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중독, 도파민 중독, 끝없는 숏폼에 대하여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글이다. 나는 외로움이 싫다. 끝없는 상대의 관심 어린 질문들에 허우적대기를 좋아했다. 그 질문의 파도가 나를 덮쳐 내 색을 잃는다 해도, 나는 영문도 모르고 상대에게 젖어들어가길 기다렸던 것도 같다. 친구들의 메신저 프로필에 띄워진 디데이 숫자가 왜 그렇게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는 건지. 숫자가 두터울수록 그 사람이 그만큼 따스한 사람이라고 믿어졌다. 내 주변에는 절친한 친구와의 디데이도 전시하는 지인들이 있다. 연인이든 우정이든, 그런 것들을 보면 두터운 신뢰와 세월들이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상대와 '다정'을 나누고, '온기'를 나누는 행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상대가 영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수용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내 취향과 기준들이 어느 정도 맞을 때, 나는 상대와 매일 웃자고 약속하며 손을 잡았다. 내가 이런 행위에 중독된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권태'가 찾아왔을 때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며 간을 재는 시간은 늘 가슴이 떨린다.
새 학기에 새로 만나는 친구들에게 군것질거리를 쥐어주며 인사하는 것도,
새로운 모임에서 앞으로 함께 할 동기들이라며 인사하는 자리도,
'이 사람, 진짜 괜찮아.'라는 말에 등 떠밀리듯 나간 소개팅 자리도,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사람'은 늘 나를 떨리게 했다. 상대가 결국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어도 처음은 늘 그랬다. 그리고 그 처음의 설렘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늘 처음은 입이 잘 풀렸기에, 극단의 내향적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첫 만남에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어색함이 풀리고,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 알게 되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보인다. 상대와 내가 얼마나 오래 볼 지에 대한 어림짐작 같은 것이. 관계에 대한 오만임을 안다. 상대에 대한 교만이고, 나 스스로의 자만이다. 하지만 어설프게 자란 눈칫밥이 관계에 대한 종말을 내 안에서 예견하고 있었다.
'내일도 밥 먹고 카페 가겠지?'
'다음엔 또 언제 보지.'
'아, 이러면 또 다툴 텐데.'
- 하는 생각들은 내 눈칫밥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주었다. 늘 같은 일상과 같은 사람이 반복되다 보면 지루해지기 말썽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흘려보내다 보면 처음과 같은 설렘은 이미 빛바랜 종이가 되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겨가 되어있었다. 이미 날아가 형체도 보이기 어려울 만큼 멀어져 있거나.
이러한 내 상태가 '관계 중독'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내 눈칫밥이 가져온 교만이나 자만의 것들이라기보다, '새로움'의 상태에 중독된 모습이라고 더 크게 느껴졌다. 잘 생각해 보고 뜯어보면 상대와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고, 같은 자리에 있다. 크게 변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이전에는 새로웠던 것들이 지금은 익숙해져 내게 '자극'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 나는 이 점에 지쳐 사람의 단점을 들춰보거나 싸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단지 그런 새로움이 없다는 이유로.
'뇌가 망가진다'는 말을 많이 들어와서 플랫폼들이 전시하고 있는 '숏폼' 영상, 일명 15초 내외의 영상들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나는 그런 플랫폼들에 3~4시간은 우습게 쏟아부으며 그 영상들에 절여지고 있었다. 도저히 스크롤을 내리는 내 엄지손가락을 멈출 수 없었고, 조금이라도 지루한 순간이 찾아오면 휴대폰을 들었다. 이 '지루함'을 이겨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관계에도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다. 언제부턴가 상대와의 안정감을 지루함이라 바라보게 된 내가 참 낯설었다. 그 누구보다 안정을 바라면서.
안정감은 지루함이 아니다. 상대와 내가 찾게 된 중립이고 신뢰다. 그에 대한 감사로 상대를 조금 더 안아야 한다.
나의 서툰 글과 메시지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겐 조금 더 깊게 마음에 와닿았기를 바란다. 새로운 자극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안정을 한 번 더 들춰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