랑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이태리 등지에서 소위 “보복처형(reprisal killings)”이라는 것을 감행했다. 독일군 점령지에서 레지스탕스, 즉 지하 저항군의 공격으로 독일 병사 1명이 죽으면 그곳 민간인 20명을 사살하는, 지극히 공포스러운 정책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독일군 장교 1명의 죽음에, 부녀자와 애들을 포함한 어느 마을 전체 640명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전쟁영화는 참혹해서 잘 안 보지만, 그날 우연히 돌린 그 TV 채널의 영화에서는 1대20의 보복 사례가 막 진행되는 참이었다. 폐허가 된 어느 마을에 들어선 독일군은, 영문도 모르고 길을 가던 사람들 18명을 붙들어 세웠다. 마지막 2명은 대여섯 살 된 남자 아이와 그의 엄마. 모두 20명이 횡대로 줄을 서자 독일군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 마을의 목사님이 쫓아 나갔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손을 엄마한테서 떼내고 아이의 등을 조용히 떠밀며 대신 그 자리에 섰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이러나 저러나 똑같은 20명. 순식간에 총성이 울리고 만행은 끝이 났다.
내공(內功)의 반대말은 외장(外裝)일 것이다. 10년 꾸준히 다녀 보니, 교회는 이 “외장”이 화려한 분들 위에 안수(按手)하는 것 같다. 교회출석률, 십일조 여부, 교회봉사 이력, 성경공부 참석률, 양육한 제자의 수, 재력, 일정 시험 합격여부 등등이 그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런 점수가 높은 분들이 과연 내공도 강할까? 투자한 것들이 아까워서 오히려 더 멈칫거리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불가능이 없는 요즘 기술로는, 소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서 모든 상황을 얼마든지 실제처럼 재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진짜” 현실처럼 여러 상황을 만들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저도 모르게 “자기 몸을 던지는” 자들에게 안수하고 직분을 주는 것이다. 다른 요소는 하나도 안 보고, 오로지 이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수 천만을 자랑하는 오늘 우리 나라가 어떤 꼴이 됐는지 보라. 다 외장만 중시한 탓이 아닐까? 나는 일요일에 그저 교회 왔다갔다하는 “선데이 교인(敎人)”에 불과하지만, 조문도(朝聞道)하여 즉사(卽死)하고 “진짜 중생(重生)한” 사람들을 보고 싶다. 진리를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도 내놓는 그리스도(Christ)의 제자들, 단단한 내공의 참 크리스쳔(Christ-ian)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