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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겨울잠> <세 마리> : 구교환을 만나다

by 노란하마

<겨울잠>

단편영화 <겨울잠>은 이진우 감독이 2012년에 만든 작품입니다. <겨울잠>은 특별한 사건도 없고, 극적 긴장을 느낄만한 인물 관계나 서사 구조도 없이 백팩을 멘 주인공 구병(구교환)에 앵글을 맞춰 카메라가 따라갈 뿐입니다.

오프닝 씬은 구병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떠나긴 전에 핸드폰의 벨이 계속 울리지만 이를 받지 않고, 배터리를 빼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자전거 여행의 방향을 무조건 남쪽으로 향하지만 별다른 이유나 목적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뭔가 잘 될 것 같다는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대사 한마디만 있을 뿐이죠. 남쪽은 유토피아의 은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 울리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버리는 건 그가 관계를 맺었던 이전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고요. 그런 계기는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절연을 당했든가 대학에 대해 회의가 들었거나 알바를 하던 직장에서 겪은 배신감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불쑥 삶에 대한 충동적인 허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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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은 사건 없이도 화면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겨울은 나무의 영혼을 볼 수 있죠. 회색빛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 칼바람이 이는 황량한 들판, 수확을 다 끝낸 논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방황하는 젊은이의 정신과 자연스럽게 조응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납니다. 조송(문창길)이라는 노인. 구병은 다리에 근육통이 생겨 자전거 타기가 너무 힘들어 기차를 타고 가기 위해 자전거점포에서 자전거를 팔려고 하지만 주인은 5천 원 헐값에도 매입하려 하지 않죠. 그때 자전거점포 안에 있던 노인이 구병의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에 가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집으로 가던 중 만나는 사람마다 구병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집에 데려가 밥상을 차려주죠. 식사가 끝나자 구병에게 칼을 하나 건네줍니다. 그 칼은 노인이 젊었을 때 대나무 끝에 묶어 고래를 잡았던 것이었죠. 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방에 들르는데 노인은 여주인에게 구병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또 자랑합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여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냉장고 안에서 소주를 꺼내 마십니다. 여주인이 계속 말리자 소주병을 든 채 밖으로 도망가죠. 구병은 여주인으로부터 노인이 젊었을 때, 고래를 잡는 용맹한 선원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인을 찾으려고 구병과 여주인은 다방 밖으로 나옵니다. 노인을 찾지 못하자 구병은 다방 여주인이 시키는 대로 노인을 향해 소주를 많이 마시지 말고, 반 병만 마시라고 소리칩니다. 잠시 후 반쯤만 마신 소주병을 들고 노인이 다방으로 들어옵니다. 노인은 구병을 기차역에 바래다주면서 3만 원을 건넵니다. 자전거 값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였죠. 기차를 타고 떠나기 전에 구병은 편의점으로 뛰어가 소주 3병을 사서 노인에게 건넵니다. 한꺼번에 다 마시지 말고, 조금씩 드시라는 말과 함께. 노인의 얼굴에서 화사한 꽃이 핍니다. 그리고 구병이 서있는 기차대합실 안의 벽면에 걸린 액자에 카메라 앵글이 맞춰집니다. 커다란 고래등에 작살을 꽂은 선원들이 항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노인은 가고, 구병은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기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면서 Fa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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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을 보고 느낀 점 몇 가지

