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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Nov 26. 2024

영화 <글래디에이터 Ⅱ> 어쩌면 과유불급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는 영화보다 영화적 감성이 훨씬 더 풍성하단 걸 깨닫게 됩니다. 영화적 감성은 거의 숨 쉬는 본능에 가깝죠. 영화적 감성은 때로 오락이나 감동을 뛰어넘어 철학을 구현하기도 합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풍요롭게 하는 건 획일적이고, 정형적인 인간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천착하는 시선 때문입니다.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그런 캐릭터를 통해서 인생을 성찰하고,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호흡하기도 하죠. 그의 영화만이 주는 경이로운 체험이랄까요.



  <글래디에이터 Ⅱ>를 보러 가는 마음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죠. 전작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시적인 씬과 거기에 조응하는 사운드, 입체적인 캐릭터와 완결성을 띤 서사 구조. 거기서 더 보여줄 게 남아 있을까. 날이 바짝 서있는 낫을 숫돌에 계속 갈게 되면 오히려 날카로운 게 더 무뎌지기 마련이죠. 조금이라도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진화는 못하더라도 퇴화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냐.’라는 조롱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글래디에이터 Ⅱ>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옆자리에서 코를 골던 관객은 잠을 깼고, 나는 가는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완전 몰입이 되지 않았고, 극의 흐름이 자꾸 방지턱에 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스토리 진행에 필요없는 삽화들은 생략하라.



  영화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첫째, 로마군이 누미디아를 침공하는 해전 장면은 <벤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다이내믹했습니다. 전편에서는 게르마니아를 쳐부수는 육상전, 이번에는 누미디아를 정복하는 해전. 로마의 힘을 보여주는 오프닝 씬으로는 그만이었습니다. 로마군에 무참하게 아내를 잃은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갖는 분노와 적개심은 극적 동기로 타당하고, 스토리의 추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정치적 야욕이 넘치는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을 만나 검투사로 변신해 콜로세움에 입성하고, 마르쿠스(페드로 파스칼)와 결투하게 되는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만 해도 긴장감은 어느 정도 있었죠. 거기다 어린 시절, 루실라(코니 닐슨)에게 버림을 받은 것에 대한 루시우스의 배신감은 갈등 요인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루시우스의 극한의 배신감과 적개심은 루실라가 건네주는 막시무스의 반지와 마르쿠스의 로마에 대한 충정의 말 한마디로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루시우스가 가졌던 증오심과 배신감은 마치 마리오네트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거기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전투 씬은 스토리의 응집력을 산만하게 흩트립니다. 전투 씬을 장황하게 보여주기보다 루시우스와 마르쿠스, 그리고 루실라의 심리적 갈등을 좀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렸더라면 서사의 완성도는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벤허> 주인공 유다 벤허의 서사가 응집력이 강하고, 극적 공감이 된 건 메살라에 대한 증오와 복수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액션은 벤허의 복수심으로 흡입되고, 관객의 몰입도 높아질 수밖에요. 스토리와 구성의 핵심은 인물이고, 인물 사이의 쌓인 갈등에 대한 해결을 임계점까지 끌고 가서 한 장면으로 보여주면 폭발력은 배가됩니다. <글래디에이터 Ⅱ>에서의 반복적인 결투 장면은 볼거리는 될지언정 긴장감을 흩트려놓고 맙니다. 토핑을 지나치게 많이 올려 정작 아이스크림 맛은 제대로 나지 않는 그런 느낌이오.      



  둘째, 로마가 만든 최고의 사원인 콜로세움에서 벌이는 다양한 검투 장면들은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개코원숭이들과 결투, 코뿔소 등에 올라탄 검투사와 결투, 물을 가득 채우고 상어들이 득실대는 콜로세움 안에서의 해전 등등.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각을 짜릿하게 하는 건 확실하지만 그런 장면들이 스토리의 밀도와 응집력을 얼마나 높여주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영화의 긴장감을 지속하게 하는 건 결투보다 캐릭터 간의 관계와 심리적 요인이 작용이기 때문이죠. 그런 관계와 심리는 이천 년 전의 완료형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에게 환원되기에 더 울림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살아볼 수 없는 로마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해도 그 스토리가 현재적인 확장성을 갖지 못한다면 잘 만들었다고 해도 창조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점이 내내 아쉬운 거죠.



  셋째,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도 있죠. 마르쿠스 장군.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고, 무장으로서의 덕목도 있죠. 거기다 지배자로서의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도 빛이 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패자에겐 비통함 뿐”이라는 대사를 날리는 장면은 전쟁의 자기 파괴적 모순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마르쿠스는 그런 입체적인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죠. 로마 황제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와 게타(조셉 퀸)도 시선을 확 잡아끄는 캐릭터입니다. 사람의 피와 주검을 보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고, 쾌감을 느끼는 자로 거의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죠. 그게 선천적이기보다는 권력 싸움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나타난 증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정치의 역설인 거죠. 정적을 죽이는 칼끝이 최후로 노리는 건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로마 황제의 야심을 가진 마크리누스. 마키아벨리적인 술수와 도박사적인 결단력을 가진 인물로 <글래디에이터 Ⅱ>를 이끌어나가는 엔진 역할을 합니다. 스토리가 지루할 만하면 그의 등장으로 동력을 얻습니다. 덴젤 워싱턴이 이렇게 오버 액션의 연기와 표정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습니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마크리누스의 꼭두각시가 된 늙은 원로원 회원도 인상에 남습니다. 재미로 시작한 도박이 마지막에는 인생을 베팅하게 됩니다. 루실라라는 캐릭터는 모호했습니다. 마르쿠스 어머니로서의 지위는 있지만 모자관계를 느끼게 하는 모성애는 거의 없습니다. 핏줄에 대한 애착과 자신의 과거 행동에 대한 후회,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딜레마를 좀더 선명하게 그렸더라면 스토리가 더 풍성하고, 몰입감도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은 매력적이기도 하고, 강하게 각인되기도 하지만 그게 파편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유기적으로 엮여서 스토리의 밀도와 응집력을 높이기보다 그저 한 장면,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인 수단으로 전락한 느낌이었습니다.   



  넷째, 끝끝내 아쉬운 건 루시우스의 목표가 복수인지 로마의 꿈인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하나로 묶었다는 점입니다. 타깃이 두 개다 보니 집중력도 흩어질 수밖에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딜레마였겠죠. 복수에 초점을 맞추면 <벤허>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로마의 꿈에 집중하면 무미건조한 위인전이 됐겠죠. “정치는 권력을 따른다.” “시민의 자유가 없다면 로마의 꿈이 무슨 소용인가.” 등등의 멋진 대사가 등장하지만 그 대사가 마음의 울림으로 확 다가오지 않는 건 우왕좌왕하는 루시우스의 행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안이 되는 건 대안적 진실의 버블 시대에 힘과 명예의 로마 정신을 끝끝내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입니다. 그건 영화적 메시지를 넘어서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이고, 철학이죠.       



  다섯째,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난 이후에도 OST가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전작에서 한스 짐머의 OST는 청각을 뛰어넘어 온 감각을 흠씬 적셨죠. 막시우스가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손으로 까끄라기를 만지며 밀밭을 걷는 장면과 조응하는 OST는 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글래디에이터 Ⅱ>의 음악을 담당했던 해리 그렉슨윌리암스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은 걸까요. 한스 짐머 사단의 일원으로 알려진 그가 들려준 사운드가 맥을 못춘 이유도 결국은 산만한 스토리에 기인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사족 – 프로타고니스트가 루시우스라면 안타고니스트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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