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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Now or Never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못한다

by 김지민

2025년 10월 6일 >>>


“It’s raining and it’s 9 o’clock.”

이 영어 문장에서 두 번 나오는 “it”는 소위 형식주어(dummy subject)다. 그 자체로 뜻은 없고, 문장 구조상 주어의 자리만 채워 준다. 비가 오는 날씨, 9시라는 시각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허사(虛辭)다. 그렇다면 같은 형식의 문장

“It’s now or never.”

는 그 뜻이 뭘까? 지금 아니면 결코? 비슷하게 맞췄다.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못한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미루면 결국 못 한다.”

이런 뜻이다. 2014년, 이 짧은 영어 문장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었다. 그때 부부학교에서 문득 이 말이 떠오르고는, 처참했던 55년 내 삶이 180도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작심(作心) 3일이 아닌 “30년”을 향해 지금껏 “11년간” 뚜벅뚜벅 가고 있다. 봄가을 하는 우리 교회 부부학교가 다음 주말에 열린다. 이 가을, 나의 “기적”이 또 누군가에게 일어나기를...... (https://doldolcom.cafe24.com/20251018bubu531/main.html)


동생의 끈질긴 권유로 2014년 여름에 찾았던 진새골 교회(http://jinsegolonnuri.org). 정식 등록을 하려면 “부부학교”라는 것을 참가/수료해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약간의 냉대를 받으며 다녔다. 교회를 가도 도무지 누가 아는 체를 안 해 주었다. 하지만 일요일 예배 후에 주는 밥이 너무 맛있어서, 우린 발길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었다. 그리곤 마침내 가을 부부학교가 시작됐다. 조목조목 아내가 “잘못됐던” 것이 아니라, 나랑 “달랐을 뿐”이라는 가르침이 매우 신선했다. 그런데 그 부부학교 내내, 뭔가를 배우고 나누는 것보다 더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정말 창피하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망가졌나?”

하는 자책감이었다. 저 넓고 험한 세상과 싸워야지, 좁은 집에서 연약한 마누라나 때려잡는 천하의 못난 자들. 그런 어중이떠중이 중 하나로 내가 거기 불려가 있는 것이었다. 천지 분간을 못하고 “대체 여기가 뭐 하는 데며 왜 왔나?” 두리번거리는 그들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나름 잘났다 여겼던 자신을, 남을 보며 비로소 제대로 알았다. 나는 잘난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못나고 평범한 다수 중 하나였다. 흔히 쓰는 영어로, 난 그저 “one of them”. 가정파괴, 사회불안이 바로 나 같은 무지/무심한 가장(家長)들로부터 서서히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때, 바로 그 문장이 떠올랐다.

“It’s now or never.”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내게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많이 잘못 살았다. 병이 매우 깊다. 더 이상 허송세월하기엔 시간이 별로 없다.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흔한 “반성” 정도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들 끝에, 내가 아내에게 선언했다.

“지금껏 30년은 내 맘대로 했으니, 이제 30년은 당신 맘대로 해라.”

처음엔 아무도 안 믿었다. 저런 걸 뭐 한두 번 봤나? 저게 한 달이나 채 갈까? 그런데 11년을 보더니, 이제 모두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새 우리 교회 남자들 “공공의 적(敵)”이 돼 버렸다.


연세는 깊으신데 여전히 아내가 “제압”이 안 돼 고민이신 어느 분께서 물으셨다.

“차경희씨! 김지민씨가 혹시 일년에 한두 번쯤은 헤까닥해서 서로 다투고 하지 않나요?”

“아뇨, 저희는 전혀 그런 일 없는데요.”

대답을 들으시며 나를 쳐다보시길래, 내가 조금 거들었다.

“이게 담배 끊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 대라도 피우면, 즉 단 한 번이라도 헤까닥하면, 이튿날부터 Day 1에서 새로 카운트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간 쌓은 날수가 아까워서라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자 그분의 즉각적인 질문과 나의 대답.

“아니, 그럼 김지민씨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을 꾹 참으면서 살 수 있나?”

“하하, 저도 인간인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11년을 어떻게 참고 삽니까? 누구라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단지 저는 아내가 뭘 어떻게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전부 공감이 되고 화도 안 납니다.”

교인들은 듣고 “성령의 역사”라며 놀랐고, 하하, 나는 “상대가 워낙 강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변명했다.


깨달음은 나이랑 큰 상관 없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성경에도 이처럼 그와 비슷한 맥락의 구절이 있다. 한 3주 전, 두 자녀를 둔 젊고 신실한 부부가 교회에서 사소한 일로 의견다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열정도 넘치고 능력도 만점인, 우리 교회의 새로운 “일꾼”들이다. 내가 농담으로

“아니, 아직도 부인 말씀에 토 다는 남편이 있나?”

