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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Jan 02. 2024

당신의 바다는 어떻습니까?

- <모비 딕>의 에이허브 선장과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의 고백

 



  에이허브 선장의 고백


  나는 별다른 목표도 없이 살아온 뱃사람이었소. 그저 호구지책으로 바다로 나가서 고래 등에 작살을 박아 끌어올리는 게 전부였지. 그나마 술이 없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거야. 꿈은 없고, 관성에 익숙해진 삶. 중요하지 않은 건 그냥 흘려보내는 게 나의 뛰어난 능력인 데다, 나한텐 중요한 일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천하태평의 인생이었지. 눈만 뜨면 쓸데없는 짓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들이 각다귀보다 많은 걸 보면 나는 현명하게 산 게 분명하지. 

  그러다 적수를 만났지. 모비 딕. 이 녀석은 보통 녀석이 아니었소. 다른 고래 같으면 작살이 등에 꽂히면 바로 바다를 포기하고, 끌려오기 마련인데 모비 딕은 마치 옆구리에 꽂힌 작살마저 훈장처럼 여기고 더 호기롭게 바다를 누비고 다녔소. 바다는 그의 세상이었고, 그 녀석은 바다를 지배하는 챔피언이었지. 작살을 맞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래. 선장인 나를 아무렇지 않게 능욕하고, 거기다 다리 한쪽까지 가져간 이후에 모비 딕은 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지,    

  아무리 발광해 봤자 우리는 인간에 불과해. 나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일찍 눈치채고, 자기모멸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지. 희망 같은 건 없었어. 희망을 지워냄으로써 희망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희망도 생기고, 구원의 길도 열린 거지. 모비 딕이 나타났으니까. 그 녀석은 내 몸과 마음까지 수탈해 갔으니 그보다 더 선명한 목표가 어디 있겠소. 흐릿하게 남아 있던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끊게 하고, 오직 증오와 분노로 차오르게 만들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구원이었지.      

  사흘 동안 모비 딕과의 혈투는 두려움이었고, 동시에 희열이었소, 모비 딕은 고래로서의 품격과 권위를 보여줬고, 나 또한 최후까지 뱃사람으로서의 온몸을 후회 없이 던져버렸지.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거꾸러졌다 해도 정신적으로 살아남는 경우도 있어. 그래서 세상에 빛으로 남기도 하지.

  나도 없고, 모비 딕도 없는 바다. 나는 모비 딕의 찢어진 가슴이고, 모비 딕은 나의 잘린 다리와 거꾸러진 인생이지만 우리가 아예 없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니지. 밀려오는 파도에, 해가 뜨고 지는 바다에, 에이허브와 모비 딕의 숨결이 남아 있을 터이니 꽤 괜찮지 않소?

  분명 내일 아침은 분명히 더 생생하게 퍼덕거리는 바다가 될 테지. 태양도 더 밝게 떠오르고.




  산티아고의 고백     


  내가 아침에 일어나 바다로 나가는 건 변하지 않는 일상입니다. 고기를 잡아 항구로 돌아오기를 수십 년 동안 해왔죠. 바다에 나가는 게 세상에 빛을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바다에 대한 길과 지혜를 후세에 남겨줘야겠다는 뜻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청새치와 만세기를 잡아 그걸로 먹고사는 게 전부였죠. 어떤 때는 나한테 남아 있는 게 불면증과 가난, 그리고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굴욕뿐이지만 그렇다고 어떡하든 돈을 움켜줘야겠다는 복수심 같은 건 아예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 같은 건 더더욱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건 원망하거나 분석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죠. 

  고기를 많이 잡든 한 마리도 잡지 못하든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갔다가 무사히 항구로 돌아오는 게 유일한 나의 소임입니다. 봄이 오면 훈풍을 맞으며 만세기를 잡았고, 여름에는 태풍을 만나기도 했지만 청새치를 몇 마리 잡아 서 천둥과 벼락이 오히려 개선행진곡처럼 들리기도 했죠. 가을에는 서늘해진 바람을 쐬며 창창한 하늘을 보며 유유자적하는 호기를 부렸고, 겨울에는 드세진 파도와 칼바람에 쓰디쓴 맛을 본 게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성취감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것도 아닌 의무감으로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 같이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렇게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내다가 조각배를 타고 나가 5미터가 넘는 청새치와 사흘 밤낮을 싸워 기어이 잡았습니다. 손에 상처가 나고, 배가 뒤집힐 뻔한 위기도 있었죠. 청새치를 밧줄로 배에 묶어 항구로 돌아오던 중에는 상어 떼를 만나 힘들게 잡은 청새치를 다 뜯겼습니다. 뼈와 머리만 겨우 남았죠. 그걸 본 사람들은 난리가 났죠. 나는 화가 나도 소리 지르지 않고, 배가 고파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못 잡았다고 움츠러들지도 않았죠. 애정보다 의무감이 있었기에. 인생은 어쩌면 적당히 눈길을 끌게 꾸며진 소모품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죠.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인간은 보잘것없는 동물이 될 뿐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어떤 시간이고 받아들여 핑계 대지 않는 건 나의 하루가 신앙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싱크대 위에 설거지를 해야 할 그릇이 잔뜩 쌓여 있네요. 그건 아직 내 인생의 유통기한이 남아 있다는 증거겠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잠을 청해야겠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남들한테 기억이 되든 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게 중요하죠.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는 실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 것. 실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죠. 어쩌면 애초부터 없는 걸 보려고 한 건 아닌지요? 욕심은 환상을 낳고, 환상은 허망한 거죠. 

  바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걸 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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