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와 좌절 비선의 연속인 삶의 나열 -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된 실패와 시련의 연속이다. 유년 시절에는 그 시기가 지나면 나아질 거로 생각했다.
‘태어나서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의 유명한 명언이다. 아직도 가난한 건 정말 내 잘못이 맞는다는 걸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
유년 시절부터 부유하지 않은 집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부모님이 계셨지만, 맞벌이로 늘 바쁘셨고, 서울이지만 오래된 한옥에서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와 살았던 나는 믿기 힘들겠지만, 학교에 가기 전부터 석유곤로(풍로)에 밥을 해서 저녁상을 차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풍로에서 가스레인지로 바꾸던 날, 그 어떤 학용품을 선물 받은 것보다 더 행복할 정도였다. 풍로는 불을 붙여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하는데, 가스는 쉽게 불이 붙었다. 중학교 질풍노도의 시기가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 모두 나처럼 집안일을 하면서 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4학년 하교를 하고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데, 중학생이었던 오빠가 집에 들어오면서 본인도 배가 고프니 밥을 차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당연하게 오빠가 배고플 테니 빨리 밥을 차려주라고 말씀하셨다. 다리는 조금 불편했지만 정정했던 할머니는 사는 동안 한 번도 내 편인 적이 없었다. 내가 했던 반항은 싫다는 게 아니었다. “라면은 지금 먹지 않으면 불어서 먹을 수 없으니 먹고 차려줄게”였다. 국민학생이 할 수 있는 야심찬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집안의 특성상 오빠는 고등학생 때까지 자기 손으로는 물 한 잔 떠먹을 필요가 없었다. 당연하게 했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알게 되면서 속에서 끓어올랐다. 정확한 단어로 표현이 안 되는 좌절의 감정은 아마도 ‘화병’에 가깝지 않을까? 유년 시절의 추억은 상처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여자인 내가 남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똑같이 힘든 훈련을 받는 ‘군대’를 선택했던 계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왜 군인이 되었냐’는 질문에는 ‘군복이 멋있어서’라는 그럴듯한 대답으로 넘긴 적이 많았다.
유년 시절 모두가 나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걸 알려준 내 소중한 친구 윤정이와 미지는 나와 많이 닮았지만 다르게 사는 친구들이었다. 30년간 내 곁에서 늘 응원해 준 윤정이와 우리 곁을 조금 일찍 떠난 미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를 성장하게 해준 친구들아! 너희가 실패의 연속이었던 내 삶의 ‘성공’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반짝이는 한 조각이다. 앞으로 30년도 잘 부탁해.
스무 살, 개나리 피던 날 (부제 : 훈련소 가는 길)
친구들은 모꼬지를 떠났다.
나는 혼자 긴 여행 떠날 준비를 한다.
부모님의 눈물 속 배웅이 낯설다.
오늘 하늘은 접시 속에 담아 놓은 바다.
여행에 맞는 옷으로 환복 한다.
하이얀 플랫슈즈 벗고 시커먼 전투화로 갈아 신는다.
딱딱한 옷과 식판속의 찐 밥
지금도 개나리 피는 날이 되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1부. 스무 살, 개나리 피던 날
첫 번째 입대 – 여군학교
유년 시절 모든 시간이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시켜주지 않은 집안 분위기와 늘 거부당했던 기억으로 군에 입대를 다짐하고, 1차 서류전형부터 필기시험, 체력검정, 면접까지의 시험을 치렀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는 5개월간 집에는 비밀로 했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부모의 반대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5개월간의 전형을 모두 통과하고 최종 합격 통보를 우편으로 받았다. 뛸 듯이 기뻐해야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반대하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되었다. 입교까지 시간은 일주일뿐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3일을 남겨두고 군대에 입대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예상과는 달리 큰 반대 없이 허락했고 무난하게 입대했다. 군대를 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군사훈련은 더 힘들고 지치는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참기 힘든 일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뜀걸음(달리기)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얼차려도 아닌 ‘잠’이었다. 06시 기상과 10시 취침 숫자로만 본다면 8시간이나 자는 것 같지만 취침 시간 중 90분간 불침번 근무를 서야 해서 실제 취침 시간은 4~5시간에 불과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 주중에 힘들면 주말에 하루라도 쉬게 해주면 좋을 텐데, 주말에도 07시 기상을 해서 빡빡한 일과를 해야 했다. 평생을 잠이 부족한 채로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새벽 기상과 부족한 잠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입대 후 입교식 전까지 3일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동안 적응하지 못하면 스스로 나가도 된다고 시간이라고 했다. 용산 여군학교에 누워 있으면 남산타워가 보였다.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보며 포기를 상상했다. 지금 포기하면 친구들과 만나서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즐기며 잠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걸 알지만 그것도 잠깐이겠지. 따뜻하게 반겨줄 가족이 없다는 생각이 금새 뒷따랐다. 참혹한 현실이 두려워 만성 피로의 고통을 안고 입교식에 참여하는 ‘2번 이미양(개명전) 후보생’이 되었다.
