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하마 Jan 07.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속의 아버지들

-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주된 라이트모티프는 가족이며, 그 가족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성가신 존재의 양가적 감정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아버지 또한 전통적 가부장이나 찌질이 어른 혹은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죠.  

          

 

  <걸어도 걸어도(2009년)>는 10년 전에 소년 요시오를 구해주고 물에 빠져죽은 준페이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의 일상을 인간극장 같은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특별한 사건도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잔인하도록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건 10년이 지났음에도 준페이의 죽음을 여전히 안고 있는 가족들이 같은 시공간 안에서 툭툭 내던지는 대사를 통해 갈등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못 견뎌낼 정도로 은근히 후벼 파는 날이 선 대사는 망자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보다 산자들의 상처를 더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죽은 아들 준페이에 대한 그리움은 요시오를 더 미워하는 감정으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준페이 아버지인 요코하마 코헤이는 찌라시를 만들며, 알바 인생을 사는 요시오를 노골적으로 경멸합니다.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하필 우리 애가. 기껏 알바나 하는 주제에. 쓸모없이 덩치만 큰놈.”

  아마 준페이가 살아있으면 자신이 평생 해온 의원의 가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좌절되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데 그런 미움의 감정은 요시오만을 향한 게 아니라 둘째 아들인 료타를 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료타가 별 볼일 없는 직업에 거기다가 아이까지 있는 미망인과 결혼을 한 게 못마땅했으니까요. 평생 의사의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온 요코하마 코헤이야말로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곧 길이고 진리라고 착각하는 고집불통의 어른이죠.  

  준페이의 어머니 요코하마 토시코의 요시오에 대한 미움은 섬뜩할 정도입니다. 추모행사가 다 끝나자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서는 요시오한테 거의 강요하듯이 말합니다.

  “내년에도 다시 와서 얼굴을 보여줘야지. 반드시 와야 해.”

  요시오가 떠나간 뒤 둘째 아들인 료타와 나누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은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요시오,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왜 그래야 하는데?”

  “왠지 불쌍해서요. 우리 보는 거. 괴로워하는 것 같고.”

  “그래서 부르는 거야.”

  집안의 희망이었던 준페이는 이미 10년 전에 죽었지만 그 죽음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가족들의 현재적 삶과 연결돼 있습니다. 준페이의 죽음이  자기희생이란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는 그저 미움의 감정을 재생산하는 슬픈 기억일 뿐입니다. 숭고한 희생이 오히려 미운 감정을 드러내는 동인이 되고, 그로 인해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상식을 배반하고 오히려 아이러니하게 상처를 줍니다. 하긴 그게 가족의 양면성이기도 하죠. 가족은 증오할 상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운 감정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움은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 가족을 배웅한 뒤, 아내 토시코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 코헤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다음 설 때 보겠군.”

  그때 버스 안에서 료타는 아내한테 말하죠.

  “설에는 안 와도 되겠어. 일 년에 한 번 보면 됐지.”

  <걸어도 걸어도>는 10년 전의 준페이의 죽음이 여전히 가족의 일상에 파고들어 갈등과 고통으로 되살아나고, 가족이라도 사랑만이 아니라 미운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양면성을 잔잔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준 영화입니다. 그래서 더 섬뜩해집니다. 나와 내 부모의 이야기, 우리 이웃의 이야기로 바로 환원되기 때문이죠.

       

