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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6편 일별(一瞥)

by 노란하마

한국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복 있는 자들> 길란

문화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친칠라취급주의> 이상하

서울신문 단편소설 당선작 <폴리 사운드> 홍성구

조선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경고문을 쓰는 여자> 차영은

동아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어떤 진심> 박진호

경향신문 단편소설 당선작 <관희는 거울 거울은 관희> 남의현



한국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복 있는 자들> 길란

현실에서 맞닥뜨린 가난을 피하는 그악하고 구차한 지혜. 그래서 더 초라한 최하의 삶과 조우하게 만드는 가난을 절묘하게 그렸습니다. 캐릭터와 서사의 군더더기 없는 결합에서 금세 몰입이 되고, 주제의식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기다 소도구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행간의 탄성을 높여주고, 스토리의 에너지도 배가됩니다. 인물 간의 심리적 대조가 빚어내는 아이러니가 페이소스를 자아내고, 시의성도 있습니다. 주인공 어머니가 성경필사를 하면서도 세상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고, 살레마켓에서 주문한 복숭아를 전략적으로 고객센터에 콤플레인을 넣어 복숭아는 복숭아대로 챙기고, 환불까지 받는 세속적인 타락은 너무 사실적이라 건너뛰고 싶을 정도였죠. 같은 인간으로서 내 안에 있는 부끄러움을 생생하게 끄집어내니까요. 작중인물이 내뱉는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개구리 울음소리와 묘하게 조응이 되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면서 누가 자신을 부정수급자로 신고했는지에 집착하는 심리묘사는 마치 교차편집처럼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난을 수오지심의 철학으로 환원시키는 놀라운 천착과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쏟아놓는 대사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문화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친칠라취급주의> 이상하

나와 가까운 사람들, 너무 가까워 그의 중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어떤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더구나 속물이고, 위선적인 인물의 배려심에 홀딱 반해 존경의 시선까지 보냈다고 하면 제삼자가 볼 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죠. <친칠라취급주의>는 그런 소설입니다. 스토리 전달방식도 고백체의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고백형식은 독자의 신뢰를 듬뿍 받습니다.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인 여진이 차분하게 말하는 어조와는 달리 파괴적이고, 다분히 악마적인 현실로 재현이 되기에 거기서 빚어지는 갭이 격하게 불쾌한 심리적 반응을 유발합니다. 아동발달 치료센터에서 운동치료사로 활동하는 현서의 극단적 이기주의, 겉으로 볼 때는 순하고 귀엽지만 애완용 친칠라가 보여주는 그악한 파괴적 행동, 인기 있는 유명한 의사가 미디어 화면 안과 밖에서 보이는 이중적인 면모. 이런 불의의 행태가 종속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포섭되면 억압도 정당한 것으로 포장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맹목적인 양비론이나 확증편향도 객관, 혹은 정의의 기준이 무너진 ‘우리 편 중심주의’에서 비롯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여진은 여전히 현서의 중력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들 머릿속에서는 그 관계가 부정되기 때문에 소설을 다 읽는 뒤 오는 느낌은 더 오싹합니다. 나 자신도 저렇게 길들여지고, 타성적인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에 무감각하게 살아온 건 아닐까, 싶어서요.



