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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10. 2021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1

- 선과 관계로 인화된 행복과 불행의 서사

  - 마이크 리 감독의 <세상의 모든 계절>을 최애의 영화, 인생 영화로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 또한 최고의 영화로 여기기에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실을 예정입니다.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1. 삶과 계절의 미토스

  <세상의 모든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계절이다. 그 계절 안에서 인간관계를 만들고 지속시키는 선은 매너와 신뢰이다. 정해진 시간의 선을 넘어서면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매너와 신뢰의 선이 무너지면 인간관계는 파탄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계절>의 사계절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서사가 파탄으로 치닫는 과정이다. 더구나 욕망을 덧댄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된 봄부터 냉혹한 현실로 귀착되는 겨울까지의 과정이 일회성으로 종결되는 게 아니라 다시 반복 순환된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면서도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다. 봄은 어원부터 시각적이다. 보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뒤섞여 있는 게 봄이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봄은 아름다움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춥고 어두운 겨울 끝에 찾아오는 봄은 희망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계절>에서의 봄은 아름다움과 희망보다는 밋밋한 일상과 슬픔이 한 세트로 어우러져 있다. 마이크 리는 봄의 화려한 색깔 밑에 깔려있는 슬픈 밑그림을 슬쩍 빼서 관객에게 정면으로 내민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년 여성인 자넷의 우울한 표정을 단독 샷으로 첫 장면을 보여주는 게 그것이다. 술주정뱅이의 남편과 무엇이든 뜯어가려고만 하는 딸로부터 소외된 자넷은 우리 이웃의 처연한 표정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의사인 타냐의 조언에 따라 제리에게 상담을 받지만 구원이나 치료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기모멸과 분노를 드러낼 뿐이다. 제리가 10점 만점에 현재의 행복 점수가 어느 정도 되냐고 묻자 단 일초도 주저하지 않고 1점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상담사 제리는 행복해질 여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삶과 고통스러운 시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내면의 절망과 슬픔이 묻어나고, 그녀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도 가족의 회복이 아니라 불면증을 떨쳐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미 기억에서 멀어졌고, 지금은 수면만이 절실할 뿐이다. 봄은 왔지만 불면과 외로움은 더 깊어지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그게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한다. 

  지질학자인 톰과 상담사인 제리에게 봄은 이전의 해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텃밭에 퇴비를 뿌리고, 모종을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일이다. 단순한 취미생활로서의 텃밭농사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노동이고, 농막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도 생활의 일부이다. 땅은 땀 흘려 일하는 자에게 결실을 줄 거라는 믿음이 내면화되어 있기에 톰과 제리는 해마다 성실하게 텃밭을 가꾸고 그에 대한 보상도 받는다. 게으르지 않은 중산층의 일상이 텃밭에서 펼쳐지고, 부엌의 풍요로 이어지는 것이다. 때맞춰서 파종하고, 부지런히 키워 수확한 작물로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 올리는 일상을 통해 행복은 밥상 위에 있다는 진실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에게 봄은 계절이 주는 배분적 정의에 따라 행복지수도 딱 그만큼 균형에 맞게 보상을 받는 것일 뿐 넘치지도 않고, 결핍은 더욱 보이지 않는다. 

  메리에게 봄은 우연의 계시로부터 인생을 바꿔보려는 들뜬 감정을 갖게 한다. 펍에서 한 남자에게 관심의 시선을 보내다가 그 남자의 애인이 나타나자 이내 실망하는 메리의 눈빛은 안쓰럽고 허망하다. 제리가 ‘올해도 정원을 버려둘 거야?’ 하고 물었을 때, 메리는 ‘아픈 곳 찌르지 마.’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남자임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제리의 아들인 조에 대해 슬쩍 질문을 하고, 차를 살 계획을 과장해서 말하는 건 행복에 대한 욕망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행복을 이룰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을 과장되게 합리화시킨다. 지금 자신은 정원이 딸린 집과 좋은 직장, 건강한 몸에 간섭하는 이도 없기에 정말 만족한다고 말하지만 술에 취하자 ‘지금 나한테 남은 게 뭐가 있냐고!’ ‘벌써 집 한 채 장만했을 나이에 좁아터진 셋집에서 살고 있잖아.’ ‘지지리 복도 없지.’ 하는 한숨과 푸념을 늘어놓는다. 메리한테 봄은 희망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얇은 베일을 벗겨내면 외로움과 슬픔뿐이다. 

  봄에서 제리의 동료인 타냐가 임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예사롭지 않다. 봄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이다. 생명의 탄생을 암시하는 타냐의 봄은 겨울에 진행되는 린다의 장례식과 대비되는데 이를 통해  순환하는 우주론적인 생명관을 보여준다. 봄과 겨울은 인간의 숙명인 탄생과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조응되며, 이는 영원히 반복 순환한다. 인간은 그 반복 순환하는 사이클 안에서 행복을 누리거나 불행을 겪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메리 역을 맡은 레슬리 맨빌


  · 여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톰에게 친구인 켄이 찾아온다. 켄과 메리는 데칼코마니이다. 켄이 톰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는 건 이층의 화장실인데 그건 이미 봄에서 메리가 했던 행동의 재현이다. 켄이 음식을 먹으면서 과장되게 칭찬하는 것도 메리가 톰의 부엌에 있는 냉장고를 보면서 ‘뭐가 이렇게 많아 내건 텅 비어 있는데.’라는 푸념과 다름 아니다. 화장실과 부엌은 그 집의 경제적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허겁지겁 이층 화장실을 찾는 것과 부엌에서 보이는 행동을 통해 카메라의 앵글 밖에 있는 켄과 메리의 곤궁한 삶이 충분히 유추되고, 상상이 된다.       

