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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연인가, 사인(sign)인가?

by 김지민

2024년 12월 14일 >>>


2001년, 기러기아빠 시절의 일이다. 막 인터넷 채팅이 일상화되기 시작하던 그때에, 하루는 뜻밖에 미국의 딸한테서 영어로 문자가 왔다. 그때 수연이가 중3이었다.

“아빠, 사람이 하늘에 대고 말하는 걸 뭐라고 해요?”

물론 나도 영어로 대답했다.

“기도(prayer).”

수연이가 재차 물었다.

“그럼, 하늘이 사람한테 말하는 걸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내가 모르겠다고 했더니 수연이가 답을 일러 주었다.

“정신착란(schizophrenia).”


그 당시엔 이것을 그냥 애들 사이에 유행할 법한 깜찍한 죠크(joke)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것이 내 맘에 맴도는 것은, 나 자신이 아직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왜 사람이 하늘에 드리는 기도 행위는 수긍하면서, 막상 하늘로부터 실제로 응답을 받았다 하면 그 사람 정신상태를 의심할까? 누가 기도 중에 “또렷한 음성”을 들었다 하면, 왜 우리는 무심코 있다가 갑자기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볼까? 회심 전 사도 바울의 귀에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 않는가? 소위 “기도와 응답”에 있어 우리는 어쩌다 이처럼 “비대칭적인” 시각(視角)을 가져 위와 같은 죠크를 탄생시켰을까? 기도응답을 받았다 하면 왜 일단 색안경을 끼고 그것이 “우연”이었을 증거를 찾으려 들까? 왜 우리는 전능자의 능력을 구하면서, 동시에 그의 전능하심뿐 아니라 때론 심지어 그의 존재마저 의심하는 것일까?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다. 여기 한 사례가 있다. 우리 교인 중에 “존경하는 권사님!” 하고 내가 칭하는 분이 계신다. 나보다 한두 살 아래고 보험을 하신다. 가끔씩 웃자고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진짜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학생이 몇 안 돼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9년째 하고 계시고, 아주 어린 애들은 점심도 떠먹이신다. 큰병 걸린 남편을 간병과 기도로 결국 완치시키면서 뒤늦게 직업전선에 나서, 힘들게 가계도 떠맡고 계신다. 말씀도 그만큼 조리 있고 재미나게 잘 하실 수 없고, 그녀의 기도 또한 그렇게 자연스럽고 애틋할 수가 없다. 이 댁 부부가 우리집에 가끔 놀러오시는데, 5년 전에는 한 번 이런 얘기를 하셨다. “전에 다녔던 큰 교회 같은 순(筍)의 절친한 부부를 최근에 만났다. 그 남편은 S그룹 임원으로 퇴직했고, 부부가 같이 해외선교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어느 집회에서 설교도 듣고 기도도 하고 집에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옛날에 해 넣은 그 부인의 아말감 이빨이 밤새 금으로 변했다 하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분의 말이었다. 그래서 금으로 변했다는 그 이빨을 직접 보셨느냐고 물었더니 그러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내가 또 여쭤봤다.

“권사님, 그 부부는 어떤 분들입니까?”

그랬더니 둘러앉은 우리 네 사람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가리키며 하는 그녀의 대답.

“그냥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예요.”

S그룹 임원출신 같으면 그 능력과 됨됨이가 보증수표. 게다가 그 권사님 말씀을 들어보건대 그 부부가 사이비 광신자들도 아니고…… 도대체 이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던 중에 그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진정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작년 언젠가 우리 네 사람이 둘러앉았을 때, 내가 재차 그 얘기를 꺼내며 보다 상세한 상황설명을 부탁드렸다. 평소 또박또박 한 마디도 허튼 소리가 없으신 그 권사님은, 그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설명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내가 추가로 얻어낸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처음 들은 뒤로 5년을 그렇게 줄곧 “의심”하다가, 마침내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결론은, 그 부부가 해외선교 가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함께하는 나를 기억하라”는 뜻으로 하늘이 그 금니를 주셨다는 것이다. 완전히 100% 믿는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달리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 권사님이 말을 지어낼 리 만무하고, 멀쩡한 그 부부 또한 “동시에” 정신이 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침 신앙상의 이런 “의심”과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미국 시골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를 열기로 했다. 쨍하기만 한 하늘 아래 교인들이 하나둘 교회로 모여드는데, 예닐곱 살 된 아이 하나가 큰 우산을 들고 엄마를 따라왔다. 문 앞에 서 계시던 목사님께서 아이에게 물으셨다.

“얘야, 날이 이처럼 맑은데 우산은 왜 들고 왔니?”

아이가 대답했다.

“기도하면 비가 올 거니까, 엄마하고 비 안 맞고 집에 가려고요.”