  <걸어도 걸어도>는 억지 논리가 아니라 섬세한 연출로 인간의 심리를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준페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키키 키린의 친절한 미소 속에 감춰진 미움과 고통은 거의 악마적 수준에 가깝죠. 악마적 수준이라고 하는 건 그만큼 자연스럽다는 뜻입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슬며시 잡으려는 어머니의 손을 피하는 아들 료타. 끝내 손을 잡아주지 못한 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난 뒤 어머니의 묘를 찾아가지만 잡아줄 손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반복해서 어리석게 사는 아둔한 삶이기도 하죠. <걸어도 걸어도>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집안에 들어온 나비를 죽은 준페이가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는 어머니 토시코의 영생관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천륜이라고 하는 건 떼어낼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그런 영생관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료타의 가족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재혼한 아내와 아이는 여전히 죽은 남편과 아버지를 잊지 못합니다. 료타와의 결혼은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새로운 관계일 뿐이죠.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에 서로 어우러지며 서서히 또 다른 가족으로 자리를 잡아가겠죠. 료타가 아버지 쿄헤이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지독히 싫어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같은 아버지의 길은 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년)>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꼭 봐야 할 인생영화라고 극찬할 정도로 상투적인 스토리를 개성적인 캐릭터와 치밀한 구성, 그리고 절묘한 미장센으로 감동을 선사한 영화입니다. 스토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6년 동안 키워온 아이가 친자가 아니라 바뀌었다는 사실을 병원 측으로부터 듣고, 어른들의 일방적인 교환방식으로 아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소위 폭력적인 프로젝트와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게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신파적인 멜로드라마에 빠지지 않은 건 최루성의 감정을 절제하고, 어른들의 이기적인 가족주의와 어린 아이들의 천성을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뒤바뀌어 살고 있는 아이들의 배경은 극히 상투적입니다. 잘 사는 집과 가난한 집, 아이 혼자 목욕을 하게 하는 아버지와 아이들이랑 함께 목욕을 하는 아버지, 완벽하게 능력을 갖춘 아버지와 뭔가 조금 결핍이 보이는 아버지의 구도가 명확합니다. 비즈니스맨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집에서 자란 케이타는 등록금이 비싼 유치원을 다니고, 피아노도 열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타는 발전이 없이 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고, 이루려고 하는 승부욕도 없습니다. 거기다 자존심도 눈치도 없는 케이타가 료타에게는 불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가전과 전기제품을 파는 허름한 전파상을 하는 사카이 유다이(릴리 프랭키) 집에서 자란 료타의 친자인 류세이는 명석하고, 사리분별도 하는 아이입니다. 특히 사카이 유다이는 늘 일에 쫓기는 료타와 달리 경제적으로는 부족해도 아이들과 어울려 잘 놀아주고,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버지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캐릭터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휴머니즘의 궁극에 이르는 극적인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더 깊은 감동의 울림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친자식인 줄만 알았던 케이타가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료타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순혈주의를 맹신하는 수컷의 폭언이었습니다.  

  “역시 그랬던 거군.”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단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모든 걸 규정해 버립니다. 그건 6년 동안 아이를 키워온 자신의 삶마저 부정하는 셈이죠. 사자도 얼룩말도 자신의 핏줄이 아닌 새끼는 가차 없이 물어뜯어 죽여 버리는데 료타의 첫 반응도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뒤바뀐 아이들의 제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주말이면 케이타와 류세이는 서로 집을 바꿔 오가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합니다. 아이들이 받는 충격을 줄이고자 하는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죠. 료타는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류세이에게 마음이 더 끌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 료타가 사카이 유다이에게 불쑥 제의를 합니다.

  “그러면 둘 다 우리한테 주면 안 돼요?”

  “둘 다라뇨?”

  “케이타랑 류세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안 됩니까? 돈이라면 충분히 드릴 수 있어요.”

  (손으로 료타의 머리를 툭 치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있어. 자네 애를 돈으로 사는 거야?”

  성과주의를 신봉하고, 누구한테 져 본 적이 없는 료타에게는 그게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지만 그런 제의는 상대한테 엄청난 상처를 주게 되죠. 더 큰 문제는 료타의 그런 자기중심적인 제의가 상대한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료타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그렇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한밤중에 베란다에서 료타와 그의 아내인 미도리가 나누는 대사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미도리가 료타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죠.  

  “류세이가 사랑스러워졌어.”

  “그럼 기분이 안 좋아?”

  “그게 케이타한테 미안해서. 케이타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낳은 정과 기른 정, 그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의 추를 기울일 수 없는 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여자의 그 깊은 고민과 아픔을 죽었다 깨도 알기 어렵습니다. 수컷의 순혈주의와 유전자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은 그저 동물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요.     

