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허락한 이야기

쉬 싸게 내 딸

by 김세

쉬 싸게 내 딸은 자신의 이야기를 적는 것에 허락을 하였고 그래서 나는 오늘 내 딸의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첫아들을 낳은 탓에 친정엄마는 대한민국 아들에 대한 대를 잇는다는 강한 책임감에 셋째 딸인 나에게는 걱정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다.

지금도 그렇치만 어차피 한 줌 흙으로 갈 우리인데 꼭 아들에 대한 대를 잇는다라는 것을 갖고 살아야만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시 엄마는 큰언니 작은언니의 딸과 딸의 출생에 나의 아들 출산 소식은 기쁨이자 그나마 한시름은 내려 두셨고 다음에 출산한 딸은 더 큰 기쁨이 되었다.

그 당시 직장으로 인해 아들도 딸도 친정 엄마께서 돌봐주셨어 탈없이 잘 자 주었다.

그래서 딸인 나는 엄마에 대해 살아 계실때도 그리고 사후 제사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까지 갖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딸을 낳아 길러보니 너무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딸의 출산 당시 내 몸에서 꽉 찬 개월수에 장작 15일이 지나서 태어났고 그럼에도 체중은 겨우 미숙아를 벗어난 상태로 나에게 왔다.

그 당시 딸의 몸은 온전한 상태로 태어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심장이 뛰지 않으니 당장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된다 했고 서류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는 남편은 잘못될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 수술을 시작하려 팔에 약이 들어가기 전 이아이는 배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갑자기 사라진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난 몇 분만에 내 인생 최대한의 첫 번째 기적을 맞이했다.

탯줄을 여러번 감아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살아있는 상태로 태어나줘 너무 고마웠다.

그것으로 무척 감사했다.

살아있고 딸이었고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것은 기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딸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려 이마에는 자신의 주먹만 한 점을 갖고 태어나 나의 약간의 근심거리로 남게 되었다.

도대체 이마의 주먹만 한 붉은 형태는 무엇인지 점도 아니고 상처도 아니고 딸을 보는데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지금은 성장하여 엷어지고 화장으로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고 어릴적 상처가 된 듯한 얼굴에 비하여 많이 고와지고 이뻐진 모습으로 남자 친구까지 생겨 한창 멋을 내고 또 기분 좋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딸의 출산은 남편에게 세상 둘도없는 그녀를 향한 추종자가 되었고 백일이 지나 아빠 얼굴을 알아본 후부터는 딸에게 향한 사랑은 이미 한도를 쓰고도 더 땡겨쓰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에게도 딸이 있다니 믿을 수 없다"라며 난 그에게 나외에 또 다른 새로운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주었다.

'후후'

"여보 만약 딸이면 다이아반지 좋은것 하나 사줄게"했는데 26년 동안 난 그 반지를 아직 받지 못했고 난 내 딸이 다이아반지라 그 현물의 그것으로 대신 여겼고 남편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왠지 다이아반지를 가지면 더 큰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아 없어도 되는 욕심은 갖지 않기로 했다.

'뭐 또 사줘봐야 월급인데 지가 무신 용가리 통뼈도 이니고 도둑질도 못하고'

어느 날 돌이 되기 전 나는 딸의 심장에 구멍이 나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마 외에 또 나의 다른 걱정거리가 되었다.

물끄러미 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조그마한 몸에 뭔 상처가 이리 많은지 쳐다보고 있으니 눈물이 났었다.

착한 딸은 순하게도 잘 자라주었고 칭얼대는 것 없고 잘 먹고 잠도 밤새도록 순하게 잘 잤다.

돌이 지나고 다시 진료를 받았다.

기적이라고 했다.

심장의 구멍이 저절로 막혔고 좀 지나면 뛰어다니는 것에는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아이가 나의 최고의 광채와 선명도 최상의 다이아몬드라는 생각이 아주 아주 많이 들었다.