아이들처럼 순진한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데, 우산을 하나도 안 들고 간 그 교회 어른들이 걱정스럽다.


아말감이 금으로 변한 기적에는 0.1%도 못 미치지만, 그리고 그처럼 “우아하지도” 않지만, 나도 작은 체험이 하나 있다. 지난 10월 중순에 우리 부부는 미국 위스칸슨 주(洲)에 5일간 가 있었다. 시카고의 딸/사위 집에서 10주간 머슴살이를 하던 중, 위스칸슨에 있는 저희들 작은 별장으로 동행, 짐도 정리해 주고 애들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다 나가고 나 혼자 집에 있게 됐는데, 평생 동안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사고가 하필 그날 발생했다. 변기가 막힌 것이었다. 내가 평소 물을 많이 안 마셔서 수분이 부족한 것이 늘 원인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막힌 나무 막대기 하나를 물로 씻어서 내려야 하는 것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근 30년 너무 익숙한 일,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시커먼 고무 주둥이가 달린 압축기를 쥐고 펌프질을 시작했다. 아무리 길어도 몇 분이면 되는데, 무슨 조화인지 그날은 달랐다. 수백 번 펌프질, 수십 번 물을 내려도 안 됐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어가자 거의 탈진상태가 돼 버렸다.


한국에는 “뻥이요”라는 기막힌 발명품이 있어 실탄 한 알 넣고 쏘기만 하면 단번에 해결! 그것만 쳐다보면 늘 마음이 든든하다. 그런데 거기는 미국 중에서도 시골 촌구석.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 근처에 사시는 사돈댁에 연락이 가고, 거기서 다른 도구 내지 장비가 실려 오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마을 배관공이 달려오고…… 그리고 그렇게 당하는 무안(無顔)의 합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내의 엄한 훈계. “어떻게 당신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느냐? 나처럼 평소 물을 충분히 마셔야 된다고 몇 번이나 일렀느냐? 그리고 ‘인내’는 세상만사 어디에도 꼭 필요하다 하지 않았느냐? 심지어 화장실 안에서도!” 너무 많이 들어서 거의 다 외우는 대사였다. 바로 그때, 멀리서 아내와 딸식구들이 탄 차가 들어오는 것이 화장실 창으로 보였다. 이제 영락없이 들켰구나, 한없는 창피만 남았구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홀연히 그때, 나는 “기도”라는 것이 생각났다. 맑은 날에 우산을 들고 갔다는 그 아이 생각도 났다. 그래, 산을 바다에 던져도 마음에 의심이 없으면 이루어진다 했으니, 그 아이처럼 “온전히 믿는 마음”으로 한번 기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압축기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두 손을 모았다. 2015년에 어머니께서 급히 병원에 실려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말고는 그렇게 다급하게, 진심으로, 머리를 숙인 적은 없었다. 그리고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아야” 함을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다짐하며 작은 목소리로 뇌였다. “하나님,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은 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도와 주실 차례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며 아멘 하고, 다시 압축기를 들어 서너 번 펌프질. 마지막 레버를 눌렀다. 태어나서 들어 본 중에 가장 경쾌하고 청아하고 명랑한 물소리! 한 시간 넘게 빌빌거리던 물이 순식간에 싹 씻겨 내려가더니 찰찰 새 물이 예쁘게 고였다. 감격이었다. “아, 이거 진짜로 듣고 계시나?” 싶으면서 가슴이 철렁, 온몸이 오싹, 머리가 쭈뼛했다. 두려웠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 확률이 낮았다. 건장한 남자가 탈진할 정도로 안 됐으면 정녕 안 되는 일 아니었으랴? 아내가 들어왔고, 연기력 부족한 나는 애써 여유만만한 얼굴을 하고 다가갔다. 그리곤 “응, 왔나?” 하고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거의 전능한” 아내. 거기서 1초만 더 쳐다봐도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밥 먹을 때 기도도 안 한다. 언젠가 “식사기도 다 모아서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안 됩니까?” 물었다가 목사님께 혼이 나기도 했었다. 그런 내가 이제 더 이상 기도가 귀찮지 않다. 급하면 손이 모아지기도 한다. 그날 그 “물 내림”은 우연이었을까, 사인(sign)이었을까? 그것을 100% 사인으로 믿는 믿음이 돼야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정신착란이 아닌 기도응답(God’s answering to our prayers)이다.

하고 딸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런 추호도 의심 없는 믿음은 언제나 올 것인가? 정녕 오기는 하려나? 그래서 이렇게 글이라도 써서 자식들에게 보낸다. 혹시 내 믿음이 끝내 그런 지경까지는 못 다다를까 봐. 그래서 입을 열어 전하는 것이 너무 많이 늦어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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