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9일 >>>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을 끔찍이 사랑한다. 춥다 하면 옷을 껴입히고, 덥다 하면 에어컨 켜 주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주고, 돌이 날아오면 담 밑으로 숨긴다. 배고프다 하면 밥을 먹이고, 목마르다 하면 물을 떠 주고, 피곤하다 하면 소파에 앉히고, 졸린다 하면 침대에 뉜다. 또 무료하다 하면 TV도 틀어 주고, 온 데가 뻐근하다 하면 사우나도 시켜 주고...... 심지어 더 예뻐 뵈라고 점도 빼 주고, 주름도 펴 주고, 마사지도 시켜 준다. 항상 최대한 편하고 안전하고 쾌적하고 폼나게 모신다. 인간의 이러한 "내 몸 사랑"은 인지상정, 따라서 아무 문제 없다? 하하, 맞다, 보통 사람한텐 아무 문제 없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겐 무지 큰 문제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인즉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얼마든지 자의(恣意)로, 광의(廣義)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과제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들린다. 시간적, 물질적으로 조금만 더 베풀고 살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얼핏 봐도 그건 예삿일이 아니다. 아니, 진짜로 큰일이 나는 것이다. 가령 내게 이웃이 딱 한 명 있고,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쳐 보자. 그러면 날이 추워져서 옷을 껴입게 될 때, 그 이웃의 형편도 똑같이 챙기게 될 것이다. 혹시 나처럼 춥지 않을까, 입을 옷은 있을까, 내 옷을 좀 갖다줄까 하며. 또 내가 이런저런 세상사로 번민할 때, 혹시 그 이웃은 평안한지, 나름대로 고충은 없는지, 혹 내가 도움이 될 수는 없을지 등등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룰루랄라 마냥 자유롭던 삶이 애꿎은 결심 하나로 솔직히 "엄청 불편"해진다. 멀쩡하던 내 몸이 만삭의 여인처럼 무거워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여느 임산부처럼 해산일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만삭이 영구 지속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평생 사사건건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돌봐야 하니까. 그리고 그보다 또 더 큰 문제는, 그런 이웃이 실제론 한 명이 아니고, 친구, 선후배, 친척, 친지, 직장동료, 동네 이웃 등 아주 많다는 점이다. 가령 이웃이 99명이면, 내 몸이 1+99=100개가 되는 것이다. 내 한 몸도 버거운데 100명을 사랑? 이렇게 따지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실천이 불가능하다. 성경에 "그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라고 한 최상의 도(道)인데, 아쉽게도 현실성이 부족한 것이다. 지킬 수 있는 묘안이 없을까?
하하, 찾아 보면 길이 있다. 첫째, "나는 자연인!" 하며 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애당초 돌볼 이웃이 없으니 어길 계명 또한 없다. 하지만 이는 "모이기를 힘쓰며 서로 격려하라"는 다른 가르침에 어긋나 곤란하다. 둘째, 내가 안 챙겨 줘도 100% 자립이 가능한, 아주 반듯한 이웃만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말이 안 됨은, 모든 인생은 의지/노력에 관계 없이 "본질적으로" 고통/문제투성이, 따라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이런 궁여지책도 있다.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전략이다. 배고파도 안 먹고 추워도 참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못 간다. 이웃사랑을 피해 가려다 자기파괴를 부른다. 우리 본능이 몸을 챙기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 우리는 본능대로 내 몸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나? 나의 경우, 이 단서 조항 "네 몸과 같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 1년 전쯤. 늘 막연히 하나님사랑=이웃사랑, 이렇게 알고 있던 중에, 어느 날 불쑥 잘못이 깨달아졌다. 이웃사랑이 아니고, "네 몸과 같이" 이웃사랑? 그렇다면 내 몸처럼 아끼는 이웃이 전무한 나는 완전 짝퉁? 나는 황급히 "이웃 수 최소화"에 들어갔다. 이를테면 [이웃=99명]보다는 [이웃=9명]이 "짝퉁 중에 좀 나은 짝퉁"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카톡, 밴드의 여러 방을 몰래 탈퇴했다. 하하, 그런다고 오래 알던 사람이 갑자기 남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건성으로, 입술로만, 이웃을 대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겠다 싶었다. 부끄럽게도, 그렇게 이웃의 수만 줄여 놓고, 나는 여전히 내 한 몸, 내 가족만 챙긴다. 짝퉁은 고쳐도 역시 짝퉁이다.
2017년, 교회에서 단체 영화관람도 갔지만, 내가 아는 중에 가장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사람은 선교사 "서서평"이다. 본명 Elisabeth Johanna Shepping 중에 "Shepping"을 따서 지은 한국이름이 "서평"이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1912년에 선교사/간호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독신으로 와서, 22년을 한결같이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 미혼모, 과부,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것은 보리 두 홉과 동전 일곱 닢. 그리고 자신의 시신도 의학연구를 위해 기증했다. 큰 감명을 받았던 나는, 그해 가을 아내의 생일날 교회 회중 앞에 낭독한 축하편지의 끝에, "나는 당신이 서서평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교인들은 환호했고, 아내는 침묵했다. 그 뒤에 개인적으로도 몇 번 권유했다.
아내는 분명 잠재성이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진정 합하는 사람이다. 지난 11년, 매년 때마다 교인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기쁨을 선사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제 사람들은 세상 어떤 카페나 식당보다 우리집을 더 좋아한다. 하하, 일요일에 교회가 다 끝나면, 혹시 우리집에 무슨 모임이 더 없나 묻는 사람도 있다. 또한 아내는 늘 약한 자, 없는 자, 억울한 자의 편에 서서, 강한 자, 가진 자, 불의한 자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허구한 날 "영혼 없는 아멘"들만 한다며 교회 SNS를 탈퇴, 진심이 안 실린 겉치레 교류에 강하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아내는 뜻도 능력도 충분하다. 있는 것 다 내주고 갈 요량 하면, 할 일이 태산이고 이웃이 부지기수다. 깨진 가정, 버려진 아이들, 독거노인, 탈북민, 외국인 노동자......
자두가 많이 나는 여름이다. 나는 매년 자두만 보면 잊고 있던 "희망"이 다시 샘솟는다. 왜냐하면 여름에 수박, 참외 등만 먹던 아내가 몇 년 전부터, 시디 신 자두를 박스째 사서 먹기 때문이다. 레몬을 툭 반 잘라 쭉쭉 짜 먹을 정도로 신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40년 살다 보니, 입맛이 변한 것이다. 흔히 사람은 안 변한다 하는데, 아니다. 사람은 변한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그날이 올 것을 안다. 아내가 내 손을 잡고 문을 나서며
"자, 여보, 빨리 가요! 나도 이제 남은 생은 서서평처럼 살 거예요."
결심을 밝히고,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론가 이웃을 향해 잰걸음으로 싸게 걸어갈, 바로 그날이 올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