여군학교의 첫날 밤
사람들에게는 어릴 적부터 ‘제복의 판타지’가 군을 선택한 이유라고 답했지만, 실제로는 삶의 도피였다. 그랬기에 아무 준비 없이 입대했다. 하후생(하사관후보생) #162기
하사가 되기 위해 여군학교에서 20주간 우리는 기초군사훈련과 행정(문서기안)을 배웠다. 지금은 없어진 교육으로 그만큼 교육 기간도 짧아졌다.(‘여군학교’는 2002년 마지막 여군기수를 끝으로 사라졌다. 그 전까지는 이곳에서 모든 여군이 거쳐갔다.) 여군에게 사격, 제식 등 기본적으로 남군들이 받은 기초군사학과 동시에 문서 기안을 주로 배웠고, 임관하면 병과와는 상관없이 행정업무를 맡게 되었다. 한글도 아니고 처음 경험한 아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써야 하는 문서 기안 수업은 내가 군대에 입대한 게 맞는지 수없이 되뇌게 했다. 차별당하는 게 유년 시절이 상처였고, 적어도 내 인생은 차별 없는 곳을 선택하겠다고 온 군대인데…. 남군들에게는 없는 문서 기안 수업 때문에 임관이 늦어지는 것이 합당한가. (당시 여군학교는 20주 교육, 부사관학교는 16주 교육으로 같이 입대해도 남군들이 한 달 먼저 임관하게 되었다.)
여군학교 입교 첫날 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두에게 비웃음이 될 거야….’
혼자 씩씩하게 잘 지내겠다는 다짐 할수록 혼돈으로 빠져들어 갔다. 소름 끼치게 다정한 모녀 사이는 아니라도 부모님이 보고픈 것인지, 버텨내야 한다는 부담감인지,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를 복잡한 심경에 잠이 오기는커녕 더 또렷해졌다. 낯선 공간,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과의 어둠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벌떡 일어나 외쳤다. “후보생, 후보생, 그게 뭡니까?” 모두 잠든 줄 알았는데 다들 나처럼 잠 못 드는 밤이었는지 같은 질문이 한순간에 쏟아졌다. 입교식 날 우편으로 보낼 때까지 가입교(임시 입교)기간 침대 밑 세숫대야에 입고 왔던 옷과 짐을 보관했고, 서울과 멀었던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먹으려 했던 빵이 기억나 가방을 뒤척인 소리였다. 입에 맞지 않는 식판 속 찐 밥이 익숙지 않아 동기들이 자는 시간 몰래 먹으려 꺼낸 빵 비닐 소리에 우리는 모두 반응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상하지는 않았는지 확인도 못 한 채 먹었던 그 빵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빵을 먹는데 눈물이 흘렀다. 빵이 맛있어서였는지, 이젠(언제든 먹을 수 있었던) 흔한 빵조차 못 먹는 상황이 슬픈 건지 알 수는 없었다. 14명이 나누어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양과는 반비례하듯 감동은 크게 느껴졌다. 달콤한 한 조각의 빵이 그렇게 위안이 되다니!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빵을 음미하는데 옆자리 ‘3번 이난영 후보생’과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수없이 많은 사연을 다 안다는 듯한 여유 있는 미소가 나를 붙잡아주었다. 우리는 그날 처음 웃었다. 그녀는 그날 밤 왜 그렇게 여유 있게 웃었을까? 24년이 지나도 내 옆자리에 그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