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선과 물질적 욕망을 하나의 컨텍스트 안에 넣게 되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습니다. 섞일 수가 없죠.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선과 욕망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굴러갑니다. 부조리하지만 그게 인생이기도 하죠.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이병헌)를 보며 떠올린 생각입니다.
안정된 직장과 행복한 가정,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속의 멋진 전원주택. 모든 걸 이룬 중산층 소시민의 전형인 만수. 하지만 맑은 하늘에 순식간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과 벼락을 치듯 만수의 비극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실직은 한 인생을 부러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족 전체를 벼랑으로 내몰죠.
<어쩔수가없다>는 만수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의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광기의 연쇄살인을 하는 게 스토리입니다. 가족 지키기를 절대 명제로 삼으면 경쟁상대를 없애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기 합리화도 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절대 명제로 내세우면 그야말로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죠. 힘이 정의로 둔갑하고, 폭력도 정당화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불편합니다. AI로 인한 대량 해고 같은 시대적, 사회적 문제는 개인 간의 관계보다 생산시스템과 관련이 있고, 해결의 방식도 거기에 맞춰야 합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생산구조의 시스템보다 개인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허구의 경쟁과 광기의 범죄에 초점을 맞춰 독하게 긴장을 조성하며, 철저하게 블랙코미디의 헛헛한 웃음을 제공합니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 몇 가지
첫째, 제일 먼저 느낀 점은 잘못 겨눈 표적입니다. 재취업을 하기 위해 만수(이병헌)가 잠재적 경쟁자인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를 죽이고, 제지회사의 반장인 선출(박휘순)까지 죽이는 건 동의하기 어렵고 카타르시스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수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기에 불편한 해프닝이 되고 만 거죠. 만수의 심리와 사고를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고, 만수가 광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지 심리적인 당위성은 확보했더라면 비현실적인 폭력을 통해 AI로 인한 노동문제와 실직으로 인한 사회 문제를 통렬하게 드러낼 수 있었겠죠.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떠올랐습니다. 비현실적인 반복 단순화 생산시스템을 통해 인간이 기계화되어 가는 아이러니를 통해 기계 만능의 생산제일주의를 신랄하게 풍자하죠. 풍자를 통해 비인간성을 비판하면서 즐거운 유머도 풍성하게 제공합니다. 극단의 비현실성을 통해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를 통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노동의 현실을 통찰하게 합니다. <어쩔수가없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져 관객의 불편한 시선은 풍자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채 헛웃음만 나오는 상황극이 되고 말았죠. 블랙코미디가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기는 상황의 즐거운 유머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하듯이 <어쩔수가없다>의 애초 의도는 불편한 비현실성으로 현실의 부조리와 비극을 조우하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불편함에만 머물고 말았습니다.
둘째, 만수의 살인은 행복을 지킨 게 아니라 제 인생을 찍어내는 비극으로 환원됩니다. 모든 캐릭터가 각각의 다른 현실에 놓여 있지만 결국은 만수가 지향하는 목표와 같기 때문입니다. 만수 자신과 세계는 애초부터 하나였던 거죠. 범모와 아라(염혜란)의 사랑은 만수와 미리의 대칭을 이루고, 아라와 준오의 불륜 구도도 미리와 진호의 관계로 대응됩니다. 또한 만수가 아들 시원과 딸 리원에 대한 사랑은 시조가 제 딸을 사랑하는 것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똑같이 균형을 이룹니다. 선출, 범모, 시조의 인물들이 제지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긍심과 철학 또한 만수와 같습니다. 결국 만수의 살인 행위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부정한 것이고, 무너뜨린 거라고 할 수 있죠. 함께 사는 게 아니라 혼자 살아남은 삶에 남아있는 건 지옥입니다.
셋째,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화려하고, 섬세한 미장센입니다. <어쩔수가없다>에서도 눈길을 잡아끄는 배경과 소도구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섬세한 미장센이 서사의 에너지를 증폭시키지도 못하고, 스토리의 밀도를 높여주지 못한 채 겉도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저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었죠. 사운드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뜬금없어 극의 흐름을 끊어놓기 일쑤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수와 범모와 아라가 바닥에 떨어진 총을 차지하려고 서로 붙잡고 싸우는 장면은 페이소스나 긴장감도 없었고, 웃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병헌 감독의 <스물>에서 중국집에서 사채업자인 조폭들과 주인공들이 어우러져 싸우는 맛깔스러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스토리와 상황과 음악은 조화를 이룰 때 빛이 납니다.
넷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끔찍한 경고로 다가왔습니다. 만수는 경쟁자를 다 없애고 취업에 성공했지만 제 자리와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원시림의 살벌한 벌목 장면은 AI 시스템으로 인한 대량 해고의 상징이고, 노동자의 미래는 제지공장의 자동화 시스템 속으로 걸어가는 만수의 모습으로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노동의 종말이 도래하게 되면 노동자의 지위도, 가족의 행복도, 이루어놓은 낙원도 폐허가 되는 건 말할 나위 없죠. 그래서 더 섬뜩한 전율로 다가옵니다.
사족 – 욕망이 들끓으면 어디나 지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