  켄은 술과 담배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 간신히 지탱하고, 열패감에 빠져 불행한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것도 메리의 행동과 비슷하다. 켄에게 톰은 좋은 친구이지만 그의 행복을 함께 공유할 수는 없다. 과거 어린 시절부터 함께 쌓아온 추억이 있고, 현재도 가까운 친구 사이지만 행복은 톰이 나눠줄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고, 그건 시혜를 베푼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시혜를 베풀어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던 메리의 작고 빨간 차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트러블 메이커가 될 뿐이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슬픔이 다 떨어져 나가고, 자신의 인생도 멋지게 완성될 거라는 메리의 자기 과시는 고통만 더 늘어나는 현실로 다가올 뿐이다. 특히 메리의 화려한 분홍색 치마와 머리에 꽂은 노란 꽃도 그녀를 행복으로 견인하지 못하고, 초췌한 서글픔으로 여름을 수놓을 뿐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면 텃밭은 풍성해져 가지만 인간관계의 고통스러운 연민은 불가피하게 반복되며 지속된다는 점에서 냉혹한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톰 역을 맡은 짐 브로드 벤트 

 

  · 가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오면 톰과 제리의 텃밭은 여러 작물들이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결실은 부엌과 식탁 위에서 빛을 발하고, 풍요를 누리는 이는  자족과 행복의 표정을 짓는다. 그건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일궈온 노동의 정당한 대가이다. 다른 사람의 잉여 노동을 착취한 것도 아니고, 탐욕스럽게 자연을 착취한 것도 아니다. 톰과 제리의 부엌은 언제나 과잉도 결핍도 아닌 적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균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반복적인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습관은 효율성으로 일상을 통제하고, 통제받는 일상은 궤도를 탈선하지 않고, 균형도 잃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그 지속성이 너무 강해서 떨쳐낼 수도 없다. 

  톰과 제리의 가을 식탁이 더 풍요로운 것은 조의 애인인 케이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케이티의 등장이 톰과 제리한테는 행복이지만 메리에게는 그동안 유지해오던 관계를 위태로운 선까지 몰고 간다. 조에게 은연중 연정을 품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던 메리에게 케이티는 날벼락인 셈이다. 조와 케이티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어떡하든지 조를 자신의 중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무모함은 결국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어버리고 만다. 작고 빨간 차와 조를 연인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메리의 시선은 행복에 대한 물질적, 심리적인 욕구이다. 메리에게 그것은 다른 대상으로 대체할 수 없기에 불행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다. 열렬히 염원했지만 끝내 소유하지 못한 삶의 비극은 갖지 못해서 생긴 불행보다 바라면 안 될 것을 원해서 생긴 불행이기에 그 몫도 오롯이 메리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선 밖에 있고, 남아있는 건 관계의 파탄이고 소외이다.      


                                                      제리 역을 맡은 러스 쉰 


  · 겨울

  겨울은 조락과 침잠의 계절이다. 조락은 생명의 종말이지만 침잠은 새로운 부활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톰의 형수인 린다의 장례식은  행복과 불행의 서사를 뛰어넘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보여준다.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겪는 것은 남은 사람들이지만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소멸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비한 슬픔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유전자의 끊임없는 갱신과 진화로 이어진다. 죽음을 통해 유한성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인간적인 관계의 확장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죽음은 사는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완성이기도 하다. 

  톰의 집으로 오게 된 로니가 메리를 만나게 되는 건 린다의 죽음 때문이다. 죽음이 새로운 관계로 확장된 것이다. 특히 메리가 로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켄을 바라보던 그 시선과는 확연히 다르다. 메리는 로니에게 자신의 누추하고 혼곤한 삶을 스스럼없이 토로한다. 겉치레와 허위의식을 걷어낸 삶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행복을 싣고 달릴 줄 알았던 메리의 빨간 중고차는 이미 애물단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툭하면 펑크가 났고, 와이퍼를 도둑맞고, 속도위반에 제한구역에 주차하는 바람에 견인까지 됐다가 결국은 20파운드를 받고 폐차해버린다.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었던 빨간 중고차는 20파운드짜리 와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상상으로 부풀려진 행복에 대한 기대가 절망으로 뒤바뀌는 건 우리가 흔히 겪는 일이다. 

  겨울의 장례식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시간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메리가 로니와 함께 집안에 있을 때 텃밭에 나갔던 톰과 제리가 돌아오고, 조와 케이티도 집안으로 들어와 대화를 나눈다. 톰과 제리의 과거 로맨스와 여행 이야기, 조와 케이티의 여행 계획이 식탁 위에 즐겁게 넘쳐난다. 행복한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메리는 그 대화 속에 끼어들지 못하고 낯선 타인이 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제리와 메리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연민의 시선마저 사라지고, 철저하게 타인이 된 메리의 얼굴 표정이 관객한테는 전율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톰과 제리, 조와 케이티의 달콤하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소음되면서 움푹 파인 퀭한 눈의 메리 표정이 엔딩의 단독 샷으로 잡힌다. 함께 하지만 메리가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선 밖의 이야기들은 공허할 뿐이다. 오롯이 그녀의 몫으로 남아 있는 슬픔과 외로움은 오프닝에서 보여준 불면증 환자 자넷의 재현이며, 동어반복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이어지는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의 동력은 결국 제리의 삶이다. 제리의 봄은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되지만 여름과 가을은 그녀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이라는 중력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제리의 불행한 삶으로 겨울은 사계절의 마침표를 찍는다. 문제는 불행과 행복이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지만 다른 계절이 온다고 해도 패턴화 된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게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인간의 불가피한 삶이라는 점에서 냉혹하고 잔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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