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없던 나에게
2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들
- 겁이 없던 나에게
여군대의 추억과 악몽
하후생 #162기
2000년 5월에 입대한 우리는 여군 최초로 병과를 미리 선택해서 입대한 기수였다.
우리보다 선배 여군들은 입대해서 교육 기간에 병과를 부여받았었다. 나는 군대에서 통신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도 몰랐다. 병무청 소개 병과란에 컴퓨터 관련이라는 글만 보고 선택했는데 훗날 그게 얼마나 후회할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40:1의 경쟁률을 뚫고 입대했다. 병과는 정해졌지만 가야 하는 부대는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임관날짜가 다가왔고, 그 당시 여군들은 소수 병과를 제외하고는 병과와 상관없이 행정지원관으로 임무 수행했다. 나는 용인에 있는 3군사령부(현재 지상작전사령부)로 배치되었다. 47명의 동기 중 나를 포함한 4명의 동기가 같이 배치되었다.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는 2번, 같이 간 동기들은 30번 대의 동기들이었다. 번호는 키순이었다. 나는 덩치도 좋고 키도 컸고 함께 간 동기들은 다 작고 귀여운 친구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임관 일주일 후 3군사령부 여군대에 들어가는 날, 살면서 살갑다 느끼지 못했던 아빠가 안타까웠는지 태워 주겠다고 했고, 동기들과 같이 군사령부 서문에 내렸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도 스마트폰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아빠가 내려주는 곳에서부터 국방색 더블백(의류대)에 보급품과 이불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여군대까지 걸어갔다. 알고 보니 여군대는 군사령부 정문에서 더 가까웠고, 잠시 입차를 허락해 주면 여군대에서 내려도 되는 일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20킬로가 되는 무게를 이고 지고 1시간을 걸어가면서 훈련 중 최대의 고비중에 하나였던 40킬로 행군이 생각나면서, 임관하면 힘든 일이 끝날 줄 알았던 건 착각이라는 생각이 스칠 즈음 여군대 정문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엔 여군대 선임들 40명이 모두 나와서 팔짱을 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바리한 이등병처럼 어리숙한 모습으로 경례만 40번을 하는 동안 선배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어렵게 쳐다본 몇 명의 얼굴에서 못마땅함이 느껴졌다. 우리를 반겨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을 표정과 기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꺼낸 한마디가 정말 충격적이었다.
“야, 3달 준다. 쟤만 빼고 다 10킬로씩 찌워놔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 쟤는 바로 나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작고 귀엽고 예쁜 건 맘에 들지 않는 여군 선배들의 이상한 심리에서 시작된 갈굼이었고, 당시 나는 키 172에 건장했기에 맘에 들지 않는 막내에서 배제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4명의 동기 중 한 명은 여자들은 잘 모르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관심을 보였다. 동기의 언니가 미스춘향 진이었다는 소문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 이미 퍼졌고, 선배들은 얼마나 예쁜지 보자며 팔짱을 끼고 도끼눈으로 노려보면서 우리를 기다렸다. 그날부터 시작된 막내 생활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이상이었다. 여군대 막내 생활은 이등병의 막내 생활과 아주 비슷했다. 가끔 병사들과 이야기하면 여군들이 더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막내 생활은 쌍팔년도 시집살이하던 며느리와도 닮았다. 아침 6시 기상이 그토록 힘들었던 후보생은 임관하면 잠이라도 푹 자는 것을 기대했지만, 막내는 평일 6시 기상나팔이 울리기 3분 전에 시끄럽지 않게 선배들을 깨워야 했다. “김하사님, 기상 시간입니다.”라고 막내에서 가까운 선배들부터 깨워야 했다. 기상 점등과 취침 소등도 수많은 막내일 중의 하나였고, 그중에 깐깐한 선임과 같은 생활관을 쓰는 사람은 기상 점등 전 메이크업까지 하기도 했다. 알람 소리가 선배들에게 들리기 전에 깨서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건 훈련받을 때 생각 못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막내는 6개월간 외출 외박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대 업무와 여군대 생활이 전부였다. 3개월간 10킬로를 찌워놓으라는 최상급자의 지시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날 밤 알게 됐다. 17시 일과가 끝나면 막내를 제외한(영내 생활 6개월 이후) 선배들은 22시까지 외출할 수 있었다. 21시 반부터 22시가 사이가 되면 선배들이 한두 명씩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어떤 날은 떡볶이가 어떤 날은 꽈배기가 들어있었다. 처음 며칠은 선배들이 들어오는 21시쯤 되면 메뉴가 기다려지고 매일 먹는 여군대 식당 밥이 아닌 외부 음식은 후보생 첫 면회에 사제음식을 맛본 것처럼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야식은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튀김, 떡볶이, 꽈배기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알 수 있었다. 군사령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용인시장이 있었고, 복귀시간과 시장이 끝나는 비슷한 시간에는 3개 천 원하는 꽈배기를 2천 원에 10개씩도 주곤 했다. 선배들이 사주는 야식은 마치 규칙처럼 막내들이 그걸 다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사 온 선배는 막상 한 입도 채 먹지 않고 중간 선배들에게 “야, 막내 다 먹는 거 보고 자라.”하고 씻으러 갔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니 거짓말처럼 모두 10킬로씩 살이 쪘고, 전투복이 벌어져서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모습이 불편한 건 우리만은 아니었는지 어느 날 점호시간 이젠 다시 살을 빼라고 지시했는데, 찌는 건 쉽지만 빼는 건 말처럼 되지도 않았고 꽈배기나 떡볶이 던져주듯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군대에 온 첫날 점호시간 자기소개와 함께 여군 선배들 50여 명의 이름을 외우고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진을 보고 기수와 이름을 외워야 통과되는 시간이었는데, 150기 선배부터 161기 상급자까지 외우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던 동기들과는 달리 이름을 잘 외우는 나는 쉽게 다 외웠다. 그런데 점호시간 150기 선배가 한 명씩 이름을 물어볼 때 종이에 있던 152기 선배 한 명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이유는 다음 날 알게 되었고 화장 전후가 많이 다른 선배를 끝까지 못 찾아낸 결과는 막내의 갈굼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먼저 일어나고 선배보다는 늦게 씻어야 하고, 선배들이 취침 시간이 되면 “소등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본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하루하루 힘들고 부당한 시간을 보내다가 6개월 후 첫 외박 날 분대 선임들이 5천 원씩 모아서 차비를 주는데, 서러움인지 감동인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차비를 전해주면서 첫 외박 복귀 때는 떡을 해오라는 농담을 했다. 결국 받은 돈보다 떡값이 더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오천 원짜리 열 장 봉투를 받을 때의 뭉클함이 있었다. 6개월의 막내 생활이 끝나는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과 그동안의 고생이 순간 스치면서 정이 느껴졌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없어진 여군대의 추억이다. 국사책 근현대사 부분에 나오는 며느리들의 애환과 고부간 사이 같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갈구다가 단 한 번의 감동으로 우리는 그들과의 동질감을 느끼며 스며들어 갔다. 그렇다고 부당했던 그 일들이 좋았지는 건 아니지만 같이 막내 생활하며, 울다가 웃다가 표정 관리를 해야 했던 좋았던 선배들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 3군사령부 여군대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나를 포함한 모든 여군들이 그 시간을 참 잘 버텼다.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가혹행위를 버티며, 진짜 군인이 된 모든 여군을 작게나마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