첫째, <겨울잠>의 겨울잠은 정지나 휴면이 아니라 침잠과 성찰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관념이 아니라 타성에 젖은 현실을 떠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인연과 관계로부터 시작됩니다. 겨울이라는 시간과 남쪽이라는 공간, 그리고 만난 노인. 시간(時間)과 공간(空間)과 인간(人間)은 모두 사이(間)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는 관계로 엮이고, 그 관계는 존재를 규정하기도 하죠. <겨울잠>은 떠남 – 만남 – 돌아옴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를 통해 인생에 대한 통찰을 하고, 사람 사는 사회의 우주론적인 인연을 깨닫고, 다시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거죠. 일종의 정신적 성숙을 위한 통과제의인 셈이죠. 젊은 시절에는 치기 어린 감정에 사로잡혀 동해로 고래사냥을 하러 가겠다는 경우도 있고, 오지의 산사로 들어가거나 아프리카의 세렝게티로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 상투 헤어스타일을 한 구교환의 풋풋한 표정과 온갖 지나온 세상사가 다 압축된 듯한 얼굴의 문창길의 표정이 멋지게 대비를 이룹니다. 떠나는 자와 머물러 있는 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가는 자와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는 자,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찾는 자와 꿈을 현실에 다 묻어버린 자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어떤 논평도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더 울림이 크고, 그 깨달음은 오롯이 보는 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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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화면이 전반적으로 조금은 어설프게 보이고, 조명도 어둡죠. 편집도 능숙한 장인의 기술이라기보다 성긴 느낌이 드는데 그것조차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미장센처럼 와닿습니다. 특히 몇몇 장면의 섬세한 연출은 감독이 사람을 헤아리는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줍니다. 구병이 노인한테 받은 3만 원을 가지고 편의점에 가서 소주를 사는 장면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간의 정으로 압축됩니다. 한 병을 샀다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두 병을 더 사는 장면은 근원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의미로 확대됩니다. 사람이 우주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구병이 노인과 함께 집으로 갈 때, 굴다리를 들어가기 전에 잠시 동안 망설이는 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자 이니세이션으로서의 은유로 느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기차역 대합실 안에 걸린 고래잡이 선원들의 사진 액자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이어서 구병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구병의 남쪽 여행이 완성되는 깨달음의 장면이었죠. 목적 없이 떠난 남쪽 여행에서 <모비딕>의 에이 허브 선장 같은 인생을 만났으니 이보다 더 멋진 게 있을까요.



<세 마리>

이옥섭 감독이 2018년에 공개한 단편영화입니다. 제목 <세 마리>부터가 도발적입니다. ‘세 사람’이 아니라 ‘세 마리’가 된 건 인간이 아니라 동물적인 차원으로 격하시킨 것이니까요. 시니컬한 야유죠. <세 마리>에 등장하는 인물인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구교환)와 이대 앞 옷가게 종업원 달기(심달기)의 캐릭터가 심상찮고 독특합니다. 매력적으로 끌리기보다는 비호감에 편집광적인 면까지 있죠.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인 주인공은 세차장 알바생의 짝사랑에 빠져 매일 같이 세차하는 게 주요 일과입니다. 황사가 몰아쳐도 세차, 차가 긁혀도 세차, 심지어 차가 고장 나면 제일 큰 고민은 공장에 맡기는 게 아니라 세차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겁니다. 알바생한테 고백을 한 것도 아니죠. 혼자만의 열정인 거죠. 터널 세차할 때 마무리로 파란불이 켜지는 걸 알바생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줬다는 그린라이트로 과장하는 정신승리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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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앞 옷가게 점원인 슬기는 옷 파는 건 건성이고, 머릿속은 온통 성악가 오빠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런 슬기가 키우는 반려견 겨울이 있습니다. 한때 집을 나갔다 돌아온 겨울이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슬기가 동물상담사한테 도움을 청해서 만나게 됩니다.

달기네 집 거실에서 동물상담사와 슬기, 그리고 겨울이의 본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슬기가 동물상담사를 부른 목적은 겨울이의 심리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사실은 얼마 전에 겨울이를 돌봐준 성악가 오빠에 대한 흔적을 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황사가 심한 날 성악가 오빠는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겨울이를 돌봐줬다고 하지만 겨울이를 데리고 이태원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슬기는 전화로 마치 고문하듯이 성악가 오빠에게 집착을 보이고, 성악가 오빠는 짜증을 내고, 질겁하게 되죠. 동물상담사도 용기를 내어 세차장 알바생한테 고백을 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고 전하죠.

