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33주 차 공군 보급병의 일기
어렸을 때 국경일이 되면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은 아파트니까 창문 옆에 태극기를 달았고 할머니 집은 주택이니 대문 옆에 달았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태극기를 담아 두었던 파란색 지관통이 기억난다. 학교에서도 올바른 태극기 게양법에 대해 가르쳤고 친구에게도 당연하다는 듯 너희 집도 달았느냐고 물었다. 설날에 떡국, 생일에 미역국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조금 전 부대 외곽을 걸으며 옆에 있는 아파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태극기를 달아둔 집은 한 곳뿐이었다. 같이 걷던 선임분께서 저런 집은 상 줘야 된다고 말할 정도로 거센 바람에도 펄럭이는 깃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파트 벽면이 흰색이라 더 유심히 살펴봤음에도 정말 단 한 곳뿐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아도 이 현상에 대해 의심하는 의견이 나올지는 의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국경일에 빨간 날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방송매체에서 “3.1절이 언제예요?”라는 대사를 통해 무지한 사람을 묘사하거나 3.1절을 삼점일절로 읽는 학생들이 소개되곤 했다. 3월 1일이 왜 국경일로 제정되었는지를 모르는 것은 둘째치고 이를 제대로 읽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니 국기를 거는 등 선조의 노력을 기리는 것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 구절을 읽으며 위와 같은 무지를 저지른 사람을 비웃고 있지만 삼일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이유가 헷갈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서 네이버에 검색해보길 바란다.
군대에 오고 난 후 국가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저녁 6시가 되면 전 부대에 애국가가 울리며 군대의 시간이 잠시 멈춘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5시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에는 부대원 모두가 태극기 방향으로 서서 부동자세를 취한다. 정식 명칭은 ‘국기하강식’이고 우리는 ‘스턴 타임’이라고도 부른다. 잠시 동안 애국가와 내 머릿속의 생각들만 들으며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린다. 1989년까지는 군부대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국기하강식을 진행하여 전 국민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표했다고 한다.
1년 전까지는 나에게도 삼일절은 그저 쉬는 날에 불과했다. 3월 2일 개강을 준비하며 술로 가득한 개강 전야제를 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국가를 지키는 시간을 보내며 내가 누렸던 자유의 시간 뒤편에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졌다. 그저 교과서 속 열사들의 노력을 나열한 텍스트를 외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내 모습들과 생각들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에 대해 한 번 더 감사함을 보내기도 했다. 아직 휴전 상황이고 북한의 도발이 멈추지 않고 있기에 평화라는 단어를 함부로 써도 되는지는 조심스럽지만 그들에 비해서 아직까지는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전쟁 상황을 지켜보고 하루하루 속출하는 사상자와 떨어지는 폭탄들을 뉴스로 접하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말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지금의 안정을 가져다준 선조들에게는 어떤 손짓을 보이고 있는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목소리 높인 선조들의 노력을 잠시라도 머릿속에 마음속에 담았으면 한다. 단순히 태극기를 거는 것만이 그들을 기리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저 쉬는 날로만 생각하고 넘기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나 또한 지금의 마음가짐을 오래오래 지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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