  온 동네가 어둠에 휩싸여 있는데 불 켜진 베란다를 롱숏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이 압권이 이유는 온 동네가 어둠에 잠겨 있는데 미도리와 료타만이 깊은 고민과 아픔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서로 아이들을 바꿔가며 키우는 중에 류세이는 풍요로움이 넘치는 료타의 집에서 가출을 시도합니다. 격이 없이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들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죠. 료타도 뒤늦게 케이타가 남긴 흔적들을 보게 됩니다. 케이타의 마음이 담긴 종이꽃과 카메라에 온통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찍어놓은 모습을 보면서 케이타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고,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 깨닫게 됩니다. 껍데기로만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시간을 반성하게 되죠. 그리고 케이타를 만나기 위해 정해진 규칙을 깨고 케이타를 만나러 갑니다. 케이타는 료타를 보자마자 도망칩니다. 료타가 뒤쫓아 가며 케이타에게 말을 하죠.

  “미안해. 아빠는 케이타가 보고 싶어 약속을 깨고 왔어.”

  “아빠는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6년간은 아빠였어. 제대로 해주진 못했어도 아빠였어. 네가 준 장미 잃어버려서 미안해. 아빠도 피아노 치다가 그만 뒀어. 이젠 미션 같은 건 끝났어.”

  두 갈래의 길에서 나란히 걷다가 마침내 료타와 케이타는 마주 섭니다. 료타가 상처를 입은 케이타에게 무릎을 꿇고 케이타를 안아줍니다. 료타가 아버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니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인생영화로 마음에 와 닿는 건 단순히 혈육을 찾는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극중 내내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던 료타가 결말에서 부성애의 따뜻한 표정과 시선을 보여준 건 바로 신의 한수로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를 캐스팅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진함과 어른들의 이기심의 콘트라스트가 극적인 현실감을 높여주고, 극중 인물들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담아낸 미장센의 효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벽면의 칼라나 피아노, 장난감, 카메라, 사진, 망원경, 두 갈래의 길, 그 어느 것 하나도 소모적인 장식용 소도구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투사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충격적인 사건을 과잉 감정으로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그 슬픈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담담하게 대하기 때문에 울림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2016년)>는 철들지 않은 찌질한 어른인 료타(아베 히로시)와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들 싱고, 그리고 새 삶을 찾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 쿄코와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모여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할머니 요시코(키키 키린)가 엮어내는 가족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료타는 현직 사설탐정입니다. 소설가로 데뷔를 했지만 호구지책으로 사설탐정을 하고 있죠. 남의 사생활을 뒷조사하는 흥신소 직원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료타는 경제적으로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불성실하고, 신뢰마저 바닥을 드러낸 회복 불가능한 인물입니다. 가정주부와 불륜관계에 있는 고등학생을 협박해서 뜯어낸 돈과 직장 후배가 아들한테 잘 해주라고 건네준 돈을 경륜장에 가서 모조리 탕진하기 일쑤죠.           

  료타는 이혼한 아내 쿄코와 살고 있는 아들 싱고를 한 달에 한 번 만날 때, 양육비를 주어야 하지만 경륜장에서 다 잃었으니 어떡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핑계를 댑니다. 거기다 구차하게 쿄코가 만나는 남자의 뒷조사도 하죠. 혹시 쿄코가 사귀는 남자와 잠자리를 했는지 잔뜩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쿄코에게 물어보지만 허망한 대답을 듣게 되죠.

  “그럼 잤지. 내가 중학생인 줄 알아.”

  료타는 돈이 없으니 늘 궁한 생활입니다. 전철역사 안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노모의 집에 와서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는지 두 눈에 불을 켜고 찾기도 하죠. 불단에 놓여있는 떡을 슬쩍 집어 꾸역꾸역 먹기도 합니다. 아들 싱고한테 유명메이커 운동화를 사주고 싶지만 돈이 모자라 잔꾀를 부리기도 합니다. 운동화를 계단 논슬립에 대고 긁어서 흠집을 낸 뒤, 점원과 딜을 해서 기어이 싼 가격으로 사고 말죠.  