서울신문 단편소설 당선작 <폴리 사운드> 홍성구

사운드 디자이너. 드라마나 게임에서 소리를 만드는 직업이죠. 아니 정정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 사운드 디자이너는 소리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 사물에 들어있는 것을 튀어나오도록 하는 엔지니어입니다. 숨어있는 물성을 드러나도록 상황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덧보탭니다. 소리를 찾아서 그 소리가 어울리는 곳에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죠. 그 소리를 찾는 건 단순히 물리적인 사운드를 포착해서 드러내기보다 사물을 천착하고, 존재의 근원에까지 다가갔을 때, 진정한 소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소리의 물성은 사물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는 건 청각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마음속까지 다가갑니다. 회장이 부탁했던 브이로그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과 조응하는 소리를 입혀 완전한 화면을 완성해 최고의 만족감을 준 건 소리로서 소리를 불러낸 게 아니라 그 여인의 머뭇거리던 모습에서 소리를 이끌어냈기 때문이죠. 또한 살아생전의 아버지의 소리에 둔감하던 주인공이 아버지의 유물인 테이프를 통해서 아버지의 소리와 소음을 들었던 건 어머니가 떠난 뒤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이유는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상업적 목적이든 정치적 열망이든 아니면 습관적 관성이든 스피커 전성시대입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미덕으로 여겨질 정도죠. 하긴 미카엘 엔테의 <모모>도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줘서 말을 잘하는 아이로 불렸죠. 소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깊이까지 재는 소도구의 활용도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소리를 볼 수 있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조선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경고문을 쓰는 여자> 차영은

<경고문을 쓰는 여자>는 알레고리 수법으로 쓴 소설입니다. 알레고리 수법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경우와 경우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예를 들어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토끼는 불성실한 자로 대응되고, 거북이는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한 자로 대응됩니다. 이 우화는 성실한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죠.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에서도 바늘도둑은 좀도둑으로 대응되고, 소도둑은 대도로 대응됩니다. <경고문을 쓰는 여자>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은 집단사회로, 이용객은 시민으로, 경고문을 쓰는 자는 소명의식을 가진 관리자쯤으로 대응됩니다. 경고문은 규범을 벗어난 행위나 부작위에 대한 주의를 주는 것으로 물리적 제재가 따르기도 하죠. 경고문이 넘치는 사회는 시민의식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증표이고, 더불어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도서관에 경고문을 많이 붙는다는 건 이용자들의 공공의식의 부재가 만연돼 있다는 것이고, 금지와 제재로서 집단의 건강성을 회복하겠다는 논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집단의 건강성 회복에 대한 논리는 그 이상의 억압으로 확대되고, 그에 대한 개연성까지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그런 위험성에 노출돼 있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우울했던 것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동아일보 단편소설 당선작 <어떤 진심> 박진호

참 맹맹한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기보다 어떤 점에서는 논픽션처럼 느껴졌고, 청소년이 쓴 일기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런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아놓았을 때, 독자 입장에서 궁금한 건 나머지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입니다. 물론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있습니다. 한국 교육현실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대비되는 기성세대의 추악함과 학생의 순수한 인간성.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내는 그 순수한 우정이 소설의 미학적 요소들에 대한 결핍증을 다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지우의 어머니나 교사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70년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혹 심사위원들이 키에르케고르가 했던 고민, 미학적 표현방식으로 존재를 향유할 것인가 아니면 윤리적 표현방식으로 존재를 실현할 것인가에서 후자의 노선을 택한 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심사의 기준이었다면 수긍할 도리밖에요.


경향신문 단편소설 당선작 <관희는 거울 거울은 관희> 남의현

언어유희에 증발해 버린 가난의 남루함. 가난한 현실을 무개체적이고, 모호한 문장으로 전도시켜 버림으로써 우리의 가난은 빛이 나고 폼이 납니다.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가난에 대해 혐오할 필요도 없죠. 가난에 대해 그 어떤 핑계도 무용하며, 가난은 빛나는 영혼으로 치환되기에 굳이 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듯. 가난으로 영혼은 자유로워지고, 풍성해지는데 거기서 벗어날 이유가 없는 거죠. 이러한 아이러니를 맞닥뜨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상의 <날개>의 한 장면과 오버랩 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인물은 자아분열로 치닿는 게 아니라 현실로 너무 열정적으로 뛰어든다는 점에서 건강하고, 탐욕적입니다. 진저리 칠 정도로.



사족 – 2024 제15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2024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가운데 동아일보로 등단한 공현진 작가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가 수록되었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 동시에 당선한 전지영 작가의 <언캐니 벨리>가 수록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잘 쓴다는 증거겠죠. 신춘문예로 잘 뽑은 건 말할 것도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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