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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커의 프로페셔널

월즈 복기방송을 보고

by rootsoo

2025년 롤(League Of Legends) 월즈에서 페이커 선수가 이끄는 T1이 또 우승했다. "또"라고 쓴 이유는 페이커가 작년에도 우승했고, 그 전년에도 우승해서 세 번 연속 우승기록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번 우승으로 페이커는 월즈 6회 우승이라는, 사실상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기록을 썼다. e스포츠 특성상 언젠가는 롤의 인기도 시들해질 텐데, 아마 롤 리그가 없어질 때까지 페이커의 기록을 깨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 기자가 페이커에게 "e스포츠도 스포츠라고 생각하냐"는 식의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페이커가 이렇게 답했다. "몸을 움직여서 활동하는 게 기존의 스포츠 관념인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경기를 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많은 분께 좋은 영향을 끼치고 경쟁하는 모습이 영감을 일으킨다면 그게 스포츠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더니, 롤 실력만큼이나 답변도 훌륭하다.


페이커의 말대로 스포츠는 영감을 준다. 특히 위대한 스포츠 스타는 나에게 항상 큰 자극을 준다. 어떤 종목이든,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재능 있는 선수가 성실함과 정신력, 승부욕까지 두루 갖춰야만 비로소 세계적인 선수가 된다. 거기에 시대의 흐름, 운, 우주의 기운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까지 맞아떨어져야 올타임 넘버원, GOAT(Greatest of All Time)가 된다.


이런 선수들의 이야기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먼저 성실함이다. "성실하다", "게으르다", "훈련을 열심히 한다", "훈련을 소홀히 한다"의 개념은 적용할 여지가 없다. 이미 24시간을 어떻게 쪼개 써야 최고가 될 수 있는지만 고민하는 단계에 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훈련량을 버텨 줄 신체적 능력이 중요하지, 범인들이 하는 "오늘은 할까 말까", "오늘은 그냥 쉴까" 같은 고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그다음은 승부욕이다. 누구에게도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조금은 기형적이라고 할 만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독한 마음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승부욕을 어떻게 다루고 조절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에너지를 건강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쓰는 법까지 터득한다. 이렇게 한다고 모두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스타라면 웬만하면 이 정도 요소는 기본값처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페이커 이야기로 돌아가서, 페이커의 우승보다 내게 더 영감을 준 것은 대회 후 개인방송에서 보여준 경기 피드백 장면이었다. 이벤트로 T1 팬을 방송에 초대해서 함께 훈훈하게 월즈 경기를 복기할 계획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페이커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자기 플레이와 동료들의 플레이를 돌려보면서, 다소 심하다 싶을 만큼 엄격하게 피드백을 했다. 이긴 경기여도, 심지어 잘한 싸움에서도 본인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완벽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지적했다. 옆에 초대된 팬분의 존재를 순간순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불편한 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역시 GOAT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그런 프로페셔널함, 장인정신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어느 순간에는 프로다웠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마추어 같았다. 공부할 때든, 일할 때든, 주식 시스템을 만들 때든, "이만하면 되겠지. 적당하다" 생각을 하면 잘 된 적이 없다. 반대로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야 "이제 진짜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다. 티끌의 오점도 허용하지 않겠다"라고 마음먹고 독하게 달려들면, 그제야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경험적으로 안다. 세상에 어떤 일이든 눈에 띄는 성과를 내려면 그만한 장인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대충 하다가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나는 또 언제나 게으르고 나태해서, 그리고 또 몇 번의 성과를 거두고 나면, 또 효율을 찾고 적당함을 찾는다. 그리고 또 실수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에게는 늘 반복되는,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어려운 사이클이다. 그래도 페이커의 방송을 보고 또 마음을 다잡으며 글을 써본다. 오늘 나는 얼마나 프로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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