  료타는 아들 싱고한테 복권사는 법을 알려주고, 싱고는 복권을 사고 나서 할머니에게 묻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면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사실 료타는 어렸을 때 도박을 일삼는 아버지 영향으로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 멀어진 공무원의 꿈을 아들 싱고도 똑같이 꾸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싱고에게 아버지를 닮아서 글을 잘 쓴다고 칭찬을 하니까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죠.

  료타는 아들 싱고와 함께 노모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에게 고백을 합니다.

  “미안해. 능력없는 아들이라.”

  유머에 가까운 대사를 주고받기도 하죠.

  “난 대기만성형이야.”

  (귀신처럼 양손을 앞으로 내뻗어 흔들면서)“뭐 그리 오래 걸리나. 서두르지 않으면 나 귀신될 거야.”

  아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시간이 다 끝나가고 쿄코가 싱고를 데리러 왔을 때, 태풍이 몰려오는 뜻하지 않은 상황 때문에 다 같이 한집에 머물게 됩니다. 노모는 기회다 싶어 셋이 한방에서 자라고 이부자리를 펴줍니다. 료타는 혹시나 싶은 마음이고, 쿄코는 뜨악한 표정을 짓죠.

  밤중에 태풍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료타는 어릴 적 아버지와 놀던 추억이 떠올라 싱고를 데리고 미끄럼틀 아래로 들어갑니다. 료타는 싱고에게 태풍이 올 때 미끄럼틀 아래서 아버지와 함께 과자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죠. 미끄럼틀 아래서 추억이 있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집안에 있던 쿄코도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하게 됩니다. 자판기의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가족의 온기로 환치가 돼서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죠.

  태풍이 점점 심하게 몰아칠 때 싱고는 낮에 샀던 복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 가족은 한밤중 비바람이 몰아치는 놀이터에서 잃어버린 복권을 찾느라 소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것은 가족애를 회복하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죠. 결국 잃어버린 복권을 다 찾지는 못하지만 가족은 그때 한마음이 됩니다. 그게 바로 가족이죠.

  료타가 그랬듯이 싱고도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갖게 되는 공무원에 대한 꿈과 복권을 사는 행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유대와 정서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가족이든 좋든 나쁘든 간에 이어지는 정신적인 유전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건 가풍이 되기도 하고, 또 문화적 전통이 되기도 하죠.

  밤새 몰아쳤던 태풍이 지나가고 맑게 밝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하룻밤을 함께 지냈던 료타와 쿄코, 싱고는 태풍이 지나간 뒤 서로의 갈 길을 가게 됩니다. 아파트에서 노모는 세 사람이 가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줍니다. 태풍이 몰아쳐 부서진 우산 하나가 길가에 버려진 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 우산은 료타의 가족이 물리적으로 다시 합치는 게 아니라 이미 부서진 가족임을 상징하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진하게 여운이 남을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관객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작가로 등단해 유명 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구차한 시설탐정을 하는 료타, 행복을 꿈꿨던 결혼생활이 어긋나 이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 쿄코,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싱고, 40년 내내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온 노모인 요시코. 그들은 모두 애초에 자신이 꿈꿨던 꽃길이 아니라 어긋난 삶을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지 못한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까요?

  루저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사람이 어릴 적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건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나아가는 거죠. <태풍이 지나가고>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건 철없는 어른이 철이 든 아버지로 다가가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남루하고 구차한 삶이더라도 인간의 품위와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몸짓은 관객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매력은 <걸어도 걸어도>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캐스팅됐다는 것입니다. 찌질한 어른 료타 역을 맡은 아베 히로시와 그의 어머니인 요시코 역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키키 키린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가 <걸어도 걸어도>의 속편이 결코 아닙니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릅니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료타의 흥신소 사장 역으로 캐스팅된 릴리 프랭키가 딱 한마디 하는 대사도 기억에 남습니다.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남자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여러분은 어릴 적 되고 싶었던 어른 됐나요?

  그 길을 가고 있는 건가요?    

작가의 이전글 겨울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