하여 다툼이 멎고, 다같이 한바탕 웃었다. 곧 나는 그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혹 이 청년은 나를 “적(敵)”으로 안 볼지도 모른다는 느낌? 물류업에 종사하는 그는 나보다 20년도 더 젊다.

“내 간증문(https://brunch.co.kr/@5a10f83a9fda49f/33)을 한 번 보시라. 그리고 아내에게 99%도 말고, 100% 순종하며 한번 살아 보시라. 상상초월의 긍정적인 변화가 가정에 일어날 것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좀 있다가 답장이 왔다. 한 15분, 숨도 안 쉬고 다 읽었다. 너무 감사하다. 꼭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난 일요일, 그 청년이 잠시 내게 “간증”할 것이 있다며 예배당 내 자리로 왔다. 사연인즉슨, 추석이 가까워져 배송이 많은 중에 “생전복”이 한 건 있었는데, 엉뚱한 주소로 배달한 것이었다. 이틀 뒤에 그걸 발견하고 부랴부랴 맞게 갖다 놓긴 했지만, 영 마음이 개운치 않던 터. 와이프에게 말했더니, 당장 전화 드려 이실직고하라, 그리고 물어드릴 것이 있으면 물어드려라, 했다는 것이었다.

“뭐가 이상하면 자기들이 전화하겠지. 그냥 기다려 볼래.”

하며 이 청년이 일단 고집을 피웠는데...... 바로 그때 나와의 약속이 생각났다는 것. 그래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드린즉, 괜찮다며, 전화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두루 얼마나 잘된 일인가? 이 청년, 아직 창창할 때에 이 정도니 얼마나 장래가 촉망되는가? 이렇게 한 사람씩, 조금씩 변하면, 장차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경험상, 첫 6개월이 힘들고, 그 뒤부터는 자동, 몸이 먼저 움직인다.


아내 말이 100% 맞고 남편이 항상 그르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의견 충돌 후, 결과적으로 아내 판단이 맞았던 것이 50%밖에 안 된다 해 보자. (실제론 6, 70% 된다.) 이 말은 남편도 50%. 그렇다면 확률 반반의 동전던지기, 둘 중 누가 던지든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아내가 다 던져야 된다. 왜? 둘이서 "싸우는" 데에 허비할 시간과 정력만큼 오롯이 가정에 득(得)이니까. 대단한 수학도 필요 없다. 아내 말을 들음은 무조건 현명하다. 남편은 (자기 일)+(아내 보조)만 하면 된다. 이 생(生)에 꼭 한번 삶의 방향을 틀고 싶으신 분은 다음 주에 우리 진새골로 오시라. 경치도, 음식 맛도, 예배당도, 사람들도, 분위기도, 전부 100점이다. 후회 없고 기억에 남는 1박2일이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응접실에 걸어 놓으시는, 그런 멋진 부부 사진도 찍어 드린다. 평생 못했던 말 ---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당신이 최고예요, 당신 말이 다 맞았어요 --- 오셔서 속 시원히 다 뱉으시라. 한 번의 쪽팔림, 단 한 번의 결심으로 그간 진 빚을 모두 갚으시라.


“It’s now or never.”

나처럼 당신 생(生)에도 이것이 “기적의 한 문장”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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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래는 9년 전 내 그 “간증문”의 결론이다. 내 생각은, 그때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


“남편이 절제하고 인내하면 아내가 기쁘고, 아내가 기쁘면 자식들도 덩달아 기쁘고, 자식들이 기뻐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생존하고 미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많은 수치스러운 통계에서 한국의 세계 1등은, 잡다한 이론과 화려한 설교들이 이미 힘을 잃었음을 증명합니다. 입술이 아닌 몸을, 땀이 아닌 피를, 삶이 아닌 죽음을 요구하는 준엄한 하늘의 꾸짖음입니다. 남편 여러분, 순교하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으십시오. 폼나게 대형교회의 파송을 등에 업고 외국은 못 갈지라도, 구석구석 각자의 집을 자신의 순교지로 알고, 거기서 입술 깨물고 인내하며 나름 억울한 희생을 당하십시오. 먼 훗날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최초에 서양의 선교사들은 전하다가 죽었고, 그 뒤에 우리의 남편네들은 행하다가 죽었다’고 말입니다.


제가 부부학교도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세상을 다시 보니, 남편이 아내보다 잘난 집은 단 한 집도 없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남자는 아집만 늘고, 반대로 여자는 지혜가 더욱 자라 갑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조용히 돈이나 벌면서 아내에게 다 맡기고, 참견도 조언도 하지 마십시오. 행여나 아내가 많이 잘못됐다 해도, 남자는 결코 여자를 바꿀 수 없고, 힘으로는 더더욱 꺾을 수 없습니다. 창세 이후 수천 년, 우리 인간이 오죽 뻣뻣했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조차 항복하고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오직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희생만이 답입니다. 그 옛날 2천 년 전,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 주신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경에도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남편 여러분, 부디 아내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곧 하늘에 순종하는 길이요, 거기서부터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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