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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Nov 14. 2024

영화 <청설>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연가

  사랑의 포식자와 욕망의 사냥꾼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샘물 같은 러브스토리를 만났습니다.  <청설>.  관객들이 러브스토리를 볼 때의 심리적 정서는 사랑 본질이나 가치의 문제에 닿아있기보다 자신도 사랑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쉽습니다. 사랑이 만능키도 아니고, 모든 걸 치료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현실이 됐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되죠. 공감과 몰입이 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은 진통제가 되고, 때로는 환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구원인가 싶었는데 지옥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증오의 감정과 쓰라린 상처로만 남는 경우도 있죠. 그걸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는 건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본능적인 감정이고, 감정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취업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다가 보고 싶기도 하고, 라면을 먹다가 그리워하기도 하죠.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불쑥 그리움이 벼락처럼 가슴을 뚫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짝사랑 때문에 사망한 사람 숫자가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숫자보다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누가 뭐라고 해도.

  ‘보고 싶다!’

  한가해서 보고 싶은 게 아니죠. 사랑하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  바람대로 사랑이 이루어져 그게 익숙해지고, 타성에 젖어, 설렘도 없고, 군더더기처럼 관계의 흔적만 남아 있을 걸 충분히 예상할지라도 자신의 현실이 되기 전까진 여전히 사랑은 갈급하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청설>은 유치한 이야깁니다. 그런데 사랑은 원래 유치하고, 유치할수록 더 빛나기도 하죠. 두 사람의 주파수가 통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전파라도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비껴가기 마련이죠. 피아노를 칠 때 손가락의 터치보다 악보를 느끼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도 그렇죠. 사랑에서 뭔가 유물론적인 걸 얻으려고 하거나 자신의 부족한 걸 상대로부터 채우려고 하면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겁니다. 기대나 의지하려는 건 지옥행을 타는 거나 같습니다.

  용준(홍경)과 여름(노윤서)의 사랑이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는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타성에 젖어있던 시간과 공간들이 의미를 갖게 되고, 이기적이었던 일상이 배려와 헌신으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완벽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둘이 만나면서 부족한 걸 채우고, 완성돼 가는 거죠. 그래서 <청설>은 화려하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래가는 향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청설>을 보고 느낀 점     

  첫째, <동감> <클래식> <건축학개론>과 같은 부류의 로맨스이지만 저릿한 서사나 사건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소재도 단순하고, 요란하게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추동력은 장애와 비장애자의 관계이지만 그것도 수많은 난관과 갈등을 헤쳐 나가야 할 고난의 과정도 없죠. <청설>의 가장 극적인 요소는 용준은 여름이, 여름은 용준이 서로 장애라고 오해하고, 그게 용준의 부모인 미정(정혜영)과 인철(현봉식)의 상봉장에서 풀리는 겁니다. 그게 반전이죠. 물론 그 이전에 여름이 청각 장애가 아니라는 복선은 수영장에서 용준이 혼자 독백처럼 말하는 걸 듣는 여름의 표정으로 보여줬죠. <청설>의 매력이면서도 약점인 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둔하게 서로 모르고 있었느냐는 논리적 비판과 뜬금없다는 지적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인물과 인물의 만남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게 필연이었느냐는 거리감을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설>에서는 그 거리감이 좀 부족합니다. 치밀한 구성과 밀도 높은 씬이 그래서 조금 아쉽습니다.     

 

  

  둘째, 우리 사회에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게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청설>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영장 안의 세계와 수영장 밖의 세계,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의 두 계층이 무너지고 우리 사회의 건강성이 회복되었나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장애인의 세련된 대응방식과 방어기제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장애인과 수영장을 함께 쓸 수 없다는 학부모들의 반대에도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고, 능숙하게 대처합니다.

  “세상 참 단단한 거 같아. 그치? 소리 하나 없을 뿐인데 완전 다른 세상이야.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어.”

  여름의 대사이긴 하지만 가을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여름의 그런 현실인식이 체념인지 달관인지 구분이 모호한 반응이지만 그건 캐릭터의 사유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니 어색할 게 없습니다. 용준의 부모인 미정과 인철이 여름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죠.

  “말한다고 해도 속을 답답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청설>의 이야기의 핵심은 맑은 영혼을 가진 용준과 여름의 사랑에 있으니 그 밖의 나머지는 사소한 것일 수밖에요. 인철의 역할을 맡은 현봉식 배우는 <범죄도시4>에서의 권사장이나 <베테랑2>에서의 떡칠이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둥그런 삼각형처럼 아내와 아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는 표정이 참 좋았습니다.

  여름이 청각자애인 여름의 엄마한테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그건 돕는 게 아니라 동정이라며 단호히 거절하면서 손을 내밀면 그때 도와달라고 하는 장면은 짠하고, 서늘했습니다.      


  

  셋째, 용준이 여름과 가을을 데리고 클럽에 가서 노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손을 스피커에 대고 음악의 오롯이 느끼는 씬.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어떻게 음악을 들을 수 있냐는 선입견을 깨는 장면이었죠. 음악이든 그림이든 중요한 건 어떤 감각으로든 느끼는 겁니다. 시각장애는 보지 못하고, 청각장애는 듣지 못한다고 속단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고정된 사유의 틀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장애겠죠.



  넷째, 이유가 절망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때, 특히 상대가 장애라는 점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면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더 큰 아픔이죠. 그런가 하면 성적 욕구를 나타낸 건지 진실한 사랑인 건지 헷갈리게 세태 속에서 뭐가 사랑인지 느끼기는 참 어렵죠. 때로는 사랑을 현학적으로 그리거나 사랑의 의미를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기호화해서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왜곡까지 합니다. 용준과 여름의 사랑이 굼뜨고, 성긴 구석이 있을지라도 맑은 심성 하나만으로도 빛이 납니다.

  “사랑해.”

  한마디 하기 무섭게 바로 침대로 가자고 해석하는 과잉감정의 세태이고 보면 용준과 여름의 사랑은 더 소중할 수밖에요.      


  다섯째, 여름과 가을의 이름만으로도 세상은 푸르고 아름답게 조응합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화면은 온통 푸른 생명력으로 넘칩니다. 봄과 겨울 없이도 영화가 풍성한 건 지나치게 꾸미지 않고, 인간의 본성에 다가서기 때문입니다.      

  

  사족 – 청설(聽說)이 ‘내 사랑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과시욕은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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