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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물 Oct 05. 2024

초록 잎사귀

-겨울에 만난 여름


봄에서 여름,

알록달록한 봄꽃들 녹아내리는 여름철 장마에

피할 우산도 없이 흠뻑 젖어버리곤 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

눈부신 햇살에 빛나는 초록들이 가을바람에 하나씩 날려가도

잡을 새도 없이 휑한 길가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곤 했습니다.


가을에서 겨울,

간간이 보이는 볕에 아직 무더운 여름철이라 하며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들을 속절없이 맞곤 했습니다.


쌓이지 않고 금방 녹는 동그란 눈들에

겨울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얼어붙은 시간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나는 봄길을 걷고, 여름길을 걷고, 가을길을 걸었습니다.


유난히 어둡고 추운 길 걷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겨울이 왔을 때,

어느새 발밑에 쌓여있는 새하얀 눈들에

그제야 겨울임을 알았습니다.


포근하게 쌓인 눈 위로 선명하게 찍히는 두 개의 발자국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었습니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눈송이들을 맞으며 겨울길 걷다가

바닥눈 사이로 보이는 한 장의 초록 잎사귀 보았습니다.


가을바람에 날려간 줄 알았던 여름잎은

하늘을 날아, 날아 한겨울에 도착했나 봅니다.

희미하든 선명하든 초록의 흔적은

속절없이 맞았던 장마보단

한 철 동안 모든 색을 선명하게 했던 

따스한 볕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초록잎 한 장 손에 들고

나는 겨울길 걸어갑니다.

겨울인 것을 알고 펼쳐진 길을 보니

새하얀 눈길이 겨울볕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반짝임 위로,

나의 선명한 두 발자국이

오롯이 찍히고 있습니다.


-초록 잎사귀







인생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존재인 걸까? 어떤 책임은 나에게 너무 무거워서 걸어가는 내 두 발을 무겁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흘러가고 있는 시간에 내 온몸을 기댄 채 그저 남아있는 책임의 시간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이렇게나 연약한 영혼을 가진 나는 요즘 들어 '잘 책임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곤 했다.


'책임감이 클수록, 책임을 잘 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였다. 책임이 무거울수록,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차라리 그리도 무겁지 않은 책임감을 가졌다면 오히려 더 잘, 더 쉽게 책임을 잘 지는지도 모른다. 무겁게 내려앉아있는 돌덩이 같은 마음도 아마 '책임'에서 오는 무거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특히나, 어떠한 관계 속에서 오는 무거움은 마음의 크기가 클수록 무게도 더 무거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해?' 스스로 외쳤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마음이 희석되면서 내 마음의 무게와 미성숙의 무게가 비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끝까지 잘 책임졌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 뒤에는, 때로는 치열하게 고민하며 때로는 무능력하게 시간에 온몸을 기대며 견뎠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위를 그렇게 걸었다.


어느새 겨울 같은 가을이 왔다. 나름대로 힘들다고 할 수 있는 겨울 같은 추운 시간을 보내며, 길 위로 무거운 내 마음을 시간에 기대어 조금씩 조금씩 덜어냈다. 그 마음들은 흰 눈이 되어 혼자만의 삶을 이전보다 선명하게 잘 꾸려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장마와 가을바람에 휑하니 날려가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을 것 같았던 한 장의 기억은 겨울철의 반짝임으로 도착했다. 


'나는 빈 마음을 끌어안고.'라는 매거진을 발행했는데, 더 이상 이곳에 쓸 글은 없다.

아팠던 마음을 비우려다 빈 마음이 된 줄 알았던 마음이, 반짝이는 것들로 차기 시작한 지금.

마음은 비어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 마음을 다른 것들로 채워서도 안 된다.


책임을 잘 지는 삶은, 내가 선택한 것들의 의미를 가장 아름다운 의미로 만드는 삶이란 것을 깨달았다.

빠르게 비워내고 싶었던 생채기를 어느 때보다 붉고도 맑았던 혈액으로 기억하며

내 몸이 겨울철 차가워질 때마다 붉었던 박동을 기억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처음 겪어보는 하나의 연약함은 그렇게 하나의 성숙으로 빚어졌다.

가을바람에 힘없이 날려갔다 겨울이 되어서야 도착한, 여름철 초록 잎사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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