그렇게하여 딸은 세 살을 넘기는 동안 아주 잘 자라 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난 10년 동안을 매일 아침에 이불빨래를 위해 세탁기를 돌리는 딸의 요양 아닌 요양이 시작되었다.

바로 쉬 싸게에 야뇨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의 구멍과 이마의 상처가 야뇨증보다 더 큰 일이었기에 야뇨증은 별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살았다.

딸은 3살 이후로 기저귀를 떼지를 못했고 그 당시는 3살 이후의 큰 아이용 기저귀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생아용 일짜형을 늘 착용하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하지만 5살 이후에는 그것 또한 착용하지 않고 밤에 중간중간 일어나 쉬를 보게 하는 훈련을 했다.

며칠을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고 딸도 그렇고 피곤하여 밥맛도 없고 직장생활도 딸의 어린이집에서도 늘 졸아대는 밤낮이 바뀌는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주는 나날이 되었다.


딸이 너무 허약한 것 같아 한약도 먹여 보았고 야뇨증에 비릎나무가 좋다고 하여 그것도 딸여 먹여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 자신도 미안한지 스스로 일어나 쉬를 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잠이 들면 일어나지 못하는 어린아이인데 지가 무슨 어른도 아니고 우찌 일어나 쉬를 하려는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딸에게는 쉬 싸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된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지없이 아침에는 이불이 흥건했고 나는 또 그것을 걷어 세탁기를 돌린다.

나는 딸의 쉬 싸는 버릇에 주눅이 들까 야단을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나는 매일 이불을 빨아대는 일을 했었고 이불을 빨기 위해 대용량의 가장 큰 가정용 세탁기를 10년 동안 3개를 사게되었다.

이제는 가릴 때도 되었지만 5학년이 되도록 못 가리는 딸은 자신도 힘이 들었는지 어느 날부터는 본인이 쉬 싼 이불을 세탁기에 넣어 두기 시작했다.

언젠가 겨울의 어느 날

피자에 콜라까지 맛있게 먹고 잔 딸은 포만감에 아주 깊이 잠이 들었다.

더군다나 지글지글 뜨뜻한 방에서 얇은 요를 깔고 잤으니 잠은 완전한 방안을 돌아다니는 꿀 떨어지는 잠이 되었다.

딸은 쉬를 싼지도 모르고 완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달려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 쉬 쌌는데 이불이 완전히 그냥 다 말라버렸어"

그것은 당연 쉬를 싸 냄새가 나지만 흔적이 없다는 그런 뜻이었다.

내 딸은 쉬를 싸면 젖어있지 않는 한 그것은 완벽한 범죄의 현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냄새는...

딸은 냄새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르기만 하면 그건 쉬 싼 게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다 말라버려 쉬 싼 흔적 없다고 쉬를 싼 것이 아니라는 딸의 논리에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그냥 다이아몬드에 오물이 묻어 닦기만 하면 아무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후 6학년이 되고 딸은 6학년을 기다리기로 한 듯 더 이상 희한하게도 야뇨증의 증상은 없어졌고 쉬 싸게라는 별명은 듣지를 않았다.

"엄마 내가 왜 그때까지 쉬를 싼 거지 나도 참 이해가 안되네"

뭘 어릴적 일인데 지가 이해까지 하려는지 딸은 아비를 닮아 다정했다.

아들은 나를 닮아 늘 칠렐레 팔렐레같이 까불고 철이 없다.

내가 낳은 아이들은 성격은 완전히 틀리지만 아들은

아빠를 조금 닮았는지 동생이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어준다고 늘 자랑한다.

남편은 자랑은 않지만...

지금도 딸은 높은 산에는 숨이 가빠 올라가지 않는 약한 심장을 가졌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고 있고 이런 일은 신이 주신 행복에 너무 행복하지 않고 타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살아가라는 배려라 생각한다.

많이 가지려 욕심안 내고 열심히 노력해서 살겠습니다.

세상 아픈 아이가 없게 그렇게 살게 해 주세요.

저 이런 말 쓴다고 착한 사람 아닙니다.

마무리하려고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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