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청년의 산후조리

사회복지사가 고마운 사회복지사

by 유원선

나는 탈시설을 지지하고 탈시설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장애인, 노인, 아동 등)에게 "시설만"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사회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처리”해왔다.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큼 개별의 삶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허용되고 있는지 고민해봐야 하며,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지원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탈시설의 주장이다.

하지만 지수(가명)가 막상 아이를 낳게 되자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낳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너무 막막했고 아이가 위험할 것이 우려되었다. 결국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시설에 자리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고 특히 장애 엄마는 시설에서 손이 더 많이 가기에 잘 받아주지 않았다. 주변에 알아 보니 “애란원”이 장애 엄마를 받아주니 거기를 알아보라고 하였다.


애란원은 연세대 동문에 위치한 역사 깊은 기관이다. 미국 선교사에 의해 1960년대에 설립된 곳으로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기관방문을 하기도 했었고, 거리 청소년 지원하는 사업을 하면서 임신한 청소년들을 연계시킨 곳이기도 하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1년 반까지 머무를 수 있는 임시생활시설이다.

애란원 입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애란원에 문의를 하니, 지금은 자리가 없단다. 출산예정을 두 달 정도 앞둔 때였는데, 혹시 그 사이에 누가 나가게 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애가 타는 와중에 출산이 거의 다 되어 놀랍게도 자리가 하나 날 것 같다고 입소해도 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린다.

한 고비 넘고 더 큰 고비는 지수가 시설 입소를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려서 시설에서 자랐는데 그때의 경험이 안 좋았는지 시설은 절대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감할 수 없는 지수는 무조건 자긴 시설은 안 간다고 우겼다. 고집이 어찌나 쎈지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출산은 다가오고 지역사회에서 아이를 낳아보겠다고 알아보는 산후 돌봄이나 산후조리원 역시 사람이 없거나 자리가 없어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목사님이 발 벗고 나서 설득에 들어가셨다. 나도 아쉬운 대로 지수가 살아왔던 시설은 시골 외진 곳에 있었지만 여기는 신촌이라는 핫 플레이스에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지수를 설득했다. 일단 방문을 한번 해볼까? 꼬셔서 애란원에 처음 방문 한 날. 애란원에서 상담을 받고 시설을 둘러본 후 우리는 신촌으로 내려왔다. 이화여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여기가 이렇게 시내 중심가다. 언제든 외출하여 맛집을 갈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찾아오겠다. 사탕발림을 했는데, 어느 부분에 넘어갔을까? 출산을 한두 주 앞두고 극적으로 허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애란원에서 지수는 아이와 5개월을 살았다. 한 달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처음 생각에 비하면 정말 오래 있었다. 사실 그만큼 애란원은 지수와 아기에게 안전한 최적의 장소였다. 사회복지를 하며 사회복지사가 이렇게 고마운 적은 처음이었다. 우선 24시간 당직 선생님이 계신 것이 안심이었고, 상근 간호사가 있었으며 낮시간에는 아이를 잠시 봐주는 보육 선생님이 따로 계셨다. 아이를 케어하는 방법을 교육해 주는 시스템이 있었고 워낙 장애를 가진 엄마들이 많이 오는지라 맞춤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시간에 맞춰 먹어야 하지만 세끼 식사와 간식을 제공했고 아이와 엄마 모든 물품이 지원되었다. 세면대가 있는 단독방을 썼고 화장실은 두 가정이 같이 사용했다. 연결된 병원이 있어서 엄마와 아기 병원 진료도 동행을 해주었고, 교통비, 병원비 일체를 지원해 주셨다. 시설 입소 서류도 따로 준비할 거 없이 입소하면 같이 주민센터 방문해서 처리할 거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워낙 연고 없는 엄마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 내부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문제가 있어서 병원을 원래 살던 지역까지 매우 멀리 다녀야 했는데, 한번 오면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 인데다가 종합병원 검사, 진료 등 반나절이 훌쩍 넘어가는 일이었다. 처음 병원 진료날 너무 걱정을 했는데, 애란원에서 사회복지사든 간호사든 동행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셔서 정말 안심이 되었다. 첫 병원 가는 날 나도 동행을 했는데 아기 뇌초음파가 있어 검사비가 꽤 많이 나왔다. 병원비를 어떻게 하죠? 걱정하니 병원비는 모두 지원된다고 하셨다. 감동이었다.


그래도 시설에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랴 싶어 자주 찾아가야지 생각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가벼워서 걱정이 없어지고 나니 점점 더 생각에서 멀어지고 그렇게 “안심”이 “무심”으로 넘어갈 즈음 지수는 “이제 나가겠다!” “나는 집으로 갈 거다!”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가겠다는 지수를 목사님이 “100일은 지나고,”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으로 붙잡아 놓기를 몇 번 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3월인데 높은 기온을 기록한 따뜻해진 어느 날, 지수와 5개월 된 아기는 애란원을 퇴소하여 지역사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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