사랑을 갈구하는 청춘남녀가 주파수가 맞지 않아 서로 어긋나는 관계를 통해서 루저가 되고, 사랑의 구차한 이면을 절묘하게 드러냅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고통을 숭고미로 미화하거나 승화시키기보다 나락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건 참 잔인하고, 짓궂습니다. <세 마리>는 사랑이 기쁨과 구원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의 늪이라는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춥니다. 배려는 사라지고 강요와 집착이 사랑으로 왜곡되고, 욕망조차 참사랑으로 포장되는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야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 마리>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

첫째, 캐릭터와 서사, 도발적인 대사와 그 대사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도 뚜렷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소도구를 절묘하게 사용해서 스토리를 리얼하게 이끌고 나가고, 사건의 긴장감까지 높여줍니다. 동물상담사인 주인공이 슬기를 만나러 갈 때, 캐리어를 전동스쿠터처럼 타고 달리는 모습에 캐릭터가 압축돼 있죠. 슬기도 문제적인 인물입니다. 옷 가게 안에서 사장을 기다리다가 사장이 자신의 전화를 안 받는다고 동물상담사인 주인공의 핸드폰을 빌려 걸었지만 사실은 성악가 오빠한테 건 거였죠. 자신의 전화는 받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전화로 건 거죠. 이 정도면 연인이 아니라 깡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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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람과 개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개와 시선을 맞추죠. 그러면 개는 혀로 사람의 얼굴을 마구 핥습니다. 개가 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통역하는 대사 속에 해학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습니다.

동물상담사와 달기의 대화.

“겨울이 말투가 차승원 씨 말투랑 비슷해요.”

“차승원요? 으음, 뭐야. 차승원 싫어하는데.”

겨울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봐 달라고 했을 때, 겨울이의 답.

“산책을 제일 좋아하는데 으응, 자유로운 산책을 원해요. 으응, 목줄도 없고, 사람들 시선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산책하고 싶대요. 만들어진 산책은 의미가 없대요. 산책을 하려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야 된대요.”

슬기가 겨울이한테 털 미는 게 좋아라고 물었을 때, 겨울이의 쿨한 답.

“다 필요 없고, 옷이나 벗겨 달래요.”

겨울이의 대사 속에 인간이 개를 보는 편견과 폭력적인 행동이 고스란히 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셋째, 이 소설의 절정은 성악가 오빠가 겨울이를 데리고 이태원에 가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입니다. 그때 마침 슬기가 옷 가게에서 동물상담사의 전화를 빌려서 걸었던 상대는 옷 가게 사장이 아니라 성악가 오빠였다는 게 밝혀지죠. 슬기는 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받아서 이태원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냐고 따지 듯 묻습니다. 성악가 오빠는 아니라고 하다가 빼박의 증거를 들이대니까 누구한테서 들었냐고 계속 묻습니다. 이태원에 간 사실보다 누구한테 들었냐는 식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거죠. 그게 수컷의 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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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이 폐부에 꽂힙니다.

“짝사랑은 너무 추한 것 같아요. 누구를 혼자만 좋아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지는 않잖아요.”

“내가 상대방한테 표현해야 할 정도면 상대방은 관심이 없는 거예요.“


다섯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터널 세차장에서 이루어지는 수미상관의 수법이 이야기의 완결성을 높이고, 무선 헤드폰 같은 작은 소도구의 활용으로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자연스럽고 탁월하게 드러냅니다. 달기가 동물상담사의 상담비용이 모자라자 친오빠가 사용하던 무선 헤드폰을 돈대신 건네죠.

“이거 닥터드레 맞아요?”

“이게 선이 없다 보니까 자유롭죠.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할까.”

처음에는 너 없이 못 살아하던 태도에서 이젠 너 때문에 못 살아로 변심한 성악가 오빠가 엉성하게 부르는 ‘Lasciar d’amarity(그대 사랑하지 않고는)’와 구교환이 부르는 윤종신의 ‘부디’는 사랑의 변덕과 구차함, 그리고 적당한 애절함이 뒤섞인 다의적인 의미로 와닿습니다. 삶의 에너지가 됐던 사랑이 때로는 변덕스런 짜증으로 전락한다는 걸 몰랐던 걸까요.


여섯째, <세 마리>의 극적 반전은 슬기의 반려견인 겨울이는 진짜 겨울이가 아니었던 겁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건 겨울이가 아니라 다른 개였던 거죠.

“나는 사실 겨울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이 집에서 살아도 되나요?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없습니다. 겨울이로 불러주면 안 될까요?”



사족 – 배우 구교환과 이옥섭 감독을 보면 젊은 시절의 밥 딜런과 존 바에즈가 떠오릅니다. 동지가 있다는 건 내편인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러울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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