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면 느낌이 한 줄로 요약이 되죠. 예를 들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다,’ ‘악몽을 꾼 것 같다.’ ‘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 같다.’ ‘천국을 보고 온 것 같다.’ ‘첫사랑을 만난 것 같다.’ 등등요. 물론 ‘엿 같은 영화’도 있죠.
김세휘 감독이 연출한 <그녀가 죽었다>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다이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이소에는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아주 저렴합니다. 싼 가격으로 질 좋은 상품을 고르기도 하지만 어떤 건 사자마자 재활용 통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다이소의 장점 중의 하나는 물건들이 용도별로 분류가 잘 되어 있고, 같은 기능의 물건도 비교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죠. 교환이 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요.
먼저 <그녀가 죽었다>를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스릴러와 추리를 섞어놓았는가 싶었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는 범죄 액션물에 가까운 영화였다고 정리를 했습니다. 사이코 기질의 캐릭터로 적당히 믹싱을 했고요. 추리물의 성격을 띠고, 그런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관객들이 추리할 정보가 내레이션으로 다 제시되고, 인물들의 동선도 명확하게 드러나 사건이 ‘어떻게 짜였나’보다 ‘왜 그랬을까’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러나 보니 극적인 반전보다 캐릭터와 사건의 논리적 당위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씬으로 인해 후반부로 갈수록 극적인 밀도와 긴장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그라인도 ‘훔쳐보는 욕망을 가진 남자와 돈에 미친 여자가 망가뜨리는 인생’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죽었다>의 매력은 적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관객을 일시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몰입이야말로 시네마 마술에 빠져드는 거니까요.
영화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첫째, 탄탄한 구성이 돋보였습니다. 오프닝 씬으로부터 공인중개사인 구정태(변요한)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한소라(신혜선)의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사건이 극적으로 확대되고, 캐릭터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구정태와 한소라의 내레이션이 지나치게 많다는 게 불편했습니다. 내레이션이 아니라 인물의 표정이나 액션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몰입도와 긴장감은 충분히 유지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관객들에게는 훨씬 더 공포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변사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오히려 과유불급이었습니다. 관객이 추리해야 할 몫을 빼앗긴 느낌이었죠. 어쩌면 이 정도의 정보를 줘야만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요. 아니면 배우의 연기와 표정에 온전히 맡기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걸까요. 내레이션보다 연기자의 표정과 침묵이 만드는 공포와 스릴이 반감돼 내내 아쉬웠습니다.
둘째, 현대인의 일상과 산업이 돼버린 SNS와 인간의 욕망을 잘 버무린 스토리였습니다. 구정태가 집에서 개미를 키우고, 남의 일상을 훔쳐보며, 남의 집의 물건까지 컬렉션을 하는 건 타인을 지배하고, 구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위험한 보충이자 대리충족입니다. 존 파울즈 소설 <콜렉터>에서 나비채집을 하는 남자 주인공 칼리번이 떠올랐습니다. 그건 일방적이고, 소모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죠. 일종의 자기애의 마스터베이션인 겁니다. 그런데 구정태가 위험한 건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해를 주지 않으면 결코 범죄가 아니라는 구정태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도 망가뜨리고, 종국에는 자신마저 파괴시킵니다. 한소라의 캐릭터는 마치 데이빗 핀처 감독이 연출한 <나를 찾아줘>의 여주인공 에이미 던(로자먼드 파이크)과 에드리안 라인 감독이 연출한 <위험한 정사>의 여주인공 알렉스(글렌 클로즈)와 같은 색깔의 캐릭터였습니다. 자살 직전에 관심을 끄는 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원금을 받기 위해 고양이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길고양이 맘으로 변신을 하죠. 무엇보다 정신지체 남동생마저 팔아먹으려고 하다니.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게 돈으로 엮이고, 돈으로 통합니다. 이런 여자를 만나면 기도하는 수밖에요.
“주여, 제발 나에게서 그냥 지나가게 해주옵소서!”
셋째, <그녀가 죽었다>의 매력은 감독이 그 어느 캐릭터에게도 과잉 시선을 주거나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정태와 한소라의 인물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물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런 거죠. 어쭙잖게 비판이나 교훈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상황의 딜레마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려고 한 것뿐이죠. 그야말로 누구나 놓일 수 있는 그런 상황이오.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한 프레임이 아니라 카메라를 보수적으로 고정해서 보여준 게 그에 대한 증거라고 봅니다.
넷째, 한소라가 교도소에 있을 때 기자가 면회를 하고,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소라는 일방적으로 세상에 대해 욕설과 비난을 늘어놓죠. 그건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합리화 같은 것이기도 하죠.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던 기자가 불쑥 묻습니다.
“저 안에서 몸매 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 말에 한소라의 눈빛이 반짝 빛납니다. 원시적인 여성성 혹은 일상성의 회복일까요? 참으로 묘한 표정이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캐릭터가 얼마나 입체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한소라의 역을 연기한 신혜선의 표정을 보는 건 즐거움이었습니다. 밝은 햇살의 봄날의 하늘인가 싶었는데 먹구름 낮게 드리운 하늘이었다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찬 겨울의 하늘 같은 얼굴.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보여주는 연기와 표정, 압권이었습니다.
다섯째, 저에게는 형사 오영주(이엘)가 주는 울림이 컸습니다. 접대용의 화려한 정의감으로 치장한 형사가 아니라 그저 맹맹한 객관적인 프로일 뿐인 캐릭터였죠. 지금도 강남경찰서나 춘천경찰서 형사과에서 근무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오. 그래서인지 그녀의 대사가 오랫동안 남습니다.
가석방이 되어 찾아온 구정태에게 거의 사무적으로 내뱉는 한마디.
“구정태 씨, 당신은 피해자가 아녜요. 범죄자고, 스토커죠.
앞으로 당신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해놨는지 볼 거예요.”
그 말뜻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한 구정태의 표정. 그리고 거리에 서 있는 구정태의 얼굴이 스톱모션으로 잡히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죠. 스톱모션의 구정태의 얼굴이 수많은 제2의. 제3의 구정태로 떠오르는 건 <그녀가 죽었다>가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죠. 여자들한텐 더욱 오싹 했겠죠.
다른 여자의 방을 들여다보려는 자는 악마가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모른 척 할 뿐. 아, 집요하고도 지긋지긋한 욕망.
사족 – 영화의 속도감은 있지만 러닝 타임은 조금 짧다는 느낌.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