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 소유와 존재의 인물

by 노란하마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 한참 걸었습니다. 생각이 많았습니다. 예술과 돈, 낯설게 만들기와 기계적인 창조, 생존과 굴욕, 존엄과 폭력, 그리고 소유와 존재. 우리는 예술에 대한 자본의 폭력적인 행태에 대해서 흔히 자조적으로 돈과 예술의 전쟁에서 돈이 이겼다고 말합니다. 모든 게 돈으로 수렴되는 물신주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브루탈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인 에필로그를 되새겨 보면 돈이 정말 예술을 이긴 걸까, 생각이 듭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라슬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미국으로 건너와사촌인 아틸라(알렉산드로 니볼라)의 가구점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미국에 도착한 오프닝 씬부터 영화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습니다. 라슬로의 환하게 웃는 얼굴과 회색빛 하늘에 삐딱하게 눕혀진 자유의 여신상. 라슬로의 인생이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죠.

사업가인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을 만나면서 라슬로는 건축가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드러내게 됩니다. 밴 뷰런과의 첫 만남도 두 인물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대조적인 캐릭터가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시사합니다. 라슬로가 아틸라와 함께 밴 뷰런의 아들인 해리(조 엘윈)의 부탁으로 서재를 만들었지만 밴 뷰런에게 집안을 어지럽혀 놓았다고 호된 질책을 받고, 공사비는 물론 자재값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되죠. 그리고 밴 뷰런이 라슬로를 찾아오게 됩니다. 라슬로가 만든 서재에 대한 세평이 대단했고, 라슬로가 바우하우스 출신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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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서재 장면이 좋았습니다.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빛과 수직의 미학이 물씬 풍기는 책꽂이, 그리고 도서대가 달려있는 안락의자의 조합은 인간의 생활공간 속에 무한한 우주가 들어와 있는 완벽한 설치미술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라슬로의 이력을 알아본 밴 뷰런은 커뮤니티 센터건립 공사를 맡기죠. 그건 밴 뷰런이 예술과 건축학적인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라슬로가 설계한 건축물과 그에 대한 평가를 뒤늦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밴 뷰런이 라슬로의 천재적인 재능을 이해한 게 아니라 세상의 평가가 천재적인 능력을 더 초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밴 뷰런은 라슬로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부럽고, 경외감마저 갖게 할 정도였죠. <아마데우스>에서 보통사람의 챔피언인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 대해 가진 질투와 증오심은 신이 얄궂게 천재성을 알아보는 능력만 줬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지만 밴 뷰런은 그런 예술적 고민이 아니라 자본가로서의 탐욕과 속물적인 명예욕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라슬로와 밴 뷰런의 충돌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아니 캐릭터의 충돌이라기보다 라슬로에 대한 밴 뷰런의 인물관계는 지배와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죠. 밴 뷰런의 이런 지배욕과 폭력성은 커뮤니티 센터 건립 현장에서 갈등과 마찰로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라슬로의 어투가 구두닦이 발음 같다는 식의 경멸까지 하다가 나중에는 극단적인 인간성 파괴행위인 강간까지 하게 되죠. 라슬로가 자신의 뜻대로 통제도 소유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밴 뷰런은 아예 파괴시켜 버리는 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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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센터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은 애초부터 궤를 달리 합니다. 라슬로는 자신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빛과 어둠을 이용해 신성한 영적 공간으로서의 건축물을 지으려 하지만 밴 뷰런은 건축비용과 건물의 세속적 효용성이 주요 관심사입니다. 라슬로는 커뮤니티 센터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트라우마와 영혼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건축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밴 뷰런은 복잡한 논리가 아니라 간단명료하게 자본주의적 기능성만을 추구합니다. 애초부터 라슬로는 밴 뷰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통제불가능한 인물, 아니 차원이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밴 뷰런은 라슬로의 후원자가 아니라 소유하려 했고, 그게 불가능하자 파괴자로 변신했던 거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 건 밴 뷰런입니다. 그가 어머니를 추모하고,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만든 커뮤니티 센터에서 추악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었으니까요.

영화 3부인 에필로그는 만년의 라슬로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1980년 베니에서 열린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서 라슬로는 건축가로서의 명망을 인정받죠. 하지만 밴 뷰런의 삶은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습니다. 그게 존재와 소유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존재는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영혼불멸로 이어집니다. 예술적으로 승화된 개인의 역사적 경험이 현재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미래에까지 확장됩니다. 예술의 항구성이 실현되는 거죠. 그건 신앙 같은 겁니다. 그런 신앙이 없다면 예술은 그저 한갓 다이소에 있는 상품이나 다를 게 없겠죠.


<브루탈리스트>의 인상적인 장면들


첫째,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과 어긋나게 가로로 펼쳐지는 오프닝 크레딧과 사선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건축 도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째, 커뮤니티 센터를 설계할 때, 빛과 어둠을 이용해 해의 시간별 이동에 따라 십자가 형태가 나타나도록 한 구조적인 설계는 경이로웠습니다.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데도 영화적으로 영적 체험을 가능케 해 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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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탈리아의 대리석 채굴현장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압권이었습니다. 특히 밴 뷰런이 대리석에 얼굴을 대고 넋을 잃은 장면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극치이고, 허세에 찬 미적 열망이 폭발한 거겠죠.

넷째, 휠체어를 탄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의 강단의 표정이 극적 에너지를 불어놓고, 조피아(래피 캐시디)의 말없는 표정 연기가 호기심과 안타까움을 더 배가시킵니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한 가장 아픈 상처가 조피아의 침묵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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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과거의 사진과 영상기록으로 허구적인 인물을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가의 능력입니다.

여섯째, 영화 중간의 인터미션(intermission)은 그냥 쉬는 시간이 아니라 1부와 2부를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마치 시의 연(stanza)과 연 사이의 빈 여백처럼요. 거기에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기억에 남는 대사.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가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

“정육면체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직접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사족 – 라슬로 토스의 재능은 낭중지추(囊中之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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