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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pilot Dec 13. 2021

최초의 객실 승무원 ‘에야 껄’ 이야기

우리나라 항공 비사 2

     

‘수정처럼 투명해 보이면서도 놀라운 깊이를 지닌 듯한 하늘, 그 푸르름 위를 흐르듯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마냥 동경하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이 나를 스튜어디스로 만들었다.’ 1976년 <경향신문>에 실린 어느 여승무원 이야기처럼,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여성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한 번쯤은 동경했을 만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기내에서 승객들의 식사와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객실 승무원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항공법에서는 ‘항공기에 탑승하여 비상시 승객을 탈출시키는 등 안전업무를 수행하는 승무원을 말한다.’라고 정의하여 객실 승무원의 주 임무가 안전업무 수행임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질 좋은 승객 서비스를 위해 항공사별로 항공법에 규정한 승객 50명당 1명의 객실 승무원의 탑승 외에도 추가로 승무원을 탑승시켜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객실 승무원은 남성

세계 최초의 객실 승무원은 하인리히 쿠비스(Heinrich kubis)라는 남성이었다. 유럽 호텔에서 일하던 그는 비행선 ‘체펠린(Zeppelin)’으로 상업운항을 시작한 독일 데라그(DELAG) 항공사에서 1912년 3월부터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28년 독일의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사가 베를린부터 파리 구간까지 남자 승무원을 채용하여 객실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제공했다. 당시 유럽에서 귀족들의 고급 서비스를 담당해 온 사람들 대부분이 남성들이었고,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하여 기내에서 간단한 음료와 다과를 서비스했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여성 객실 승무원은 간호사

여성 객실 승무원이 여객기에 탑승한 것은 유나이티드 항공의 전신인 보잉 항공수송회사(Boeing Air Transport Co.)가 최초였다. 1930년에 간호사 앨런 처치를 1개월 조건부라는 테스트 케이스로 채용, 탑승시킨 것이다. 당시 항공여행에 익숙하지 않던 승객들이 겪게 되는 멀미, 고고도에서의 신체변화 등 비행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적절한 의료조치를 위해 간호사가 필요했고, 여성 객실 승무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대한 호평으로 항공사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이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당시 객실 승무원에 대한 호칭은 유럽에서는 ‘에어 호스티스(air hostess)’, 미국과 일본에서는 ‘에어 걸(air girl)’, 관광안내원(courier) 등 다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객실 승무원 '에야 껄'

<조선일보> 1937년 7월 13일 자에 의하면 “1937년 7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객실 승무원 공개 모집이 실시됐다”라는 기사와 함께 “시내 장곡 천정(長谷川町·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일본항공수송회사 경성 영업소는 ‘에야 껄’을 모집했고, 시내에서 어여쁜 처녀들만 약 칠십여 명이 응모했다. 이 시험을 통해 한 사람의 ‘에야 껄’이 선발되었고, 이 아리따운 처녀야말로 조선 항공계의 최초에 피는 한 떨기의 꽃이 아닐 수 없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를 근거로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객실 승무원은 당시 선발된 에어 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해방 후인 1948년 당시 국내에 취항하던 미국의 노스웨스트(Northwest) 항공사가 한국 여성을 승무원으로 채용해서 일반인들에게 승무원이란 직업과 ‘스튜어디스’라는 생소한 단어가 알려졌다. 이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22일부터 KNA가 임차 도입한 DC-3로 서울-광주, 서울-군산 간 노선을 운영하면서 여승무원 15명을 선발해서 탑승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당시는 주 고객이 UN군들이어서 주로 UN군들의 접대에 익숙하고 영어가 가능한 기지촌 여성들이 주로 응시했다고 신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국영 대한항공공사 1기 객실 승무원 공개 모집

객실 승무원의 직업이 본격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2년 8월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1기 객실 승무원 공개 모집을 시작하면서 3명(배경자-이화여대, 손영민·김청자-한국외국어대)의 여승무원을 배출하면서부터다. 이후 AK(Air Korea)에 근무하던 이영실, 김정숙 등이 합류하면서 1962년 12월 2일부터 서울-부산 등 6개 노선에 이들을 탑승시켰다. 당시 승무원 공채 자격기준은 20∼23세의 미혼에 영어와 제2외국어에 능통하며 2년제 대학 이상 수료, 용모 단정하며 160∼165cm의 신장을 가진 자 등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었는데도 무려 210명이 응시하는 등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후 여승무원의 숫자가 늘어나, 1966년 1월에는 홍콩의 캐세이패시픽(Cathay pacific) 항공사 요청으로 대한항공공사 소속 여승무원 2명, 곧 이립분(李立粉), 천금주(千錦珠)가 기술수출 인력으로서 홍콩에 진출하기도 했다.


초기엔 미혼 여성만 객실 승무원 근무 가능

객실 승무원 채용이 대폭으로 늘어난 것은 1969년 4월 대한항공이 민영화되면서 20명을 공개 채용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도 남자 승무원을 모집했으며, 대한항공의 사세가 확장되면서 객실 승무원 숫자도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인하공업 전문대학에 항공운항학과가 개설되어 객실 승무원 전문교육기관이 생겼다.

민항 초기에는 미혼 여성만이 객실 근무를 할 수 있어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승무원 평균 근무기간은 2년 7개월, 평균 연령은 24세였다. 그러다가 1978년부터 기혼자도 계속 근무가 가능해졌다. 1981년 자료에 의하면, 전체 여승무원 822명 중 결혼한 여승무원이 8명으로 전체 인원 대비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 것을 보면, 기혼여성의 사회진출이 보편화된 현재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국내 항공사의 객실 승무원 숫자가 1만 명이 넘고, 해외 항공사에 취업한 숫자도 1천 명에 달한 만큼 이제 객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승객에게 전하는 미소만큼이나 그들은 승객의 안전과 보다 나은 서비스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승객의 “수고했어요.” 하는 한마디에 기뻐하고, 때로는 “어이” 라며 무시하듯 부를 때는 기분이 언짢기도 하지만 늘 밝은 미소로 화답을 하는 그들. 그들이 있어 항공여행이 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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